무한공간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

ㅋㅌㅌ 2019. 4. 10. 22:14

#사형수 출신 이승만 해외 독립운동 주도  

KBS 한국사전 – 이승만 제1부 / KBS 2008.8.30. 방송 

https://www.youtube.com/watch?v=SqMOfDesFXQ 

 

 

1919년에 망명 후 같은 해 4월 11일에 설립된 대한민국의 임시정부. 미완성된 최초의 대한민국으로, 2019년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한다. 

 

1919년 3월 1일 3.1 운동 당시 독립선언을 계기로 일제의 대한제국 침탈과 식민 통치를 부인하고 한반도 내외의 항일 독립운동을 주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건립된, 한민족 최초의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의 시초인 망명정부다. 현대의 대한민국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하였다.

 

창립

경술국치로, 일본에게 주권을 양도한 행위는 무효이며, 순종황제가 포기한 대한의 주권은 대한국민에게로 승계되었다는 정신이 확립되었다.[6] 이에 따라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파리 강화 회의가 열리자, 일제의 불법적 통치에 저항하며 공화정을 확립하기 위해 상해에서 신한청년당이 결성되었다. 신한청년당은 파리 강화 회의에 대표(김규식)를 파견하였고, 일본에는 장덕수를 파견하여 2.8독립선언을 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소식들이 식민지 조선에 전해지자 독립에 대한 희망이 생겼고, 고종의 사망으로 군중이 운집한 상황에서 기미독립선언이 일어났다.

 

독립 선언의 결과 상하이에서 항일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1919년 4월 10일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을 창설하였다. 여기에서 국호와 정부 형태, 임시헌법 등을 논의하게 되었는데, 신석우가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흥하자"라고 제안하여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이와 함께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제정하였다. 다음 날인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제정하고 상해임시정부를 건설하였다. 

 

이전에는 임시정부 수립일이 4월 13일인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당시 임시정부에서 4월 11일에 정부 수립 기념식을 거행했다는 자료가 공개되었고, 학계에서 지속적으로 기념일 일자 변경을 요구해 왔다. 그래서 2018년 4월 13일에 대한민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임시정부 수립일을 4월 11일로 환원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2019년부터는 4월 11일을 임시정부 수립일로 기념하기로 했다. 30년 만에 임시정부의 생일을 바로 잡은 것.

 

상해임시정부와 비슷한 시기에 같은 기치를 내걸고 경성부에서 한성정부가 13도 대표 국민 대회의 명의로 선포되었고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대한국민의회 임시정부가 결성되었다. 그러나 임시정부를 칭하는 세력들이 분산되어 있을수록 항일투쟁이 힘들다는 의견이 모아져서 서로 통합을 계획하게 된다.

 

이에 국민의회-상해임시정부가 먼저 통합을 하기로 했지만 중국과 러시아라는 위치 문제로 좌절되었다. 그러나 국민의회의 대다수를 임시의정원에 포함시킨다는 조건으로 결국 통합되었다. 한반도에 있는 한성 정부와의 통합 역시 난관이 많았지만 한성정부가 국제언론에 노출되었다는 것, 국내에서 국민대회를 통해서 결성되었다는 점에서 정통성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그래서 정통성과 기틀은 한성정부로 하고 대신 위치와 국명을 상해임시정부로 한다는 것으로 합의안이 완성되어서, 결국 그 해 9월 11일에 상해 임시정부로 통합되어 통합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상해 임시정부를 제외한 여러 정부들은 실질적으로는 임시정부였지만 자체적으로 임시정부라는 이름을 사용한 적이 없다. 임시정부는 정부를 지칭하는 이름으로만 사용되었으며, 국명은 엄연히 대한민국이었다.

 

창립인

상해 임시정부 수립 당시의 참여자로는 여운형, 조동호, 손정도, 조소앙, 김철, 선우혁, 한진교, 신석우, 이광수, 현순, 신익희, 조성환, 이광, 최근우, 백남칠, 김대지, 남형우, 이회영, 이시영, 이동녕, 조완구, 신채호, 진희창, 신철, 이영근, 조동진, 여운홍, 현장운, 김동삼 등 29인이 있었다.

 

이 중 여운형, 조동호, 손정도, 조소앙, 김철, 선우혁, 한진교, 신석우, 이광수는 신한청년당 당원이었다. 그만큼 창립 당시에 신한청년단의 영향은 강했다. (파리 강화 회의에 대표를 파견하고 3.1 운동의 불씨를 제공한 게 신한청년당이었으니 당연하다.) 김구도 신한청년당에 관여하였지만, 정부 수립 당시에 참여하지는 않았고 수립 며칠 후에 임시정부를 찾아왔다. 김규식도 신한청년당원이었지만 당시 미국에서 이승만과 함께 독립 운동을 하고 있어서 임정 수립 당시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대한민국 3년(1921년) 1월 1일

임시정부·임시의정원 요인 58명의 신년축하식(상하이) 사진. 

1열 3번째가 김구, 2열 6번째가 이동휘, 7번째가 이승만,

2열 11번째가 안창호.

 

조선총독부 해체 (이승만 ~ 김영삼)

조선 총독부 기구는 미군정 기구가 되었다. 일제에 부역한 친일 민족반역자들은 유임되었고 곧 승진했다. 특히 해방지 되자 두려워 피신했었던 경찰을 다시 불러 불러들인 것은 한국인을 분노케 했다. 해방은 해방이 아니었다. 

 

미군정은 38도선 이남의 일본군은 무장해제 시켰지만 일경으로 복무했던 조선인 경찰들은 거의 그대로 기용했으며 조선총독부 산하 관리들도 변함이 없었다,  군정 경찰은 경무국이라는 이름으로 1945년 10월 21일에 창설됐다. 1946년 11월 기준으로 상위 계급의 간부가 된 군정 경찰의 82%에 달하는 사람들이 친일 경력이 있었다.

 

미국이 한국인 의사와는 반대로 친일파를 관리자로 유임시킨 것은 친일파에 대한 한국인의 감정과 한국의 현실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미 군정이 조직저긍로 잘 훈련된 친일 경찰을 중시한 이유는 경찰 책임자 마글린 대려의 다음과 같은 발언에 드러나 있다. "그들이 일본인을 위해서 훌륭한 업무를 수행했다면 우리를 위해서도 그럴 수 있으리라고 생각 합니다."

 

남조선 과도 입법의원에서 미군정과 극우 세력의 반대를 무릅쓰고 1947년 7월 '민족반역자 부일 협력자 간상배에 대한 특별법'이 통과 되자 미군정은 이것을 공포할 것을 거부했다. 미국은 제헌 국회에서 친일파를 처단하려는 것에 대해서도 곱지 않은 시선으로 지켜봤다. 미국은 이승만에게 친일파를 관리로 등용할 것은 꾸준히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일본과의 수교조건으로 대마도 반환, 식민지보상 36억불 청구 등 사실상 일본이 받아 들일 수 없는 요구를 함으로써그는 끝끝내 일본과의 수교를 거부했다.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었다가 1995년에 일제 잔재의 청산과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우자는 일환으로 철거되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역사 바로세우기를 위해 조선총독부 건물을 해체하라고 지시하였고,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1995년 8월 15일 광복절에 중앙돔 해체를 시작으로 1996년 11월 13일에 모든 철거작업을 완료했다.

사실 6.25 전쟁이 끝나고 이승만 초대 대통령부터 노태우 대통령 시절까지 매번 대통령들이 조선총독부를 철거하려는 움직임은 있었다. 

35년간의 식민시대가 지나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부터 곧바로 치욕의 과거사를 대표하는 총독부 건물 철거를 둘러싼 찬반 논쟁이 시작되었다. 

이승만 전 대통령도 지나가면서 저 건물을 놔두어서 되느냐고 여러 차례 되내었다고 한다. 맨 처음에 해체가 논의된 것은 6.25 전쟁 중이었던 1.4 후퇴 이후에 막 서울을 수복한 직후. 이승만 대통령이 일제의 상징을 서울의 심장부에 둔다는 것이 말이 되냐면서 철거를 지시하면서였다.

당시 이 계획을 검토한 사람은 육군 공병감 엄홍섭과 육군 참모총장친일파 매국노 버저리 개색히 백선엽이었는데, 당시 공병대에서는 "이렇게 막대한 석재를 나를 장비를 도무지 못 구하겠다." 하고 난색을 표했고 백선엽도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미군에게 불도저 4대를 빌려오긴 했는데 중장비는 그게 고작이었고 기껏해야 지게꾼들이나 동원할 수 있었다. 해체할 능력은 아예 없고 폭파라도 시켜서 억지로 없앤다 해도 무거운 석재를 나를 능력은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핵심적 원인은 당시 대한민국의 국력으로는 철거할 능력이 없었다는 것. 당시는 모든 정부 재정과 수입 물자를 미국 원조에 의존할 때였다. 

백선엽은 1943년 2월 간도특설대의 일원으로서 압록강, 두만강 상류 일대에서 중국 항일 게릴라 토벌에 종사했다. 당시 중국 공산당이 주도한 항일 게릴라에는 중국인, 만주인과 함께 조선인도 포함돼 있었다.

 

...문재인 친일 매국노 버러지 개색히 백선엽 현충원 안장
...백선엽 장군 빈소에 조화 보냈던 문재인 대통령

 

 

 

 

 

 

 

이승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원래 상해에 있는 임시정부가 만주와 간도에 있는 무장단체를 직접 지휘할 수 없다. 임시정부가 상해에 들어가서 외교를 할 것인가, 연해주에서 무장투쟁을 할 것인가의 대결에서 외교론이 승리해서 상해 조계지에 자리잡은 시점에서, 임시정부는 만주와 연해주, 한반도 본토와의 직접적 연결고리를 빠르게 상실한다.

 

무장 독립운동의 구심점이었던 배재학당 지청천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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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줄 가운데 지청천 장군 ( 출처: 국가보훈처 )

 

무장 독립운동의 구심점이었던 지청천 장군 

(1888.2.15~1957.1.15)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으로 무장독립운동 전두지휘. 본명 지대형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매진했던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있었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으로서 독립운동 전체의 구심점이었다면, 지청천 장군은 무장투쟁의 구심점이었습니다.

 

지청천은 1906년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1908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교했다. 

지청천은 일본으로 갔고 1914년에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이때 일본행을 택한 각오가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 병과는 보병이었고 일본군 육군 장교로 근무하던 중에 동기 김경천과 함께 1919년에 남만주 삼원보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이 되었다.

 

지청천 장군은 배재학당 배재대학부와 한국무관학교를 거쳐 일본에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 근대적인 군사지식을 습득한 군사인재였다. 3.1운동 발발 후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신흥무관학교의 교장으로 취임, 수많은 독립군을 양성하는 데 힘썼으며 이후 일제의 독립군 말살 정책이 시행되었을 때에는 서로군정서를 지휘하며 일군과의 교전 최전선에서 활동하였다. 

 
 

 

 

1920년 지청천은 상하이 임시정부에 합류했다가 곧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의 만주군정부로 건너갔다가 초빙을 받고 서로군정서 간부에 취임, 활동하였다. 

1924년 조선의용군 총사령관에 선임돼 일제 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국내 진격작전을 벌였습니다. 서로군정서 등에서 근무하면서 1920년 북만주에서 청산리 전투 이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신흥무관학교를 폐쇄, 북만주로 이동하여 정의부와 혁신의회에 참여하였다.  

 

1930년에는 한국독립당을 조직, 산하 한국독립군 총사령관으로 ‘대전자령전투’ 등 큰 승리를 일궈냅니다. 

그러나 청산리 대첩 이후 일본군의 한국인에 대한 대대적인 보복을 피하여 신흥무관학교를 폐교하고 병력을 간도로 이끌고 건너가, 서일, 홍범도, 김규식, 김좌진 등과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했다. 

 

1940년 일제의 중국 대륙 침략으로 정부 청사를 상하이에서 남경, 광저우, 장사 등으로 옮기다 중경에 정착한 임시정부는 임시헌법 개정을 통해 주석제를 도입하여 3월 13일 주석에 김구를 옹립하였다. 5월에는 민족주의 진영의 임정 내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은 합당하여 새로이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고, 임시정부의 여당이 되었다. 9월 17일에는 중국 국민당의 지원을 얻어 지청천을 총사령으로 하는 한국 광복군을 조직했다.

 

1940년에 충칭으로 가, 임시정부 한국광복군 창설에 참여하여 광복군의 총사령관을 맡게 되면서, 명실공히 한국군을 대표하는 주역으로 활동하였다. 조선의용대 김원봉이 부사령관이었고 지청천은 총사령관이었다.


광복이 이뤄지자 1946년에 귀국해 광복군을 재건하려고 하였으나 미군정의 반대로 실패하고 우익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단을 세웠다. 남북협상에 반대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했다.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하던 중 일제의 항복 소식을 들은 임시정부는 9월 3일 김구 주석을 중심으로 당면 정책 14개조를 제정하였다. 이것의 핵심 내용은 임시정부가 국내로 환국하여 내지의 각계 대표들을 소집한 뒤 과도정부를 구성하면 임시정부의 모든 권위와 주권, 헌법, 국기, 국가 등을 양도하고 자진해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군정은 미군정만이 한반도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선언하여 임시정부 또한 정부 승인을 받지 못해 개인자격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미국이 이런 판단을 내린 것은 당시 한반도뿐만 아니라 아시아에 대한 정확한 이해나 정보가 없었고 그나마 항복한 일본군들로 부터 듣은 정보가 전부다 보니 대한 임시정부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다. 당연히 이들은 한반도 남쪽의 점령군으로 자처하였고 남한현실을 정확하게 인지 하지못해 친일경찰과 친일관료들을 미군정에 소속시키거나 남한 현실에 맞지 않는 정책을 실행하는 병크를 저지렀다. 다만 소련군정같은 경우는 소련군내 조선인 계열 공산주의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한반도 현실을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 따라서 초반을 제외하면 북한 사회를 빠르게 안정시켰다. 사실상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정보부재가 오늘날의 비극을 만든것이다

광복 이후 행보와 대한민국 정부로 승계

임시정부의 반탁 운동 전개와 국권 인계 시도에 미군정은 임정을 와해하려 했고, 이로 인해 임시정부와 미군정 간의 갈등은 극도로 달하게 된다. 임시정부 국무위원들은 환국 직전 결의대로 과도정부를 수립하여 임정의 권한을 이양하려 비상국민회의(1947년 이후로는 국민회의로 개칭)와 최고정무위원회 등을 신설하였으나 의도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48년 5.10 총선거가 시행되어 제헌 국회가 개원하였고, 여기에서 국호를 임시정부에서 채택한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헌법 전문에 "기미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라는 구절을 삽입함으로써 1919년 독립선언으로 성립된 임시정부에 민주공화제 정부의 기원과 한국 통치 권력의 정당성이 있음을 명문화했다. 이후 8월 15일 정식 정부가 수립됨에 따라 임시정부는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1885. 08. 03 배재학당 (Pai Chai Academy, 培材學堂) 창립 (설립자 아펜젤러 H. G. Appenzeller)

1886. 04 .01 초대학당장 아펜젤러 취임

1886. 06. 08 고종황제로부터 '배재학당' 현판 하사

1895. 09. 01 배재대학부 (Pai Chai College) (영문학과, 국한문학과, 신학과)

1896. 04. 07 배재학당내에서 「독립신문」발간(서재필)

1896. 11. 30 배재협성회(학생회) 조직(지도 서재필)

1925. 09. 17 조선총독부에 의해 배재학당 교명 폐지

1937. 03. 03 배재중학교(5년)로 개칭

1951. 08. 21 배재중학교(3년) 및 배재고등학교(3년)로 개편

1955. 04. 26 대전보육학원 설립 (설립자 허길래, Clara Howard)

1992. 03. 13 배재대학교 (Pai Chai University)

 

1. 1895. 09. 01 배재대학부 (Pai Chai College) (영문학과, 국한문학과, 신학과)

2. 1951. 08. 21 배재중학교(3년) 및 배재고등학교(3년)로 개편

 

 

배재학당 (Pai Chai Academy)  → 배재대학부(Pai Chai College) → 배재고등학당 → 배재중학교 → 배재고등학교 → 배재대학교(Pai Chai University)

... [팩트체크] 배재대학부 1895년 > 배재고등학교 195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