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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한국 42년간의 기록 책으로 나와

ㅋㅌㅌ 2019. 5. 11. 13:41





매티 윌콕스 노블(Mattie Wilcox Noble, 1872~1956) 여사

배재학당 최초 서양음악 여교사, 매티 노블의 삶


"학생들은 모두 교실바닥에 앉아 책을 펴고 몸을 앞뒤로 흔들며 박자에 맞춰, 큰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분홍색 저고리와 커다란 리본으로 발목을 묶는 흰색 바지를 입었다. 양말도 흰색이었고 나무로 만든 나막신은 문간에 벗어 놓았다. 그들 중 몇몇은 옷이 아주 더러웠다. 교사는 한 학생에게 배운 것을 반복하라고 시켰고 나머지 학생들은 공부를 멈추고 앉아 있었다."


"한국 여성문화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우리나라 최초로 배재학당(감리교)에서 새로운 서양음악을 가르친 교사가 바로 매티 윌콕스 노블 여사이다."


19세기 사람들은 남녀 할 것 없이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여성이 하는 일을 노동으로 보지 않고, 여성적인 천성의 자연스러운 표출로 봤다. 19세기 말에 등장한 가정경제학도 젊은 여성들로 하여금 가정에서의 책임을 맡도록 준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제 이런 현모양처의 이미지는 낡은 구습에 불과하다. 당시(19세기의 개화기 초) 힘 있고 개혁적인 여성으로서의 현모양처였지만, 아직도 그 시대(19세기)의 ‘현모양처’의 환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 이제는 ‘진정한 여성성’보다 개성존중, 인격체, 서로 간의 진정한 파트너십의 관계를 새롭게 만들어 가야 한다


현모양처, 진정한 여성성 등은 현재 남성들에게 영원한 로망으로 보일지 모른다. 100년 전 식민지시대에는 가능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절대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이어 그는 “1919년 5월 배재학생으로 민족독립운동을 했던 김귀순 선생에 대한 노블의 회고도 눈여겨 볼만하다”면서 “당시 일본의 잔인성이 그대로 기록돼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위대한 배재학생 김귀순이 두 달 만에 석방됐다. 그가 서대문 형무소로 보내기 전 2주 동안, 그는 종로경찰서에 있었다. 거기서 그는 밤낮으로 매일 네 번씩 다른 사람들과 꿇어 앉아 있었다. 그들은 허벅지와 종아리 사이에 긴 널빤지를 끼고 앉아 손은 한데 묶여 머리 위쪽으로 들려져 무엇인가에 매달린 채로 등에 매를 맞았다. 그는 피가 바지를 흠뻑 적실만큼 맞았다.” 


강연을 주최한 배재학당역사박물관 김종헌 관장(배재대 건축학부 교수)은 “배재학당이 우리나라의 서양음악의 원천이었다”면서 “노블 여사의 음악이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한편, 메티 윌콕스 노블 여사는 1892년 남편 윌리엄 아서 노블(한국명 : 노보을<魯普乙>) 선교사와 함께 내한했다. 딸 둘과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둘째와 셋째는 아기 때 병사해 평양에 묻혔고, 큰 딸 로츠 노블 아펜젤러는 감리교 선교사이며 배재학당을 설립한 헨리 G, 아펜젤러(1858~1902)의 장남 헨리 다지와 결혼해 한국에서 선교와 교육 사업을 이어갔다. 


1889년 11월 6일 서울 서대문구 정동 23번지에서 출생한 헨리 다지 아펜젤러(1889~1953)는 1952년 11월 배재학교 재단 이사장으로 활동하던 중 건강이 악화돼 귀국해 53년 12월 1일 64세 나이로 별세했다. 그가 ‘한국 땅에 묻어 달라’는 유언에 따라 유해가 54년 10월 18일 한국으로 와 양화진 묘역에 안장됐다. 


배재학당 최초 서양음악 여교사, 매티 노블의 삶

http://www.bjynews.com (풀뿌리 미디어)




노블일지 1892-1934 

-매티 윌콕스 노블


구한말에서 일제 강점기까지 42년간 이 땅에서 살다간 미국인 여선교사 매티 윌콕스 노블 여사는 매일매일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일지로 기록하였다. 

  

꽃다운 스물 살의 나이에 갓 결혼한 새신부가 코리아라는 머나먼 낯선 땅에 선교사로 부임하여, 복음이라고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들을 열성적으로 전도하고, 칠남매를 낳아 기르고(그중 둘은 아기 때 숨져 평양에 묻힌다), 병들고 가난한 이웃들을 돕고, 차별받는 여성과 어린이들을 가르치다가 환갑이 넘어 미국으로 돌아가 운명을 맞이하는 지난한 여정은 그 자체로 지난 세기 범상치 않은 한 여성의 삶을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우리가 《노블일지》를 주목하는 것은 단순한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는 그 역사적 기록으로서의 가치 때문이다. 


"오늘은 한국의 위대한 날이다. 한국인들의 기쁨이 얼마나 이어질 수 있을까? 오후 2시, 중학교를 비롯한 각급 학교들이 일본의 한국 지배에 항거하는 시위를 벌였고, 거리로 나가 양손을 위로 올리고 모자를 흔들며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행진을 하기 시작했다."(1919년 3월 1일)


한국에 대한 그의 첫인상은 이랬다. "제물포에 도착하니 긴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바닷가로 우리를 마중 나왔다. 한 한국인이 100㎏이 넘게 나가는 우리의 엄청나게 무거운 트렁크를 등에 지고 날랐다. 그들은 모든 것을 등에 져 나른다."(1892년 10월 21일)


'노블일지'에는 선교 활동에 관한 내용이 많지만 한국의 풍습과 사회상, 한국 근대사의 주요 사건들에 대한 생생한 목격담이 담겨 있다. "일본군의 한국 주둔이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있다. 벌써 여러 달 동안 매일매일 아무런 보상도 못 받고 거처를 잃는 가족들이 생겨나고 있고, 일본인들은 한국인들 앞에서 계속해서 거드럭거린다."(1906년 4월 30일)


3·1 만세운동과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 행위들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도시 전역에 기쁨의 외침 소리들이 울려 퍼졌다. 나는 긴 행렬 하나가 궁궐 담장의 모서리를 지나는 광경을 우리집 창문을 통해 볼 수 있었다."(1919년 3월 1일)


"어제 저녁 일요일, 서울 서부의 몇몇 동네와 종로에서 동대문에 이르는 서울 시가에서 수백 명의 사람들이 한국의 독립을 외치는 데모가 있었다. 많은 사람이 경찰과 헌병들에 의해 베임을 당했고, 몇몇은 죽임을 당했다."(1919년 3월 24일)


"요즘은 밤에 한국인이 거리를 걷기만 해도 경찰에게 매를 맞는다. (중략) 어젯밤 거리를 걷던 사람들 가운데 만세를 부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세 명이 살해됐으며 많은 사람들이 다쳤다."(1919년 3월 30일)


일지에는 예배당에 신자들을 모으고 총살한 뒤 불태운 '제암리 학살사건'(1919년 4월 15일), 29년 11월 3일 광주학생항일운동을 시작으로 이듬해 1월까지 이어진 만세시위, 덕수궁 화재사건(1904년 4월 15일), 일본의 경복궁 습격사건(1894년 7월 23일)에 대한 소회 등도 실려 있다.


구한말에서 일제 강점기까지 한국에서 살다간 미국인 여선교사 매티 윌콕스 노블(1872∼1956) 여사가 이 땅에서 보고 들은 것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글을 묶은 '노블일지 1892∼1934'(이마고)가 출간됐다. 감리교 선교사인 노블 여사는 스무 살에 남편 윌리엄 아서 노블과 함께 한국에 들어와 서울과 평양에서 42년간 살다가 미국으로 돌아갔다.



《노블일지》는 이러한 공포 분위기에서도 용감하게 진행된 한국인들의 동맹파업과 동맹휴교, 일본 상품들에 대한 불매운동 등 당시 서울의 모습과 항일운동의 전개 양상을 세밀히 그리고 있다. 


《노블일지》는 우리 근대사 연구의 중요 사료일 뿐 아니라 여성사와 생활사를 연구하는 이들에게도 귀중한 참고자료가 되어줄 것이다.






매티 윌콕스 노블(Mattie Wilcox Noble, 1872~1956) 여사

배재학당 최초 서양음악 여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