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안중근 옥중가

ㅋㅌㅌ 2016. 3. 26. 06:16





안중근 의사의 ‘옥중가’가 100년만에 국내에 처음 공개됐다.


노동은 중앙대 명예교수는 13일 광복 70주년을 맞아 독립가와 항일가, 형명가 등의 항일노래를 모아 언론에 공개했다.

안 의사의 여동생인 안익근이 6촌 동생 곽희종에게 가르쳐 중국에서는 이미 널리 알려진 이 노래가 10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한국에 소개된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하고 뤼순 감옥에 갇힌 안중근 의사는 이듬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전까지 직접 작사·작곡한 이 '옥중가'를 부르며 울분을 달랬다.


'망향가'에 가사를 붙인 이 곡은 안중근 의사의 옥종 심정을 대변하는 다음과 같은 노랫말로 돼 있습니다.


"적막한 가을 강산 야월삼경에/슬피 울며 날아가는 저 기러기야/북방에 내 소식을 네가 아느냐/여기서 저기까지 몇리 되는지/아차차 가슴 답답 이 내 신세야…"

“만주땅 시베리아 넓은 들판에/동에 갔다 서에 번쩍 이내 신세야/교대 잠이 편안하여 누가 자며/콩둔 밥이 맛이 있어 누가 먹겠나/때려라 부셔라 왜놈들 죽여라.”(옥중가 3절 가사)








1박2일 평균기온 영하 20도의 중국에서 가장 추운 도시 하얼빈으로 떠나는 ‘혹한기 졸업캠프’  


장부가 세상에 나가니 그 뜻이 크도다. 때가 영웅을 만들고 영웅은 때를 만드는 도다
丈夫處世兮 其志大矣 (장부처세혜 기지대의) 時造英雄兮 英雄造時 (시조영웅혜 영웅조시)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은 중국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1910년 2월 14일에 사형 선고를 받았고, 이후 3월 26일 사형당해 뤼순 감옥 묘지에 묻혔다. 안중근은 유언으로 자신의 유해를 하얼빈 공원에 묻었다가 고국이 해방되면 그때 고국의 땅에 묻어달라는 말을 남겼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아직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토의 하얼빈 방문을 환영하는 현지 일본인 환영객들 중 누군가가 이토의 이름을 부르자 이토가 뒤를 돌아서서 손을 흔들어 주는 덕분에 안중근 의사가 그 자의 얼굴을 보고 점 등을 확인하여 본인임을 알아보고 저격을 할 수 있었던 것. 정말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역사학자 E.H. Carr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 라고 했다. 


Carr는 역사란 단순히 과거 사실의 기술이 아니라 현재의 상황에 위치지어져있는 현재의 역사가가 과거를 평가하고 서술하는 것이 역사라고 말한다. 그리고 역사란 하나의 과학이고, 과거의 인물들의 평가를 하는 도덕가는 아니라고 말한다. 역사는 Carr가 말한데로 현재와의 대화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역사가의 시각에 따라 변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역사적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역사는 사실이고 그러한 사건의 열거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역사가 그렇게 사건의 나열로서만 끝날것은 아닐 것이다. 사건을 보고 그것에서 배우며 그를 해석하는 방안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이 바로 歷史다.


솔직히는 "과거와의 대화"로 기억하고 굳어버린 지식이었는데, 1박2일 하얼빈특집 안중근편 덕분에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로 새롭게 숨쉬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