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공간

독립운동 숙청, 친일파 대세인 대한민국 캠퍼스 씁쓸한 현실

ㅋㅌㅌ 2017. 9. 19. 12:26

청산되지 않는 과거, 대학의 친일 부역
동상, 기념관, 학술상, 기념상 등 친일인사 기념사업 수두룩
대학가 친일동상 · 기념관 · 장학금 현황
- 감리교신학대: 정춘수
- 경북대 : 사범대 건물 내 박정희 안면 부조
- 고려대 : 김성수(호 인촌) 동상
- 단국대 : 홍난파(호 난파) 흉상, 난파 기념 음악관
- 덕성여대 : 송금선(호 남해) 남해 장학금
- 동덕여대 : 조동식(호 춘강) 춘강학술정보관(도서관). 춘강장학금 
- 동의대: 김임식 동상, 기념관- 상명대 : 배상명(호 계당)
- 상명대 : 배상명(호 계당) 서울천안 흉상, 계당 기념관, 계당 장학금
- 숭실대 : 안익태 기념관,  안익태 흉상
- 서울대 : 장발 동상 (미대 앞) / 현제명 동상 (음대 앞)
- 서울여대 : 고황경(호 바롬) 바롬 교육관, 바롬 장학금, 바롬인성교육, 바롬하우스
- 서울예대 : 유치진(호 동랑) 반신상, 동랑 청소년 연극제
- 성균관대 : 600주년 기념관 (을사오적 이완용과 박제순 그리고 윤덕영, 김윤식, 정만조, 박상준, 이경식 등 일본 식민지배 정당화에 앞장선 친일파들 성균관대 총장 명패)
- 성신여대 : 이숙종(호 운정) 이숙종 동상, 운정그린캠퍼스, 운정관, 운정장학금
- 연세대 : 백낙준(호 용재) 동상, 용재관, 용재상, 용재석좌교수 / 유억겸 기념관 
- 이화여대 : 김활란 동상
- 인덕대 : 박인덕 전신상 
- 전북대 : '덕진 공원비' 친일파 박기순의 공적을 기린 비석- 중앙대 : 
- 중앙대 : 임영신(호 승당) 영신관(단과대), 임영신 동상(좌상), 영신기념관(음대, 안성), 승당 임영신 장학금
- 추계예술대 : 황신덕 학교 입구 쪽 전신상, 황신덕 장학금
- 한국외국어대 : 김흥배 동상 (글로벌캠퍼스)

친일 업적으로 일본한테 훈장 받은 대학총장
- 김두헌 숙명여대 총장
- 김성수 고려대 설립자
- 고황경 서울여대 학장
- 곽종권 건국대 총장
- 권상로 동국대 총장
- 박인덕 인덕대 설립자
- 박일경 명지대 총장
- 배상명 상명대 설립자
- 백낙준 연세대 총장
- 서은숙 이화여대 이사장
- 송금선 덕성여대 이사장
- 신봉조 상명대 이사장
- 이숙종 성신여대 이사장
- 이항녕 홍익대 총장
- 조기홍 성신여대 총장
- 황신덕 추계학원 이사장
.... TMI . 자세하고 구체적인 친일 매국 행위는 검색 해보시길.


청산되지 않는 과거, 대학의 친일 부역 
대표적인 것이 대학 사회다. 해방 전후에 설립된 대부분의 대학에 친일 인사들이 자리를 잡거나, 종래의 대학 운영권을 유지했다. 

예컨대 해방후 서울대 초대 총장을 역임한 이춘호 같은 사람이 대표적이다. 그는 기독교 내선일체와 황민화에 앞장섰던 대표적인 기독교인이다. 이 밖에도 고려대학 총장을 역임한 유진오, 연세대학의 백낙준, 이화여대의 김활란은 말할 것도 없고, 성신여대의 이숙종, 상명여대의 배상명, 서울여대의 고황경, 중앙대학의 임영신 등 이들 대학 설립자나 총장, 이사장을 지낸 이들은 조선임전보국단등에 가입한 친일 대부들이었다. 덕성여대의 송금선도 마찬가지로 1급 친일 부역자였다. 

연희전문학교 (현 연세대학교)나 이화여자 전문학교(전 이화학당, 현 이화여자대학교)는 총장인 윤치호와 김활란이 친일 행위로 인해 일제에 의한 학교규제가 비교적 느슨했던 편이었다. 고려대, 동아일보 설립자 김성수는 전국 일간지에 내선일체 찬양글, 학도병 권유, 징병, 학병을 찬양하며 선전·선동하는 글을 기고하는 등 친일 반민족 행위가 인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등록되어 건국훈장이 박탈 되었다. 서울대 (경성제국대학) 출신과 서울대 교수를 역임했던 친일인물 12명의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을사오적 이완용과 박제순 그리고 윤덕영, 김윤식, 정만조, 박상준, 이경식 등 일본 식민지배 정당화에 앞장선 친일파들이 성균관대 총장을 지내기도 했다. 성균관대 600주년 기념관에 총장 명패에서 확인할수 있다.

동아일보 창립자이기도 한 김성수는 1938년에는 친일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이자 이사였고, 산하 비상시생활개선위원회 위원을 역임하면서 친일행위를 했다. 이후에도 흥아보국단 결성 준비위원 등으로 활동하면서 학병제·징병제를 찬양하는 글을 쓰거나 강연을 했다. 그러나 고려대에는 김성수의 동상 뿐 아니라 그의 호를 딴 ‘인촌기념관’을 두고 있으며, 같은 재단의 중앙고등학교에도 김성수의 동상과 인촌기념도서관이 있다.

친일문제는 해당 대학이 친일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러나 명색이 교육기관인 이상 그래도 지켜야 할 최소한의 금도는 있다. 친일 행위가 다대한 설립자를 온통 미화하는 위인전을 제작해 설립자의 중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읽히고 독후감을 쓰게 하는 것은 적어도 역사에 대한 범죄행위이다.

대학의 홈페이지에 "인간을 존중히 여기고 겨레와 민족에 봉사하는 것을 일생의 과업으로 몸소 실천하셨을 뿐만 아니라, 민족교육의 이념을 설정하시고 제도의 기초를 놓아 새 나라를 세우신 민족의 선각자이고 겨레의 스승" 이라고 버젓하게 올리는 것은 차마 교육의 양심으로 못할 짓이다. 이런 작태가 세계의 유수 대학과 어깨를 겨눈다고 자부하는 한국 대학교의 실상이다. 마지막 지성의 보루여야 할 대학사회마저 우리 사회의 친일 잔재에 대한 대학들의 철저한 반성과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기도 하다

부끄러움이자 안위만을 탐닉해온 대학의 부끄러운 모습이다. 변화되지 못하고 사는 그 대학의 모습을 돌이켜보며, 창피함과 부끄러움을 느껴보는 하루가 됐으면 합니다. 다른 대학과 달리 잘못된 부분에 지적을 하는데 질척거리면서 변명 아닌 변명만 주구장창 늘어놓고 있을뿐이다. 결국 욕심을 내려놓아야 진정한 대학의 위치를 찾게 될것이다.

마지막 지성의 보루여야 할 대학사회마저 우리 사회의 친일 잔재에 대한 대학들의 철저한 반성과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기도 하다. 

 

 

[충격] 평양에서 사상초유의 고대 지하궁전 발견되자 난리난 중국상황 

https://www.youtube.com/watch?v=octfCxUFsxY 

 #해외반응 #외국인반응 #한류열풍 속보 서해바다에서 드러난 옛 고대 한국의 아틀란티스 

https://www.youtube.com/watch?v=65JyjZi1xuE 

#고구려 #고대사 #역사 #식민사학자 #식민사관 

지금까지 알고 있던 고구려는 가짜? 진짜 고구려 땅은 어디? 

https://www.youtube.com/watch?v=gtnKoCP07QI 

 

일본은 대한제국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침략하여 가장 먼저 한 일이 한국 역사가 한반도를 벗어난 적이 없고, 중국의 속국으로 살아왔다고 조작하여 세괴 교육을 시켰습니다. 현재 한국 정부에서는 우리 역사를 지킨다는 명목하에 많은 돈을 투자해 왔지만, 아직 일본이 조작한 식민사관, 그리고 중국이 주장하는 동북공정 사관을 털어내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현실이 이어진다면 국제사회는 한국을 중국의 속국이나 위성국으로 인정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우리 대일본제국은 패전하였지만 조선은 승리한 것이 아니다. 내가 장담하건대, 조선인들이 다시 제정신을 차리고 찬란하고 위대했던 옛 조선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여년이라는 세월이 훨씬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선인들에게 총과 대포보다 더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 놓았다. 결국 조선인들은 서로를 이간질하며 노예적인 삶을 살 것이다. 

보아라! 실로 옛 조선은 위대하고 찬란했으며 찬영했지만 현재의 조선은 결국은 식민교육의 노예들의 나라로 전락할 것이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가 한국을 떠나면서 남긴 저주의 말

 

 

 

[앵커]

YTN은 앞서 여러 차례 대표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 민영휘의 무덤을 관리하는 가옥이 지방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는 것을 보도했습니다.

문화재로 지정돼 수억 원 세금이 들어가고 있지만, 친일 관련 역사는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했는데요.

계속된 문제 제기에 춘천시가 문화재 안내판을 슬그머니 교체했는데, 과연 어떻게 기록돼 있을까요?

 

YTN [단독] 친일파라 부르지도 못하고..슬그머니 교체한 안내판 

https://news.v.daum.net/v/20220331022809392

 

[단독] 친일파라 부르지도 못하고..슬그머니 교체한 안내판

[앵커] YTN은 앞서 여러 차례 대표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 민영휘의 무덤을 관리하는 가옥이 지방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는 것을 보도했습니다. 문화재로 지정돼 수억 원 세금이 들어가고 있지만,

news.v.daum.net

 

 

 

 

 

 

 

 

 

 

 

 

 

 

 

 

 

 

 

 

 

 

 

 

 

 

배재학당 출신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한글학자 주시경,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  윤치호, 김지호, 의학자이자 사회사업가 오긍선, 민족 시인 김소월 소설가 나도향, 여윤형(자퇴)
일제 감정기 일제 감정기 당시 배재학당 출신 학생들이 독립운동을 너무 열심히 했기 때문에 총독부에서 배재학당을 강력히 규제하며 대학설립을 방해했다고 한다. 

 

 

조선총독부 해체 (이승만 ~ 김영삼)

조선 총독부 기구는 미군정 기구가 되었다. 일제에 부역한 친일 민족반역자들은 유임되었고 곧 승진했다. 특히 해방지 되자 두려워 피신했었던 경찰을 다시 불러 불러들인 것은 한국인을 분노케 했다. 해방은 해방이 아니었다. 

 

미군정은 38도선 이남의 일본군은 무장해제 시켰지만 일경으로 복무했던 조선인 경찰들은 거의 그대로 기용했으며 조선총독부 산하 관리들도 변함이 없었다,  군정 경찰은 경무국이라는 이름으로 1945년 10월 21일에 창설됐다. 1946년 11월 기준으로 상위 계급의 간부가 된 군정 경찰의 82%에 달하는 사람들이 친일 경력이 있었다.

 

미국이 한국인 의사와는 반대로 친일파를 관리자로 유임시킨 것은 친일파에 대한 한국인의 감정과 한국의 현실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미 군정이 조직저긍로 잘 훈련된 친일 경찰을 중시한 이유는 경찰 책임자 마글린 대려의 다음과 같은 발언에 드러나 있다. "그들이 일본인을 위해서 훌륭한 업무를 수행했다면 우리를 위해서도 그럴 수 있으리라고 생각 합니다."

 

남조선 과도 입법의원에서 미군정과 극우 세력의 반대를 무릅쓰고 1947년 7월 '민족반역자 부일 협력자 간상배에 대한 특별법'이 통과 되자 미군정은 이것을 공포할 것을 거부했다. 미국은 제헌 국회에서 친일파를 처단하려는 것에 대해서도 곱지 않은 시선으로 지켜봤다. 미국은 이승만에게 친일파를 관리로 등용할 것은 꾸준히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일본과의 수교조건으로 대마도 반환, 식민지보상 36억불 청구 등 사실상 일본이 받아 들일 수 없는 요구를 함으로써그는 끝끝내 일본과의 수교를 거부했다.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었다가 1995년에 일제 잔재의 청산과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우자는 일환으로 철거되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역사 바로세우기를 위해 조선총독부 건물을 해체하라고 지시하였고,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1995년 8월 15일 광복절에 중앙돔 해체를 시작으로 1996년 11월 13일에 모든 철거작업을 완료했다.

사실 6.25 전쟁이 끝나고 이승만 초대 대통령부터 노태우 대통령 시절까지 매번 대통령들이 조선총독부를 철거하려는 움직임은 있었다. 

35년간의 식민시대가 지나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부터 곧바로 치욕의 과거사를 대표하는 총독부 건물 철거를 둘러싼 찬반 논쟁이 시작되었다. 

이승만 전 대통령도 지나가면서 저 건물을 놔두어서 되느냐고 여러 차례 되내었다고 한다. 맨 처음에 해체가 논의된 것은 6.25 전쟁 중이었던 1.4 후퇴 이후에 막 서울을 수복한 직후. 이승만 대통령이 일제의 상징을 서울의 심장부에 둔다는 것이 말이 되냐면서 철거를 지시하면서였다.

당시 이 계획을 검토한 사람은 육군 공병감 엄홍섭과 육군 참모총장친일파 매국노 버저리 개색히 백선엽이었는데, 당시 공병대에서는 "이렇게 막대한 석재를 나를 장비를 도무지 못 구하겠다." 하고 난색을 표했고 백선엽도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미군에게 불도저 4대를 빌려오긴 했는데 중장비는 그게 고작이었고 기껏해야 지게꾼들이나 동원할 수 있었다. 해체할 능력은 아예 없고 폭파라도 시켜서 억지로 없앤다 해도 무거운 석재를 나를 능력은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핵심적 원인은 당시 대한민국의 국력으로는 철거할 능력이 없었다는 것. 당시는 모든 정부 재정과 수입 물자를 미국 원조에 의존할 때였다. 

백선엽은 1943년 2월 간도특설대의 일원으로서 압록강, 두만강 상류 일대에서 중국 항일 게릴라 토벌에 종사했다. 당시 중국 공산당이 주도한 항일 게릴라에는 중국인, 만주인과 함께 조선인도 포함돼 있었다.

백선엽, 일어 자서전에 조선인 토벌 고백
만주 군관학교를 나와 간도특설대에 배치
2009년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는 백 장군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했고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도 백 장군의 이름이 올라가 있다.
간도특설대는 항일 조직을 공격하기 위해 1938년 조선인 중심으로 조직해 1939년부터 본격적인 작전을 수행하였으며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존속한 800~900여 명 규모의 대대급 특수부대였다. 백 장군의 자서전에는 이 시가를 아예 다루지 않았으며 일본어로 출판한 자서전에만 간략하게 다뤘다.
백선엽은 간도특설대의 일원으로서 압록강, 두만강 상류 일대에서 중국 항일 게릴라 토벌에 종사했다. 당시 중국 공산당이 주도한 항일 게릴라에는 중국인, 만주인과 함께 조선인도 포함돼 있었다.
"우리가 전력을 다해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졌던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배반하고 오히려 게릴라와 함께 싸웠더라도 독립이 빨라졌다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조금 후회스럽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은 사실이었고 그 때문에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

...문재인 친일 매국노 백선엽 현충원 안장
...백선엽 장군 빈소에 조화 보냈던 문재인 대통령

 

 

 

 

 

 

 

 

 

 

 

 

 

 

 

 

 

 

 

 

 

 

 

 

 

 

 

 

 

 

 

 

 

 

 

 

 

 

청산되지 않는 과거, 대학의 친일 부역

동상, 기념관, 학술상, 기념상 등 친일인사 기념사업 수두룩

 

대학가 친일동상 · 기념관 · 장학금 현황

- 감리교신학대: 정춘수

- 경북대 : 사범대 건물 내 박정희 안면 부조


- 고려대 : 김성수(호 인촌) 동상

- 단국대 : 홍난파(호 난파) 흉상, 난파 기념 음악관

- 덕성여대 : 송금선(호 남해) 남해 장학금

- 동덕여대 : 조동식(호 춘강) 춘강학술정보관(도서관). 춘강장학금 
- 동덕여대 설립자 조동식 동상 친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4-16권 조동식 편은 그의 친일반민족행위를 이렇게 요약한다.
"1942년 3월 동덕고등여학교 교장으로서 <매일신보>에 징병제도의 실시에 부응하여 조선의 여성들에게 군국의 어머니가 될 것을 역설하는 기고문을 발표하는 등 전쟁 협력을 위한 여성의 의무를 강조하고 여학생 교육을 주장함. 또한 내선일체와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하는 총후생활을 주장하는 기고문을 <매일신보> 등의 매체에 지속적으로 발표함."

- 동덕여대 설립자 조동식 동상인지 알고 테러한 동상은 조용각...
... 동덕여대 친일은 설립자 춘강 조동식 호딴 춘강학술정보도서관, 춘강장학금.
사리분별 못하는 동덕폭도들이 테러한 동상은 조용각.
조용각 이 사람은 설립자도 친일파도 아니다.
해당 인물은 율동 조용각 박사(1923-1999)라는 인물로, 동덕여대 설립자인 춘강 조동식의 친형이 슬하에 아이가 없어 양자로 들인 인물로, 동덕여대 설립자의 수양아들로, 동덕여대의 전 이사장이었음. 1976년, 동덕여대, 동덕여고 등으로 구성된 동덕여학단의 이사장으로 취임한 뒤 동덕여대를 종합대학 등으로 승격시키는 등 교세 확장에 크게 기여하였음. 재단 소속 여자중학교도 설립함. 평생을 여성의 초등부터 고등교육까지의 보장과 발전에 기여하여, 1982년 교육공로포상을 수여받음. 동덕여대 재학생 입장에서는 학교의 근간이 되고, 기반을 다진 훌륭한 교육자.

동덕 폭도들아 '동식이 굿다이노', '친일파 OUT'이라는 쪽지 붙이고, 페인트 쏟아붓고, 망치로 뚜드려팬 동상은 춘강 조동식 동상이 아니라 조용각 동상. 친일매국노 혜택으로 누리는 것은 니들이 사용하는 춘강 조동식 호딴 춘강학술정보도서관, 그리고 꾸역꾸역 받아쳐먹은 춘강장학금. 

동의대: 김임식 동상, 기념관- 상명대 : 배상명(호 계당)

 서울천안 흉상, 계당 기념관, 계당 장학금

- 숭실대 : 안익태 기념관,  안익태 흉상

- 서울대 : 장발 동상 (미대 앞) / 현제명 동상 (음대 앞)

- 서울여대 : 고황경(호 바롬) 바롬 교육관, 바롬 장학금, 바롬인성교육, 바롬하우스

- 서울예대 : 유치진(호 동랑) 반신상, 동랑 청소년 연극제

- 성균관대 : 

600주년 기념관 (을사오적 이완용과 박제순 그리고 윤덕영, 김윤식, 정만조, 박상준, 이경식 등 일본 식민지배 정당화에 앞장선 친일파들 성균관대 총장 명패)

- 성신여대 : 이숙종(호 운정) 이숙종 동상, 운정그린캠퍼스, 운정관, 운정장학금

- 연세대 : 백낙준(호 용재) 동상, 용재관, 용재상, 용재석좌교수 / 유억겸 기념관 

- 이화여대 : 김활란 동상

- 인덕대 : 박인덕 전신상 

- 전북대 : 

'덕진 공원비' 친일파 박기순의 공적을 기린 비석- 중앙대 : 

임영신(호 승당) 영신관(단과대), 임영신 동상(좌상), 영신기념관(음대, 안성), 승당 임영신 장학금

- 추계예술대 : 황신덕 학교 입구 쪽 전신상, 황신덕 장학금

- 한국외국어대 : 김흥배 동상 (글로벌캠퍼스)

 

친일 업적으로 일본한테 훈장 받은 대학총장

- 김두헌 숙명여대 총장

- 김성수 고려대 설립자

- 고황경 서울여대 학장

- 곽종권 건국대 총장

- 권상로 동국대 총장

- 박인덕 인덕대 설립자

- 박일경 명지대 총장

- 배상명 상명대 설립자

- 백낙준 연세대 총장

- 서은숙 이화여대 이사장

- 송금선 덕성여대 이사장

- 신봉조 상명대 이사장

- 이숙종 성신여대 이사장

- 이항녕 홍익대 총장

- 조기홍 성신여대 총장

- 황신덕 추계학원 이사장

.... TMI . 자세하고 구체적인 친일 매국 행위는 검색 해보시길.

 

청산되지 않는 과거, 대학의 친일 부역 

대표적인 것이 대학 사회다. 해방 전후에 설립된 대부분의 대학에 친일 인사들이 자리를 잡거나, 종래의 대학 운영권을 유지했다.  예컨대 해방후 서울대 초대 총장을 역임한 이춘호 같은 사람이 대표적이다. 그는 기독교 내선일체와 황민화에 앞장섰던 대표적인 기독교인이다. 이 밖에도 고려대학 총장을 역임한 유진오, 연세대학의 백낙준, 이화여대의 김활란은 말할 것도 없고, 성신여대의 이숙종, 상명여대의 배상명, 서울여대의 고황경, 중앙대학의 임영신 등 이들 대학 설립자나 총장, 이사장을 지낸 이들은 조선임전보국단등에 가입한 친일 대부들이었다. 덕성여대의 송금선도 마찬가지로 1급 친일 부역자였다. 

연희전문학교 (현 연세대학교)나 이화여자 전문학교(전 이화학당, 현 이화여자대학교)는 총장인 윤치호와 김활란이 친일 행위로 인해 일제에 의한 학교규제가 비교적 느슨했던 편이었다. 고려대, 동아일보 설립자 김성수는 전국 일간지에 내선일체 찬양글, 학도병 권유, 징병, 학병을 찬양하며 선전·선동하는 글을 기고하는 등 친일 반민족 행위가 인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등록되어 건국훈장이 박탈 되었다. 

 

서울대 (경성제국대학) 출신과 서울대 교수를 역임했던 친일인물 12명의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을사오적 이완용과 박제순 그리고 윤덕영, 김윤식, 정만조, 박상준, 이경식 등 일본 식민지배 정당화에 앞장선 친일파들이 성균관대 총장을 지내기도 했다. 성균관대 600주년 기념관에 총장 명패에서 확인할수 있다. 

친일문제는 해당 대학이 친일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러나 명색이 교육기관인 이상 그래도 지켜야 할 최소한의 금도는 있다. 친일 행위가 다대한 설립자를 온통 미화하는 위인전을 제작해 설립자의 중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읽히고 독후감을 쓰게 하는 것은 적어도 역사에 대한 범죄행위이다.

대학의 홈페이지에 "인간을 존중히 여기고 겨레와 민족에 봉사하는 것을 일생의 과업으로 몸소 실천하셨을 뿐만 아니라, 민족교육의 이념을 설정하시고 제도의 기초를 놓아 새 나라를 세우신 민족의 선각자이고 겨레의 스승" 이라고 버젓하게 올리는 것은 차마 교육의 양심으로 못할 짓이다. 이런 작태가 세계의 유수 대학과 어깨를 겨눈다고 자부하는 한국 대학교의 실상이다. 마지막 지성의 보루여야 할 대학사회마저 우리 사회의 친일 잔재에 대한 대학들의 철저한 반성과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기도 하다

 

부끄러움이자 안위만을 탐닉해온 대학의 부끄러운 모습이다. 변화되지 못하고 사는 그 대학의 모습을 돌이켜보며, 창피함과 부끄러움을 느껴보는 하루가 됐으면 합니다. 다른 대학과 달리 잘못된 부분에 지적을 하는데 질척거리면서 변명 아닌 변명만 주구장창 늘어놓고 있을뿐이다. 결국 욕심을 내려놓아야 진정한 대학의 위치를 찾게 될것이다.

 

마지막 지성의 보루여야 할 대학사회마저 우리 사회의 친일 잔재에 대한 대학들의 철저한 반성과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기도 하다.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코와 귀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 유관순 열사의 마지막 유언

 

친일반민족행위자 지키기에 앞장서는 대학 총장들

2009년 12월 28일 이화여자대학교·고려대학교·서울여자대학교·상명대학교·성신여자대학교·연세대학교 등 6개 대학 총장들은 교육과학기술부 장관 앞으로 매우 이례적인 내용을 담은 청원서를 연명으로 보냈다. 


이들 6개 대학 총장은 2005년 특별법에 의해 만들어진 국가기구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국내 주요 사립대학 설립과 발전에 지대한 기여를 한 주요 인사들 대부분”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해 “민족교육에 대한 공헌의 유무와 관계없이 친일행위자로 매도”한 것으로 강력하게 반발했다.
김활란(전 이화여대 총장), 김성수 고려대학교 설립자(정확하게 말하자면 원 설립자는 아니다), 유진오(전 고려대 총장), 고황경(서울여자대학 설립자), 배상명(상명대학 설립자), 이숙종(성신여대 설립자), 백낙준(전 연세대학교 총장) 등 각 사립대학교 설립자나 총장급을 역임한 인사들을 말하는 것이다. 6개 대학 총장들은 반민진상위가 이들에 대해 “일괄적 잣대로 무리하게 재단하고 폄하하여, 한국사회 발전에 미친 공헌에 마저 부정적 판정”을 매기고 있으며, “일제하의 혼란 속에서 학교를 지켜온 이들의 역할을 폄하함으로써 세계적으로 유수한 교육기관으로 성장하고 있는” 해당 대학의 앞날에 “매우 부정적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는 판단 하에, 강력한 이의를 제기하며 조사 결과에 대한 조속한 시정을 청원”했다.
김활란·김성수·유진오·고황경·배상명·이숙종·백낙준 등은 <친일인명사전>에 당연히 수록되었을 뿐 아니라 <친일인명사전>보다 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한 반민진상위원회에 의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될 만큼 친일행위가 심각한 인물들이다. 

이 청원서는 한국 대학 최고책임자들이 친일문제에 대한 어떻게 인식하고 있으며, 그들의 교육철학이 어떠한 수준에 머물러 있는 지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다.

 

친일문제는 해당 대학이 친일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러나 명색이 교육기관인 이상 그래도 지켜야 할 최소한의 금도는 있다. 친일 행위가 다대한 설립자를 온통 미화하는 위인전을 제작해 설립자의 중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읽히고 독후감을 쓰게 하는 것은 적어도 역사에 대한 범죄행위이다. 

 

대학의 홈페이지에 "인간을 존중히 여기고 겨레와 민족에 봉사하는 것을 일생의 과업으로 몸소 실천하셨을 뿐만 아니라, 민족교육의 이념을 설정하시고 제도의 기초를 놓아 새 나라를 세우신 민족의 선각자이고 겨레의 스승" 이라고 버젓하게 올리는 것은 차마 교육의 양심으로 못할 짓이다. 이런 작태가 세계의 유수 대학과 어깨를 겨눈다고 자부하는 한국 대학교의 실상이다.

 

청산되지 않는 과거, 대학의 친일 부역 
마지막 지성의 보루여야 할 대학사회마저 우리 사회의 친일 잔재에 대한 대학들의 철저한 반성과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기도 하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
- 대한민국 헌법 전문(前文)

삼일절은 고종황제의 장례식으로 발생한 것입니다. 고종황제가 상해임시정부 망명이 시작하던 중에 갑자기 서거한 사건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이 임시정부로 제대로 연결되기 위해서는 헌법전문에 따라 삼일절은 특별한 날입니다. 고종은 입헌군주제를 원해서 독립협회가 해산되었습니다. 그리고 어용학회가 생겼으나, 동학혁명의 기틀로 신민회 비밀조직은 민주 공화정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이 신민회가 상해임시정부가 된 것입니다. 고종황제가 왕족이 아닌 일반시민에 의한 정치체제를 선택한 것이지요. 

삼일절은 1919년 3월 1일, 한민족이 일제의 식민통치에 항거하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한국의 독립 의사를 세계 만방에 알린 날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3.1일 운동은 유관순 열사를 비롯하여, 민족대표 33명, 그리고 200만 여명의 국민들이 참여하여 만세운동을 펼친 독립운동입니다. 대내외적으로 우리 민족의 독립정신을 선명히 드러내었고, 우리 근대민족주의 운동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코와 귀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 유관순 열사의 마지막 유언

대한민국 국호가 사용된 것은 임시정부가 생겨난 1919년 4월 11일 입니다. 상해에 모였던 스물아홉 분의 각 지역을 대표하는 분들이 모여서 국호를 뭘로 짓겠느냐 했을 때 대한제국의 제 자를 제국시대는 이제 끝났다. 이제 민주공화정이 시작된다. 민주공화정이라는 뜻에서 민자를 넣어서 대한민국입니다.

대한민국정부 수립 된 이듬해인 1949년 10 월 1일 국경일에 관한 법이 제정, 공포되면서 3월 1일은 '삼일절'이라는 명칭으로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의 국경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제와 친일에 의해서 진정한 민주 공화정은 아직도 독립을 못하듯 그 친일 후예들로 인해서 완전한 자립이 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는 사형 선고를 6000건 이상 내렸는데 이중에서 700건 넘게 실제 집행했습니다. 강제노동과 징역형을 3만 5000건, 부역죄도 4만 6000건 선고했습니다.

 

한국 친일파 - 사형 0명, 구형 41건 모두 무죄, 병보석으로 풀려남. 망할 대한민국... 이런 이유로 대학들이 친일파 총장, 동문 기념관 짓고, 동상 세우고, 이름 호따 장학금 주고 해대는 건가.. 사법부 적페청산은 이런거나 뜯어고쳐라..ㅡㅡ 

 

* 당연한 말이지만 학교 ≠ 학생. 그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죄가 없고 오히려 설립자의 친일행각을 밝히려고 노력하는 학생들도 많아. 이런 학생들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
 
* 학교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는(기준은 학교 홈페이지에 적시된 설립자) 설립자에 한해서만 적었어. 예를 들면 경성제국대학의 교수와 학생들이 서울대로 통합됐기 때문에 경성제대를 서울대의 전신으로 보기도 하지만, 서울대에서 인정하는 전신은 1895년의 법관양성소에서 기원해서 1946년 국립 서울대학교로 개교한걸 시작으로 보기 때문에 서울대는 넣지 않았어.
 
* 학교에 중요한 공헌을 한 인물이고, 현재 학교에 그 흔적이 남아있는 경우라도 공식적인 설립자가 아닌 경우에는 적지 않았어. 예를 들어 고려대의 김성수(보성전문학교 인수)나 이화여대의 김활란(초대 총장)처럼 학교에 중대한 역할을 하고 학교에서 기리고 있는 경우라도 설립자가 아닌 경우에는 넣지 않았어.
 
* 설립자의 친일반민족행위자 여부는 친일인명사전 선정이나 광복 이후 반민특위 조사 대상자 등 명백하고 명시적으로 친일파라고 볼 근거가 있는 경우에만 넣었어. 즉 친일성향단체에 이름을 올렸거나하는 식으로 친일적성향이 의심되지만 명백한 근거가 있지 않은 경우에는 넣지 않았어.
 
* 여기까지 읽으면 알겠지만 진짜 웬만하면 다 뺐기 때문에 생각보다 몇명 없을거야. 그런데 여기에 들어있을 정도면 정말 친일파고 학교에서 관계성을 강조하고 있는 인물이란 소리ㅎㅎ...
 
* 가나다순이고 학교의 설립이 광복 이전인 경우와 광복 이후인 경우를 구분했어.
http://cafe.daum.net/ok1221/9Zdf/1451566?q=%EB%8C%80%ED%95%99+%EC%B9%9C%EC%9D%BC&re=1
 
2019년 제100주년 3.1절. 태극기를 답시다.

청산되지 않는 과거, 대학의 친일 부역
동상, 기념관, 학술상, 기념상 등 친일인사 기념사업 수두룩
대학가 친일동상 · 기념관 · 장학금 현황
- 경북대 : 사범대 건물 내 박정희 안면 부조
- 고려대 : 김성수(호 인촌) 동상, 인촌기념관
- 단국대 : 홍난파(호 난파) 흉상, 난파 기념 음악관
- 덕성여대 : 송금선(호 남해) 남해 장학금
- 동덕여대 : 조동식(호 춘강) 춘강학술정보관(도서관). 춘강장학금 
- 동의대: 김임식 동상, 기념관- 상명대 : 배상명(호 계당)
 서울천안 흉상, 계당 기념관, 계당 장학금
- 숭실대 : 안익태 기념관,  안익태 흉상
- 서울대 : 장발 동상 (미대 앞) / 현제명 동상 (음대 앞)
- 서울여대 : 고황경(호 바롬) 바롬 교육관, 바롬 장학금, 바롬인성교육, 바롬하우스
- 서울예대 : 유치진(호 동랑) 반신상, 동랑 청소년 연극제
- 성균관대 : 600주년 기념관 (을사오적 이완용과 박제순 그리고 윤덕영, 김윤식, 정만조, 박상준, 이경식 등 일본 식민지배 정당화에 앞장선 친일파들 성균관대 총장 명패)
- 성신여대 : 이숙종(호 운정) 이숙종 동상, 운정그린캠퍼스, 운정관, 운정장학금
- 연세대 : 백낙준(호 용재) 동상, 용재관, 용재상, 용재석좌교수 / 유억겸 기념관
- 이화여대 : 김활란 동상
- 인덕대 : 박인덕 전신상 
- 전북대 : '덕진 공원비' 친일파 박기순의 공적을 기린 비석
- 중앙대 : 임영신(호 승당) 영신관(단과대), 임영신 동상(좌상), 영신기념관(음대, 안성), 승당 임영신 장학금
- 추계예술대 : 황신덕 학교 입구 쪽 전신상, 황신덕 장학금
- 한국외국어대 : 김흥배 동상 (글로벌캠퍼스)

 

친일 업적으로 일본한테 훈장 받은 대학총장

- 김두헌 숙명여대 총장
- 김성수 고려대 설립자
- 고황경 서울여대 학장
- 곽종권 건국대 총장
- 권상로 동국대 총장
- 박인덕 인덕대 설립자
- 박일경 명지대 총장
- 배상명 상명대 설립자
- 백낙준 연세대 총장
- 서은숙 이화여대 이사장
- 송금선 덕성여대 이사장
- 신봉조 상명대 이사장
- 이숙종 성신여대 이사장
- 이항녕 홍익대 총장
- 조기홍 성신여대 총장
- 황신덕 추계학원 이사장
.... TMI . 자세하고 구체적인 친일 매국 행위는 검색 해보시길.
 
청산되지 않는 과거, 대학의 친일 부역 
대표적인 것이 대학 사회다. 해방 전후에 설립된 대부분의 대학에 친일 인사들이 자리를 잡거나, 종래의 대학 운영권을 유지했다. 예컨대 해방후 서울대 초대 총장을 역임한 이춘호 같은 사람이 대표적이다. 

그는 기독교 내선일체와 황민화에 앞장섰던 대표적인 기독교인이다. 이 밖에도 고려대학 총장을 역임한 유진오, 연세대학의 백낙준, 이화여대의 김활란은 말할 것도 없고, 성신여대의 이숙종, 상명여대의 배상명, 서울여대의 고황경, 중앙대학의 임영신 등 이들 대학 설립자나 총장, 이사장을 지낸 이들은 조선임전보국단등에 가입한 친일 대부들이었다. 덕성여대의 송금선도 마찬가지로 1급 친일 부역자였다.  

▶기념상 (시상명칭 / 시상기관 / 제정년도 / 시상분야)- 동인문학상(김동인) / 조선일보 / 1955 / 소설- 노산문학상(이은상) / 노산문학회 / 1976 / 시조, 국학연구- 공초문학상(오상순) / 서울신문사 / 1993 /시- 월탄문학상(박종화) / 동상운영위원회 / 1966 / 시- 육당시조문학상(최남선) / 동상운영위원회 / 1985 / 시조- 소천비평문학상(이헌구) / 동상운영위원회 / 1989 / 평론- 팔봉비평문학상(김기진) / 한국일보사 / 1990 / 평론- 조연현문학상(조연현) / 한국문인협회 / 1982 / 종합- 이주홍아동문학상(이주홍) / 동상운영위원회 / 1981 / 아동문학- 난파음악상(홍난파) / 난파기념사업회 / 1968 / 음악- 동랑연극상(유치진) / 한국예술연구원 / 1977 / 연극- 미당문학상 / 중앙일보사 / 2001 / 시- 김활란 상 / 한국여성단체협의회 / 1999 / 여성운동
▶학술상 (시상명칭 / 시상기관 / 제정년도 / 시상분야)- 용재상(백낙준) / 용재기념사업회 / 1994 / 학술- 두계학술상(이병도) / 진단학회 / 1980 / 학술- 하성학술상(이선근) / 하성학술상위원회 / 1985 / 학술
▶기타 (시상명칭 / 시상기관 / 제정년도 / 시상분야)- 인촌상(김성수) / 인촌기념회·동아일보사 / 1987 / 교육,산업기술,언론출판,공공봉사,문학, 학술- 5·16 민족상(박정희) / (재)5·16 민족상 / 1966 / 학술, 교육, 사회, 산업, 안전보장 부문
▶그 외 기념관- 운보 미술관(김기창) / 충북 청원군 내수읍 형동리- 청마 문학관(유치환) / 경남 통영시 정량동 863-1번지 - 조두남 기념관 / 마산시 신포동 구항 근린공원 내(선구자 작곡가)

조선의 젊은이들을 일제를 위한 학병에 지원하라 하고, 강제 징용과 징병을 찬양하고, 여성들을 정신대와 위안부, 성노예로 전쟁터에 가라했던 교장과 여성들의 동상과 기념관을 두고 우리는 교육을 말할 수 있는가? 이런 사람의 동상을 학교에 세우고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수 있단 말인가?
 
.....................
1895년 7월 2일 고종 칙령 제 136호로 성균관에 3년제 경학과가 설치되었고, 역사학, 지리학, 수학의 강좌가 개설. 일제강점기 때 성균관은 경학원, 명륜전문학교 등으로 격하되었고 1943년에는 폐교당했다. 이때는 국립.. 김창숙이 주도하에 1946년 기존 성균관 바로 옆자리에 성균관 주변 땅을 사서 개교. 1946년 9월 25일 문교부에 의해 성균관대학이 정식으로 인가. 1895년은 국립. 1946년은 사립.. 
[국립]-성균관, 경학과(대학교육), 경학원, 명륜전문학교. 1943년에는 폐교. [사립]-김창숙이 주도하에 1946년 기존 성균관 바로 옆자리에 성균관 주변 땅을 사서 개교.

김성수(金性洙, 인촌)
중앙학교와 보성전문학교(지금의 고려대학교)를 인수 운영했고, 경성방직회사를 창립했으며, 〈동아일보〉를 창간했다. 1919년 10월 경성방직을 설립, 1920년 4월 동아일보 창립. 1946년 8월 보성전문학교 기초로 고려대학교를 창립. 
-1943년 2월 26일 '의용봉공의 추(秋)'라는 제목으로 경성일보 3면의 등재 요지 : '군교(軍敎) 일치의 대정신으로써 국가 주요의 촌(村)에 시(是)할 충량유의의 황국신민의 연성에 매진하여야 할 것이다' -1943년 11월 7일자 매일신보에 "학도여 성전에 나서라. 대의에 죽을 때, 황민(皇民)됨의 책무는 크다"라는 학병권유 논설을 게재 -1943년 8월 5일 징병제를 찬양하는 장문의 논설을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문약(文弱)의 기질을 버리고 상무(尙武)의 정신을 찬양하라"는 논설을 발표 -1943년 11월 8일 '학도 출전 장행의 밤'이라는 행사를 개최하여 "반도 청년에게 순국의 길이 열렸는데도 불구하고 왜 학도 전원이 용감하게 지원하지 않는가"라는 요지의 '격려사'를 행하여 학병으로 나갈 것을 요구하였음 -1943년 11월 16일에는 학부모에게 전보를 발송하여 학병에 나갈 것을 권유하고 호별 방문을 행하여 강요하기도 하였음 -1943년 11월 26일에는 경성일보에 "황국신민의 연성에 매진해야 한다"는 요지의 담화를 발표 -1944년 1월 22일 "징병이 닥쳐온다"라는 담화를 발표하여 닥쳐오는 징병에도 열심히 참여해야 함을 강조 
1937년 보성전문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한 후 7월 30일과 8월 2일에 경성방송국 라디오를 통해 중일전쟁의 정당함을 선전하는 시국강좌를 했고, 8월 중 경성군사후원연맹에 국방헌금 1,000원을 헌납했다. 그리고, 9월 전조선시국강연대에 참가 강원도 일대에 시국강연에 나섰으며, 1938년 7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에 참여, 이사를 맡는 등 친일 조직에 가담했다.

조선 청년들을 대상으로 징병제가 실시되자 1943년 8월 5일자 〈매일신보〉에 '문약의 고질을 버리고 상무 기풍을 조장하라'는 징병격려문을 기고했고, 11월 7일자 〈매일신보〉에 다시 '대의에 죽을 때 황민됨의 책무는 크다'는 글을 실어 조선 학생들이 일본군에 학병으로 지원할 것을 주장했다. 이후에도 〈경성일보〉, 〈매일신보〉를 통해 학병 미지원자의 원칙적 징병을 주장하고, 영광스럽게 입대하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언론계 친일파로 수록되었다. 

고려대에는 김성수의 동상 뿐 아니라 그의 호를 딴 ‘인촌기념관’을 두고 있으며, 같은 재단의 중앙고등학교에도 김성수의 동상과 인촌기념도서관이 있다.


중앙대학교 설립자 임영신
1941년에 조직된 친일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에 
중앙보육학교 대표로 참여했다.
1942년에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가 조직되자 
김활란·박순천 등과 함께 지도위원을 맡았다.

1941년 12월 13일 “우리들은 임전 체제하에서 일체의 사심을 버리고 과거에 구애받지 않고 개개의 입장에 구애없이 2천 4백만 반도민 모두 일치결속하여 성전 완수로써 황국의 흥융을 기하며 성은에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고자 할 것을 맹세한다”는 선서와 함께 발족한 조선임전보국단에 중앙보육학교의 대표로 참여하였다.
조선임전보국단은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거쳐 
‘대일본부인회 조선본부’로 통합.
20세 미만의 미혼자를 제외한 전 여성으로 조직하여 “고도 국방국가 체제에 즉응하기 위하여, 황국 전통의 부도에 즉해서 수신제가 봉공의 실을 거둔다”는 목적 아래

ⓛ 국제 관념의 함양, 부덕 수련 
② 내선일체 구현③ 국방사상의 보급 철저④ 가정 생활의 정비.쇄신 및 비상시의 준비 확립에 관한 사항⑤ 제2세 국민 육성과 가정교육 진흥⑥ 군인 원호⑦ 국방상 필요한 훈련⑧ 직분봉공 인보협동에 관한 사항
⑨ 저축 장려 등의 사업을 추진하였다.

1942년 2월 1일에는 저녁 7시 30분의 라디오 방송을 통해 “가정생활에도 결전 체제를 바란다”는 제하의 방송문을 발표하기도 했던 임영신은 또 다른 친일단체였던 조선보육연맹에 독고선, 차사백 등과 함께 주도적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1945년 10월 중앙여자전문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이 되었으며, 1946년 9월 중앙여자대학을 설립하여 학장에 취임하였다. 1948년 9월 중앙대학으로의 개편과 학장 취임, 그리고 1953년 2월 중앙대학교 총장을 지냈다.

중앙대 임영신은 1959년 지금의 중앙도서관의 명칭을 "우남기념 중앙도서관" 명명하여 개관했다. 

우남이란 바로 이승만의 아호였다. 임영신은 이승만을 그렇게 기리고 존경했다. 그 소신이 옳았다면 예나 지금이나 중앙도서관의 공식명칭은 우남기념 중앙도서관이여야한다. 만약 이승만이 쫓겨나지않았다면 우남기념도서관의 명칭에서 우남이란 글짜를 땔리가 없었을것이다. 하지만 이승만이 국민에 의해 쫓겨나자 임영신과 중앙대는 눈치슬슬보며 중앙도서관에서 우남이란 명칭을 지워버렸다. 이게 바로 임영신과 중앙대가 왜 치던 의와 참의 길일까?

임영신 동상은 그녀의 살아생전에 이미 교내에 만들어진 동상이였다.
 
마지막 지성의 보루여야 할 대학사회마저 우리 사회의 친일 잔재에 대한 대학들의 철저한 반성과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기도 하다. 
 

대한제국 시절 우남 이승만 박사

이승만은 일찌감치 개화사상을 받아들여 아펜젤러의 배재학당에 입학하였다. 

 

대한제국 시절 협성회 회보와 독립신문 주필, 교육계몽운동으로는 독립협회 활동 등을 하면서, 왕정 폐지와 공화국 수립을 도모하였다는 반역의 죄목으로 옥살이를 하였으며, 독립정신을 저술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한성 임시정부와 각지에서 수립된 임시정부의 수반을 거쳐 1919년 9월 11일부터 1925년 3월 23일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역임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 국무위원회 외교위원 등을 역임했다. 주로 미국에서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을 벌였다.

 

일제 강점기 중반에는 미국 및 스위스 등을 무대로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한편 일본내막기를 저술하는 등 일본의 미국 침략을 경고하였으며 태평양 전쟁 이후 미군 OSS와 임시정부 간의 연결을 주선하였다. 대한민국의 독립을 공약한 1943. 11. 27. 카이로 선언의 배경에는 이승만의 집요한 외교노력이 있었고 그 결실이었다.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미국 체신청에서 발행한 태극기 모양 우표 발행에 크게 기여했으며, 항일 단파 라디오 방송 연설 등에도 참여하였다. 1945년 해방 후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에 추대되었으나, 귀국 후 거절하였다.

 

우리나라의 국기 제정은 1882년(고종 19년) 5월 22일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 조인식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이승만 정부가 수립되면서 태극기의 제작법을 통일할 필요성이 커짐에 따라, 정부는 1949년 1월「국기시정위원회」를 구성하여 그 해 10월 15일에「국기제작법 고시」를 확정·발표하였다.

 

초등학교 의무교육 도입으로 문맹률을 획기적으로 낮춘 점. 국민 학교 의무 교육제도 실시. 전국 만 7세 아동의 95.3%가 초등학교에 입학. 전문적 인재 육성을 위해 한국외국어대학교, 인하대학교, 배재대학교 등 많은 대학교를 세움. 그 결과 문맹률은 22%로 떨어짐.

 

지주가 독식하고 있었던 서민은 소작농에 불과했던 한국의 토지개혁. 1950년 3월에 농지개혁법을 단행하여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있던 지주제를 혁파하고 농민들의 불만을 해소하는데 성공한다. 이 농민 불만 해소야말로 6.25전쟁 초반의 패전을 극복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원인

 

이승만은 재임기간 12년동안 미국으로부터 일본과 수교를 맺으라는 수 많은 협박과 회유가 있었지만, 일본과의 수교조건으로 대마도 반환,  식민지보상 36억불 청구 등 사실상 일본이 받아 들일 수 없는 요구를 함으로써 그는 끝끝내 일본과의 수교를 거부했다.

 

UTC+9'를 표준시로 삼은 건 1912년 1월부터인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나라는 해방 뒤인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이 일제 잔재 청산을 명분으로 동경 127도30분으로 바꿨다. 그러나 1961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 쿠데타 뒤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국제관례를 이유로 시간대를 돌이켰다. 실제 6·25 전쟁 직후 이승만 정부에선 30분 차이가 나는 표준시를 썼다. 동경 127도 30분 표준자오선에 따른 결정으로, 현재 북한의 것과 같다.

 

한국의 서울 및 수도권을 기준으로 볼 때 경도는 동경 `126도 5분~127도 5분` 사이에 위치하는데 중간값 127도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경도 1도당 4분 정도의 시차가 있으므로 토쿄 시간과는 약 32분의 차이가 있다. 그러다 1961년 박정희가 다시 동경 135도를 기준으로 삼는 법안을 만들어 오늘에까지 이르렀다. 왜 일본 식민 사상에 젖어 살아가고 있는건가? 말로는 친일청산 이라고 할뿐. 생활과 표준은 일본 기준에 맞춰 살고 있는것인가.

 

이승만 정부의 농지 개혁은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형태의 토지 개혁으로 이 과정에서 토지 가격은 폭락하고, 지주들에게 땅을 매입하고 나중에 토지의 값을 지불하겠다는 유가증권을 주었는데, 이 유가증권은 6.25 전쟁 등을 거쳐서 완전히 휴지조각이 되어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지주들의 몰락과 농민층 분해, 근대적 자본가의 성장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한편 6년 의무교육제 도입과 더불어 각 급 학교를 증설하는 것과 아울러, 일제의 식민지정책에 따라 제한되어 있던 고등교육 기회를 부활시켜 전 국민의 교육수준을 향상시켰다. 국민 학교 의무 교육제도를 실시하였고, 전쟁으로 잠깐 계획에 차질이 있었지만 1954년부터 본격적으로 재개하여 1959년에는 전국 만 7세 아동의 95.3%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문적 인재 육성을 위해 한국외국어대학교, 인하대학교, 배재대학교 등 많은 대학교를 세우는 데 투자했다. 그 결과 문맹률은 22%로 떨어졌고, 학교 수와 학생 수는 3~11배 이상으로 크게 늘었다. 특히 1956년부터 시행된 미네소타 계획은 서울대학교의 많은 교수들에게 미국 유학 기회를 주었다. 그들은 나중에  한국 과학기술계를 이끌 중심 세력으로 떠올랐다. 

1952년 1월 18일 독도를 포함한 '이승만 라인' 설치하였다. 1954년 1월18일 이승만은 독도 한국령 표지석을 건립 하었다. 1954년 8월10일 무인도 독도에 등대불이 켜졌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4년 8월10일 '깜짝 이벤트‘를 벌였다. 미리 독도에 등대를 세워놓고 미국 방문 일정에 맞춰 전세계를 향해 등대 점등식을 열었던 것이다. 일본과 미국이 깜짝 놀란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대한민국 국토의 동쪽 끝 땅임을 알리는 독도 등대불! 일본에 남의 땅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 등불이었다. 
 

대한민국이 출범하던 1948년에 문맹률은 80%에 이르렀다. 이승만은 1949년에 모든 어린이가 6년제 초등교육을 무상으로 받도록 하는 의무교육제를 도입했다. 결과 문맹자 수는 1959년에 와서 22.1%로 낮아졌다. 

 

‘한국의 MIT’를 목표로 '인하공과대학' 설립. 

 

이승만은 미국의 MIT를 모방한 최고수준의 공과대학을 세우려고 했다. 그것은 한국인들이 전통적으로  문과를 강조해오던 전통을 바꾸어 공업을 발전시켜 보려는 야심찬 의지에서 나온 것이었다. 
6 · 25 전쟁 중인 1952년에 하와이 교민들은 하와이 ‘한인기독학원’ 부지를 판 돈의 일부를 이승만에게 보내왔다. 그 학교는 독립운동 시기에 이승만이 세운 것이었다. 

학교 이름을 인하(仁荷)로 한 것은 1903년 최초의 하와이 이민을 떠난 인천과 그들이 정착해서 돈을 보낸 하와이에서 한 글자씩 고른 것이었다. 

 

국제관계 전문가를 양성하기 위해 '한국외국어대학' 설립

이승만 대통령은 해외로 진출할 국제관계 전문가를 양성하기 위해 

정부 보조로 외국어대학을 세울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정부의 자금 부족으로 실업가 김흥배에 의해

 한국외국어대학이 설립되었다. 

그 과정에서 이승만은 백두진 총리와 영어학자인 박술음 사회부장관을 통해 

행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도록 지시했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후 행적은 논란이 될만한 건 부정할수 없지만, 대한제국 시절의 행위는 이게 팩트이다. 이승만은 두개의 얼굴을 가진 야누스를 닮은 거인으로 비쳐지고 있다. 한민족의 독립과 번영의 기초를 다진 국부로 추앙 받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 지나친 친미, 종미주의 경향과 한번도의 통일을 저해하고 민주주의를 압살시킨 시대착오적 독재자로 매도당하고 있다.

 

이승만 동상은 지난 1987년 2월 당시 배재대 졸업 동문들이 기증해 세웠다. 많은 철거 논란이 있었지만 배재대학교 측은 대학총동창회, 총학생회와 함께 지난 2008년 6월 5일 우남관 앞에 다시 동상을 세웠다.

... 학교측에서 세운것도 아니고 배재대 졸업생 동문들이 세운 이승만 동상을 니들이 왈가불가 왜 시비거는 거냐고. 배재대 학생들끼리 훼손하고 철거하고 다시 세우고 하는건 다양한 의견을 가진 재학생들의 의견 개진 과정이니 이해 하겠는데.. 일부 시민단체등 왜 다른 집안의 사람들이 간섭질인거지. 남의 집에 걸려있는 초상화 걸어라 마라 지적질 해대는 모습이 한심해 보인다. 

 

이승만은 180표 대통령 당선.

[대선특집2] 1대 대통령-1948년 이승만 당선(2)  

https://www.youtube.com/watch?v=hmsoTco25S0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후임에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 대세론이 굳어지고 있다.

'망언 제조기' 스가의 말말말 
1. 안중근은 범죄자·테러리스트 
2. 강제 징용 문제는 1965년 이미 해결된 일 
3. 위안부 강제 동원 증거 없다 
4. 독도는 일본 땅, 동해? 일본해가 유일 호칭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뒤로 배재대학교, 배재중고등학교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서울 하월곡동 배재대학교 기공식 (1959년 11월)

배재대학교가 인서울 하지 못하게 된 이유

이승만 시절 서울 하월곡동에 의대까지 포함된 배재대 건축 기공식을 갖고 작업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승만 하야 사건으로 인해 배재대학교 서울 건립을 잠정으로 정지되게 된다. 지역적으로 1%에 불과한 서울에 대한민국 인구의 20%가 몰려있고 서울 경기에 한국 인구의 절반이 몰려있다. 서울지역 39곳과 경기·인천지역 27곳 등 총 66개 대학교가 있다. 많은 지방 대학들이 서울, 경기 지역에 캠퍼스를 지을려고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지역주민과 대학간 잡음이 엄청나다. 하지만 배재대학교는 인서울 대신 대전의 명품사학으로 태어나는 길을 선택했다.


박정희 정권 시절 강력한 수도권 팽창 억제정책이 시행되면서 서울지역에는 신규 대학의 설립은 물론 기존대학의 정원증가도 허가하지 않았다. 배재대학교는 서울에 대학 설립 논의가 꽤 오랫동안 오고 갔으나 시기를 놓쳐서 결국 인서울이 아닌 대전에 대학을 설립하게 되었다.

취업, 창업에 강한 대학 (feat 배재대학교)

배재대는 교육부의 '잘 가르치는 대학' 대학자율역량강화지원사업(ACE+), 대전 유일 사회맞춤형 산학협력선도대학(LINC+) 육성사업 학과중점형, 고용노동부의 IPP형 일학습병행제 및 듀얼공동훈련센터, 대학일자리본부(국내취업거점대학), 청해진대학 운영기관(해외취업거점대학)에 잇달아 선정돼 양질의 교육과 취·창업 인프라를 확충했다.

▲대학창조일자리센터 지원사업...25억

▲청년 해외취업지원 사업인 청해진대학사업...9억원

▲ ‘2016년도 IPP형 일학습병행제 사업’...50억원

▲대학자율역량강화사업(ACE+) 선정...60억원

▲사회맞춤형 산학협력 선도대학(LINK+)육성사업(학과 중점형) 선정... 65억원

▲배재대, 진단시약 개발사업 선정…150억원

▲ 2016 이노폴리스캠퍼스사업 수행대학... 16억원

▲ 국내에서 벗어나 해외취업 지원... 100여명 선발. 국고사업비와 대학 자체 운영비로 지원. 무료 특별 취업교육

▲현장실습 프로그램

1. 4학년 - 6개월 장기2 현장실습

2. 3학년 - 여름방학 동안 4주간 인턴십 프로그램

...학생들의 역량과 진로 설정을 돕기 위해 전공 및 계열별(단과대학)로 상담해주는 전문 컨설턴트 8명을 영입해 ‘개인 맞춤형 진로 및 취·창업 상담제도’를 운영

▲해외 교환학생 프로그램

▲친구들과 함께 떠나는 글로벌 배낭여행

▲세계 75개 국가에서 유학 온 730여명의 외국인 학생

▲방학중 무료 외국인 강사 3개국 외국어 강의

▲아름다운 캠퍼스 단과대 건축물

▲그린캠퍼스

▲배재대 대덕밸리캠퍼스 (산학연기관)

▲배재대 운영중인 슈퍼컴퓨터

▲서울 배재학당 배재대학교 학술지원센터

... 하도 많아 정리하느라 고생고생.

 

배재대가 정리가 힘든게 두개인데..

1. 장학금 종류.. 종류소개 글이 글자수 제한에 걸려 배재대 홈피 주소 올릴 정도.

2. 취업지원 관련 종류.. 이번이 여덟번째 업데이트인가.

 

 

배재대학부(Pai Chai College) → 배재고등학당 → 배재중학교 → 배재고등학교 → 배재대학교(Pai Chai University)

1885년 미국 감리회 소속 H.G.아펜젤러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배재학당

1885년 헨리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을 모체로 하여 1895년 배재대학부(Pai Chai College)를 설립하였다. 같은 해영문과 106명, 국한문과 60명, 신학과 6명의 입학으로 정규 대학과정이 시작되었다.

1. ‘배재’는 나라의 재목이 될 인물을 가르치라는 뜻이 담겨 있는 ‘배양영재(培養英材)’의 줄임말. 이 현판이 고종황제를 통해 한자로 쓰인 것이다. 아펜젤러는 ‘배재(培 pei, 材 cai)’의 발음을 그대로 영문으로 표기해 썼고, 결국 ‘Pai Chai College’가 탄생했다. 

아펜젤러는 ‘배재(培 pei, 材 cai)’의 발음을 그대로 영문으로 표기해 썼고, 결국 ‘Pai Chai College’가 탄생했다. 

2. 배재대 측은 2005년 대학 디자인 표준화작업인 UI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옛 명칭을 그대로 사용키로 했다.

 

배재는 배양영재(培養英材)의 줄임말로 ‘유용한 인재를 기르고 배우는 집’이란 뜻을 담고 있으며, 설립 당시부터 대학(PAI CHAI COLLEGE)으로 출발했다. 설립 초기부터 개방화된 전통을 이어받아 배재대는 40개 나라의 243개 대학 및 기관과 자매결연을 맺고 활발하게 교류활동을 전개하고 있으며, 현재 74개 나라에서 유학 온 726명의 외국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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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는 3%의 염분때문에 썩지않는다. 
이런 3%에 속하는 사람들 덕분에 희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