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상식

일본, 그리고 친일파한테 억압과 규제를 당한 대학

ㅋㅌㅌ 2019. 5. 6. 19:57

 

 

 

###1. 일본 억압과 규제

1885. 08. 03 .배재학당 (Pai Chai Academy培材學堂) 창립 (설립자 아펜젤러 H. G. Appenzeller) 

1895. 09. 01 .배재대학부 (Pai Chai College) (영문학과, 국한문학과, 신학과)

1925. 09. 17 조선총독부에 의해 배재학당 교명 폐지

 

 

일제 감정기 일제 감정기 당시 배재학당 출신 학생들이 독립운동을 너무 열심히 했기 때문에 총독부에서 배재학당을 강력히 규제하며 대학설립을 방해했다고 한다.

 

 

 

 


이승만은 24세 때인 1899년 1월부터 1904년 8월까지 만 5년 7개월을 한성감옥에서 보냈다. 고종황제를 폐위시키고 입헌군주제를 도입하려는 쿠데타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투옥됐다. 당초 사형이 예고됐으나 결국 종신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그가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은 감옥에서 사형을 예감하면서였다.

 

이승만은 배재학당 영어학부에서 영어를 전공했고, 은사 서재필을 통해 서양 문명을 접했다. 배재학당에서 1학기를 마친 후엔 ‘영어 조교’로 특채됐다. 영어를 가르치며 배운 셈이다. 그만큼 습득이 빨랐다. 배재학당 졸업식에서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영어 연설을 한 인물이기도 하다. 감옥에서도 영어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영한 사전’을 만들 정도였다. 러·일전쟁이 한창인 1904년 말, 민영환·한규설이 그를 밀사로 발탁, 미국에 보낸 배경에는 무엇보다 탁월한 영어 실력과 감옥에서 익힌 국제정치 지식이 있었다.

이승만의 독립운동은 외교를 중시하는 것이었다. 국제정치 전문가인 그의 독립외교 노선은 어떤 성과가 있었는가. 이 부분도 지금까지 저평가돼 왔다. 중국의 임시정부와 만주의 무장투쟁이 주로 평가 받았다. 의혈활동과 무장투쟁이 있었기에 외교노선도 빛을 발하는 것이겠지만, 외교가 없이 한국의 독립이 가능했을까. 요즘 새롭게 주목 받는 부분이 이 대목이다.


특히 1943년의 ‘카이로 선언’이 그러하다. 미국·영국·중국의 수뇌가 처음으로 한국의 독립을 공약했다. 카이로 선언에서 한국의 독립을 특별히 명시해 놓은 것은 그야말로 놀라운 일이다. 당시 일본의 식민지가 한 둘이 아닌데 왜 유독 한국만 명시했는가. 그동안 중국의 장제스(蔣介石) 총통이 주창해서 가능했던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최근 그렇지 않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올해 3월 출간된 『카이로 선언:대한민국 독립의 문』의 저자 정일화 박사는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과 그의 특별보좌관 해리 홉킨스가 주창했다고 주장했다. 루스벨트의 심복이었던 홉킨스가 카이로 선언의 초안을 작성했고, 이를 루스벨트와 처칠이 약간의 수정을 한 후 완성됐다는 것이다.

유영익 교수는 “우리가 가만히 있는데 그들이 알아서 한국 독립 조항을 특별히 넣었을 리는 없다. 아직 뚜렷한 증거는 없는 상태다. 카이로 선언과 이승만의 독립외교의 관계를 밝히는 일이 앞으로의 연구 과제”라고 말했다.


1904년 말 이승만은 밀사로 미국을 방문한다. 한반도에선 러·일전쟁이 한창일 때였다. 러·일전쟁 이후 한반도의 독립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미국의 거중조정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당시 국제정세는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았다. 미국은 일본과 별도로 태프트-카스라 밀약을 준비하고 있었다. 일본의 ‘한국 보호국화’를 허용했다. 일본은 한국, 미국은 필리핀 차지하기로 합의한 1905년 6월 가쓰라-태프트 밀약
밀사 사행이 실패한 후 그는 귀국을 포기하고 유학을 택한다. 아버지의 유학 권유도 있었다. 그 역시 만일을 대비해 한국을 떠날 때 미국 선교사들이 써준 19통의 추천장을 가지고 갔다. 미국의 어느 대학이 좋은 지도 이미 알고 있었다. 조지워싱턴대를 3학년에 편입한 것은 ‘배재대학’ 2년 학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이후 하버드대 석사 1년, 프린스턴대 박사 2년 과정을 일사천리로 마쳤다. 프린스턴대에서 그가 주로 수강한 과목은 국제법·외교학·철학사 등이었다. 5년간 장학금으로 다녔다.

<독립정신>은 20대 청년 우남 이승만이 옥중에서 집필한 그의 대표 저서로서, 5천년 동안 지속되어온 우리나라 왕정의 역사를 민주 공화정으로 탈바꿈시키고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을 제시한 책이다. 대한제국 시절 협성회 회보와 독립신문 주필, 교육계몽운동으로는 독립협회 활동 등을 하면서, 왕정 폐지와 공화국 수립을 도모하였다는 반역의 죄목으로 옥살이를 하였으며, 독립정신을 저술하였다.

 

###5. 일본은 한국, 미국은 필리핀 차지하기로 합의한 '가쓰라-태프트 밀약'

가쓰라­태프트 밀약 (러․일전쟁 중 1905.7.29) 

미국의 필리핀에 대한 지배권과 일본 제국의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상호 승인.

 

루스벨트 대통령은 "1900년 이래 한국은 자치할 능력이 없으므로 미국은 한국에 대해 책임을 져서는 안되며,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여 한국인에게 불가능했던 법과 질서를 유지하고 능률있게 통치 한다면 만인을 위해 보다 좋은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피력하고 일본의 조선 지배를 승인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은 조선에 대해 을사조약을 강요했으며, 미국은 이를 적극 지지했다. 

 

 

 

 

 

 

지청천은 1906년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1908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교했다. 

지청천은 일본으로 갔고 1914년에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이때 일본행을 택한 각오가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 병과는 보병이었고 일본군 육군 장교로 근무하던 중에 동기 김경천과 함께 1919년에 남만주 삼원보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이 되었다.

 

 

지청천 장군은 배재학당 배재대학부와 한국무관학교를 거쳐 일본에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 근대적인 군사지식을 습득한 군사인재였다. 3.1운동 발발 후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신흥무관학교의 교장으로 취임, 수많은 독립군을 양성하는 데 힘썼으며 이후 일제의 독립군 말살 정책이 시행되었을 때에는 서로군정서를 지휘하며 일군과의 교전 최전선에서 활동하였다. 

 

 

일부러 시계바늘을 30분 늦춰 놓고 다녔다는 박동완

 

박동완(朴東完)

1885년 12월 27일 ~ 1941년 2월 23일)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 독립운동가

배재 정동교회 전도사

 

생애

배재학당(培材學堂)에서 수학한 뒤 감리교 제일교회의 전도사로 근무하는 한편, 기독교신보사 서기로 전도와 독립사상의 고취에 힘썼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인사동의 태화관에 손병희 등과 민족대표로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쳤다.

 

'무궁화골’을 뜻하는 근곡(槿谷) 박동완

- 비타협 민족운동의 외길을 걸어간 사랑과 정의와 인도의 전도자

 

살을 에이고 저미는듯하던 율렬(凓烈)하던 겨울바람도 이제는 부드럽고 온화한 봄바람이 불어온다. 

동칩(冬蟄)하였던 개구리 소리지르고 보금자리에 숨었던 종달새 노래부르며 중천에 높이 떠 펄펄 나른다. 

아침 군생만물이 다 기뻐하는 희망의 때가 돌아온다. 인생인들 슬픔에서 기쁨에, 고통에서 쾌락에, 눌림에서 자유에 기쁜 때가 이르지 아니할까 보냐.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었던 박동완(朴東完,1885-1941)이 자신이 주간으로 있던《신생명》(제20호, 1925. 2)에「권두어」로 실은 새 봄을 맞는 기원이다. 

 

박동완은 삼천리 금수강산 ‘무궁화골’을 뜻하는 근곡(槿谷)이란 아호처럼 누구보다 이 땅과 이 민족을 사랑했던 민족주의자였다. 또한 기독교의 민중적 표준과 조선적 교회를 만드는 데 골몰한 민중의 목자이기도 하였다. 일제의 억압 아래서 자유의 기쁜 때를 희망하며 독립운동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일본 표준시간에 맞춰 살지 않겠다며 자신의 시계바늘을 30분 늦춰 놓고 다녔다는 유명하 일화가 말해주듯, 그는 비타협 불굴의 자세로 민족구원의 외길을 걸어갔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1966년 현재의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하였다.


 


다른 사립학교인 연희전문학교 (현 연세대학교)나 이화여자 전문학교(전 이화학당, 현 이화여자대학교)는 총장인 윤치호와 김활란이 친일 행위로 인해 일제에 의한 학교규제가 비교적 느슨했던 편이었다. 고려대, 동아일보 설립자 김성수는 전국 일간지에 내선일체 찬양글, 학도병 권유, 징병, 학병을 찬양하며 선전·선동하는 글을 기고하는 등 친일 반민족 행위가 인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등록되어 건국훈장이 박탈 되었다.

 

청산되지 않는 과거, 대학의 친일 부역

동상, 기념관, 학술상, 기념상 등 친일인사 기념사업 수두룩

 

대학가 친일동상 · 기념관 · 장학금 현황

- 경북대 : 사범대 건물 내 박정희 안면 부조


- 고려대 : 김성수(호 인촌) 동상, 인촌기념관

- 단국대 : 홍난파(호 난파) 흉상, 난파 기념 음악관

- 덕성여대 : 송금선(호 남해) 남해 장학금

- 동덕여대 : 조동식(호 춘강) 춘강학술정보관(도서관). 춘강장학금 
- 동덕여대 설립자 조동식 동상 친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4-16권 조동식 편은 그의 친일반민족행위를 이렇게 요약한다.
"1942년 3월 동덕고등여학교 교장으로서 <매일신보>에 징병제도의 실시에 부응하여 조선의 여성들에게 군국의 어머니가 될 것을 역설하는 기고문을 발표하는 등 전쟁 협력을 위한 여성의 의무를 강조하고 여학생 교육을 주장함. 또한 내선일체와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하는 총후생활을 주장하는 기고문을 <매일신보> 등의 매체에 지속적으로 발표함."

- 동덕여대 설립자 조동식 동상인지 알고 테러한 동상은 조용각...
... 동덕여대 친일은 설립자 춘강 조동식 호딴 춘강학술정보도서관, 춘강장학금.
사리분별 못하는 동덕폭도들이 테러한 동상은 조용각.
조용각 이 사람은 설립자도 친일파도 아니다.
해당 인물은 율동 조용각 박사(1923-1999)라는 인물로, 동덕여대 설립자인 춘강 조동식의 친형이 슬하에 아이가 없어 양자로 들인 인물로, 동덕여대 설립자의 수양아들로, 동덕여대의 전 이사장이었음. 1976년, 동덕여대, 동덕여고 등으로 구성된 동덕여학단의 이사장으로 취임한 뒤 동덕여대를 종합대학 등으로 승격시키는 등 교세 확장에 크게 기여하였음. 재단 소속 여자중학교도 설립함. 평생을 여성의 초등부터 고등교육까지의 보장과 발전에 기여하여, 1982년 교육공로포상을 수여받음. 동덕여대 재학생 입장에서는 학교의 근간이 되고, 기반을 다진 훌륭한 교육자.

동덕 폭도들아 '동식이 굿다이노', '친일파 OUT'이라는 쪽지 붙이고, 페인트 쏟아붓고, 망치로 뚜드려팬 동상은 춘강 조동식 동상이 아니라 조용각 동상. 친일매국노 혜택으로 누리는 것은 니들이 사용하는 춘강 조동식 호딴 춘강학술정보도서관, 그리고 꾸역꾸역 받아쳐먹은 춘강장학금. 

 

동의대: 김임식 동상, 기념관- 상명대 : 배상명(호 계당)

 서울천안 흉상, 계당 기념관, 계당 장학금

- 숭실대 : 안익태 기념관, 안익태 흉상

- 서울대 : 장발 동상 (미대 앞) / 현제명 동상 (음대 앞)

 

- 서울여대 : 고황경(호 바롬) 바롬 교육관, 바롬 장학금, 바롬인성교육, 바롬하우스

 

- 서울예대 : 유치진(호 동랑) 반신상, 동랑 청소년 연극제

- 성균관대 : 

600주년 기념관 (을사오적 이완용과 박제순 그리고 윤덕영, 김윤식, 정만조, 박상준, 이경식 등 일본 식민지배 정당화에 앞장선 친일파들 성균관대 총장 명패)

- 성신여대 : 이숙종(호 운정) 이숙종 동상, 운정그린캠퍼스, 운정관, 운정장학금

- 연세대 : 백낙준(호 용재) 동상, 용재관, 용재상, 용재석좌교수 / 유억겸 기념관 

- 이화여대 : 김활란 동상

- 인덕대 : 박인덕 전신상 

- 전북대 : 

'덕진 공원비' 친일파 박기순의 공적을 기린 비석- 중앙대 : 

임영신(호 승당) 영신관(단과대), 임영신 동상(좌상), 영신기념관(음대, 안성), 승당 임영신 장학금

- 추계예술대 : 황신덕 학교 입구 쪽 전신상, 황신덕 장학금

- 한국외국어대 : 김흥배 동상 (글로벌캠퍼스)

 

친일 업적으로 일본한테 훈장 받은 대학총장

- 김두헌 숙명여대 총장

- 김성수 고려대 설립자

 

- 고황경 서울여대 학장

 

- 곽종권 건국대 총장

- 권상로 동국대 총장

- 박인덕 인덕대 설립자

- 박일경 명지대 총장


- 배상명 상명대 설립자

- 백낙준 연세대 총장

 

- 서은숙 이화여대 이사장

 

- 송금선 덕성여대 이사장


- 신봉조 상명대 이사장

- 이숙종 성신여대 이사장

- 이항녕 홍익대 총장

- 조기홍 성신여대 총장

- 황신덕 추계학원 이사장

.... TMI . 자세하고 구체적인 친일 매국 행위는 검색 해보시길.

 

청산되지 않는 과거, 대학의 친일 부역 

 

대표적인 것이 대학 사회다. 해방 전후에 설립된 대부분의 대학에 친일 인사들이 자리를 잡거나, 종래의 대학 운영권을 유지했다. 

 


예컨대 해방후 서울대 초대 총장을 역임한 이춘호 같은 사람이 대표적이다. 

그는 기독교 내선일체와 황민화에 앞장섰던 대표적인 기독교인이다. 이 밖에도 고려대학 총장을 역임한 유진오, 연세대학의 백낙준, 이화여대의 김활란은 말할 것도 없고, 성신여대의 이숙종, 상명여대의 배상명, 서울여대의 고황경, 중앙대학의 임영신 등 이들 대학 설립자나 총장, 이사장을 지낸 이들은 조선임전보국단등에 가입한 친일 대부들이었다. 덕성여대의 송금선도 마찬가지로 1급 친일 부역자였다. 

연희전문학교 (현 연세대학교)나 이화여자 전문학교(전 이화학당, 현 이화여자대학교)는 총장인 윤치호와 김활란이 친일 행위로 인해 일제에 의한 학교규제가 비교적 느슨했던 편이었다. 

고려대, 동아일보 설립자 김성수는 전국 일간지에 내선일체 찬양글, 학도병 권유, 징병, 학병을 찬양하며 선전·선동하는 글을 기고하는 등 친일 반민족 행위가 인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등록되어 건국훈장이 박탈 되었다. 

서울대 (경성제국대학) 출신과 서울대 교수를 역임했던 친일인물 12명의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을사오적 이완용과 박제순 그리고 윤덕영, 김윤식, 정만조, 박상준, 이경식 등 일본 식민지배 정당화에 앞장선 친일파들이 성균관대 총장을 지내기도 했다. 성균관대 600주년 기념관에 총장 명패에서 확인할수 있다.

동아일보 창립자이기도 한 김성수는 1938년에는 친일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이자 이사였고, 산하 비상시생활개선위원회 위원을 역임하면서 친일행위를 했다. 이후에도 흥아보국단 결성 준비위원 등으로 활동하면서 학병제·징병제를 찬양하는 글을 쓰거나 강연을 했다. 그러나 고려대에는 김성수의 동상 뿐 아니라 그의 호를 딴 ‘인촌기념관’을 두고 있으며, 같은 재단의 중앙고등학교에도 김성수의 동상과 인촌기념도서관이 있다.

 

 

 

1905년 7월. 가쓰라-태프트 밀약... 미국이 일본의 한반도 지배 인정.
1905년 8월. 제2차 영일 동맹... 영국이  일본의 한반도 지배 인정.
1905년 9월. 포츠머스 조약... 러일전쟁에서 지고 러시아가 한반도에서 손 떼겠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 체결.
이완용 | 황현필
https://www.youtube.com/watch?v=CGvjIyixEqE

 

 

 

친일문제는 해당 대학이 친일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러나 명색이 교육기관인 이상 그래도 지켜야 할 최소한의 금도는 있다. 친일 행위가 다대한 설립자를 온통 미화하는 위인전을 제작해 설립자의 중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읽히고 독후감을 쓰게 하는 것은 적어도 역사에 대한 범죄행위이다.

 

대학의 홈페이지에 "인간을 존중히 여기고 겨레와 민족에 봉사하는 것을 일생의 과업으로 몸소 실천하셨을 뿐만 아니라, 민족교육의 이념을 설정하시고 제도의 기초를 놓아 새 나라를 세우신 민족의 선각자이고 겨레의 스승" 이라고 버젓하게 올리는 것은 차마 교육의 양심으로 못할 짓이다. 이런 작태가 세계의 유수 대학과 어깨를 겨눈다고 자부하는 한국 대학교의 실상이다. 마지막 지성의 보루여야 할 대학사회마저 우리 사회의 친일 잔재에 대한 대학들의 철저한 반성과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기도 하다

 

부끄러움이자 안위만을 탐닉해온 대학의 부끄러운 모습이다. 변화되지 못하고 사는 그 대학의 모습을 돌이켜보며, 창피함과 부끄러움을 느껴보는 하루가 됐으면 합니다. 다른 대학과 달리 잘못된 부분에 지적을 하는데 질척거리면서 변명 아닌 변명만 주구장창 늘어놓고 있을뿐이다. 결국 욕심을 내려놓아야 진정한 대학의 위치를 찾게 될것이다.

 

마지막 지성의 보루여야 할 대학사회마저 우리 사회의 친일 잔재에 대한 대학들의 철저한 반성과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기도 하다. 

 

 

 

 

 

 

 

 

###2. 친일파 다까기 마사오 억압과 규제

1. 서울에 배재대학교 설립 방해

 

이승만 시절 서울 하월곡동에 의대까지 포함된 배재대 건축 기공식을 갖고 작업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승만 하야 사건으로 인해 배재대학교 서울 건립을 잠정으로 정지되게 된다. 지역적으로 1%에 불과한 서울에 대한민국 인구의 20%가 몰려있고 서울 경기에 한국 인구의 절반이 몰려있다. 서울지역 39곳과 경기·인천지역 27곳 등 총 66개 대학교가 있다. 많은 지방 대학들이 서울, 경기 지역에 캠퍼스를 지을려고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지역주민과 대학간 잡음이 엄청나다. 하지만 배재대학교는 인서울 대신 대전의 명품사학으로 태어나는 길을 선택했다.

 

박정희 정권 시절 강력한 수도권 팽창 억제정책이 시행되면서 서울지역에는 신규 대학의 설립은 물론 기존대학의 정원증가도 허가하지 않았다. 인서울 막차는 찬 한성대는 

한성여고 교사로 사용하고 있는 7층 건물이 개교당시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대학 건물로 사용했던 유일한 건물이었다. 오히려 그 시절은 지금의 한성대 부지에 한성여중, 한성여고가 있었다. 

배재대학교는 서울에 대학 설립 논의가 꽤 오랫동안 오고 갔으나 시기를 놓쳐서 결국 인서울이 아닌 대전에 대학을 설립하게 되었다.

 

 

 

 

배재대학교는 대전에 있다. 배재대학이 세워지게 된 것은 1956년 이승만 대통령께서 배재학당 개교기념식에 참석하시어 '배재대학을 세우라'라고 말씀하신데 따른 것이다. 처음에는 수유리 방면에 배재대학을 세우려 했으나 4.19와 5.16등의 변화 때문에 지지부진하였으며 결국 대전으로 터전을 확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현재 옛 배재학당이 있던 자리 옆의 부지를 배재재단이 매입하여 이곳에 배재대학교가 사용하는 큰 빌딩을 건축하였으니 배재빌딩이다.

 

 

 

 

 

 

 

 

1885. 08. 03 .배재학당 (Pai Chai Academy培材學堂) 창립 (설립자 아펜젤러 H. G. Appenzeller)

1886. 04 .01  초대학당장 아펜젤러 취임

1886. 06. 08  고종황제로부터 '배재학당' 현판 하사

1895. 09. 01 .배재대학부 (Pai Chai College) (영문학과, 국한문학과, 신학과)

1896. 04. 07 배재학당내에서 「독립신문」발간(서재필)

1896. 11. 30 배재협성회(학생회) 조직(지도 서재필)

1909년 4월 배재 고등학당으로 인가1916년 배재 고등 보통학교(5년제)를 설립하여 병설 운영

 

... 1895. 09. 01 .배재대학부 (Pai Chai College) (영문학과, 국한문학과, 신학과)... 배재고등학당이랑 배재대학부가 배재학당내 같이 존재.

1925. 09. 17  조선총독부에 의해 배재학당 교명 폐지

1937. 03. 03  배재중학교(5년)로 개칭

1951. 08. 21  배재중학교(3년) 및 배재고등학교(3년)로 개편

1955. 04. 26  대전보육학원 설립 (설립자 허길래, Clara Howard)

1992. 03. 13 .배재대학교 (Pai Chai University)

 

... College에서 University 되는데 97년의 시간이 필요

 

 

 

 

 

 

 

 

 

 

안중근 기록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이 이토히로부미를 처형 
1910년 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음 
1910년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사형당함

 

丈夫處世兮 其志大矣 (장부처세혜 기지대의)

장부가 세상에 처함이여 그 뜻이 크도다

時造英雄兮 英雄造時 (시조영웅혜 영웅조시)

때가 영웅을 만들고 영웅은 때를 만드는 도다

 

장부가 세상에 나가니 그 뜻이 크도다

때가 영웅을 만들고 영웅은 때를 만드는 도다

- 안중근 의사의 '장부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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