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상식

대한제국 근대화 vs 일본 식민지 근대화론

ㅋㅌㅌ 2018. 2. 11. 12:23

한국의 근대화는 1876년 ~ 1910년까지 이미 진행중이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이 이를 방해했고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면서 우리 스스로의 근대화가 중단된 것입니다.

 

1910 ~ 1945년까지 일본 식민지배를 당하면서 식민지 형태에 맞는 근대화가 진행이 되는데 일본은 조선을 산업 국가로 만들기 보다 자신들이 필요한 것을 생산해서 공급해 주는 공급지 정도로 만들어 버립니다.

 

한국에서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한 대표적인 학자로는 서울대 경제학과 명예교수인 안병직과 그의 제자인 이병훈이 대표적이며 일본 경도대학 교수인 나카루마 데스를 들수 있다. 1980년대 이후 뉴라이트 계열의 안병직, 이영훈에 의해 부활되었다. 일제의 한국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뉴라이트와 이명박의 새로운 대안 역사 교과서와 박근혜 역사교과서 국정화 활동이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1924년 조선제국대학의 첫 신입생을 모집했다. 이후 ‘경성제국대학’으로 바뀌었다. 경성제국대학은 식민지 대학이라는 사명을 가진 일본의 제국대학일 뿐이었다. 

 

열강들이 식민지를 확보하려 애쓴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제국주의의 속성에 관해서는 상식 차원에서 확립되어 있는 인식이 있다. 뉴라이트는 이 상식을 무시한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선전을 아직도 곧이듣고 있는 자칭 '역사학자'들을 21세기 한국에서 보는 것이 놀랍다.

 

대한제국 시대에 이미 근대화 기틀은 잡혔고.일본만 아니였다면 대한제국 스스로 근대화 꽃피게 하고 휼륭히 근대화 이룩했을건데 일본식민지 세력이 대한제국 즉 한민족 스스로의 근대화 기회를 봉쇄하고 가로채간 세력일뿐입니다. 대한제국은 착실히 근대화 기반을 다져나가고 있었습니다. 대한제국의 각종 개혁의 결과물 입니다. 

 

한일병합이 있기 전에 조선의 근대화 과정의 모습

1897년 관제개혁

1898년 의회 설립 (중추원 : 임명의원 25명, 민선의원 25명)

서울시청[한성부 청사]의 모습

1894년 경무청(警務廳) 창설. 근대경찰 제도 시작.

1895년 근대 소방시스템 도입.

1895년 전국민 평등법 제정.

 

~교통, 통신~

1898년 전차개통

1898년 한성전기회사 설립. 전기보급시작.

1899년 철도개통. (1899년 촬영)

1897년 착공, 1900년 개통된 한강철교.

1884년 근대 우편제도 실시 (우체부)

1885년 電信 개통. 통신원 직원 기념 촬영.

1885년 電信 개통......1886년 전신교환원 사진

1903년 자동차 수입시작.

 

~의료~

1885년 서양의학 도입. (1904년 촬영, 세브란스병원)

1907년 촬영, 대한의원

1877-1910 박에스더 최초의 여의사

1903년 제네바협약 가입. 적십자 활동시작.

 

~군대~

1881년 군제 개편

대한제국군복

신식 무기 도입(암스트롱 포)

1894년 사관학교 설립 (1900년 촬영, 해군사관학교)

1903년 신식군함 도입

 

~교육~

1883년 근대교육 실시

1883년 근대교육 당시의 교과서

1885년 서양시찰 유학생

1886년 여성교육 실시

1899년 외국어 전문학교 설립

 

~언론~

1883년 근대 언론 시작 (신문사의 모습)

1896년 민간 신문 발간. 독립신문-한글판과 영어판으로 발간.

1898년 일간지 발행시작.

1898년 민중집회 시작 만민공동회

 

~경제~

1902년 근대 화폐제도 실시

유통된 금화

1904년 은행권

1883년 전환국 설치. 근대화폐 발행시작.

1897년 보험회사 설립, 보험업무시작.

1897년 민간 자본은행 설립 , 1898년 대한제국의 채무 해결. (한성은행)

충남 익산 금광 (1899년 촬영)

1895년 운산광산

1906년 공업전습소 설립. 공업개혁에 박차.

1899년 상업, 경제전문 일간지 창간

 

~외교~

1883년 미국에 외교사절단 파견

1888년 미국 워싱턴 주재 영사관 업무시작. (사진은 1891년)

1907년 네덜란드에 특사파견

1900년 중명전 (외교사절 접견장)

 

~문화 예술~

근대 창작소설 출판(혈의 누.1906년)이인직 저서

1895년 영화관 개관(표관)

근대 공연문화 시작 (1895년 협률사 공연)

국립극장 원각사 (1908년)

 

~종교~

1886년, 종교와 선교의 자유 획득,  1898년 명동성당

1892년 신학교 설립.

1898년 개신교 교회설립.

1890년 성공회 병원(성누가병원)설립.

샬트수녀원(1905년 촬영)

 

~SPORTS~

1906년 야구팀 설립.

1896년 축구팀 설립.

1900년 골프장 건설.

1894년 필드하키(또는 격구)를 즐기는 사람들

 

출처 :한류열풍 사랑  글쓴이 : 물기둥

http://cafe.daum.net/kokoin/EtaY/124?q=%C0%CF%BA%BB%20%BD%C4%B9%CE%C1%F6%20%B1%D9%B4%EB%C8%AD

 

 

이것부터 고치자!! 

현대 한국에서 제삿상에 올리는 술이 일제의 술인 '청주'이며, 일본식 발효주인 정종이 사용되고 있다.

 

1905년 7월. 가쓰라-태프트 밀약... 미국이 일본의 한반도 지배 인정.
1905년 8월. 제2차 영일 동맹... 영국이  일본의 한반도 지배 인정.
1905년 9월. 포츠머스 조약... 러일전쟁에서 지고 러시아가 한반도에서 손 떼겠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 체결.
이완용 | 황현필
https://www.youtube.com/watch?v=CGvjIyixEqE

 

 

 

 

 

 

배재학당

1885년 미국 감리회 소속 H.G.아펜젤러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배재학당은 이듬해 고종황제로부터 교명 배재학당(培材學堂) 현판을 하사받았다.

배재는 배양영재(培養英材)의 줄임말로 ‘유용한 인재를 기르고 배우는 집’이란 뜻을 담고 있으며, 설립 당시부터 대학(PAI CHAI COLLEGE)으로 출발했다. 배재학당이 있는 정동은 한국 근대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다.  설립 초기부터 개방화된 전통을 이어받아 배재대는 40개 나라의 243개 대학 및 기관과 자매결연을 맺고 활발하게 교류활동을 전개하고 있으며, 현재 74개 나라에서 유학 온 726명의 외국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다.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뒤로 배재대학교, 배재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이승만. 여운형 . 주시경. 김소월. 서재필

 

자랑스러운 배재인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한글학자 주시경,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 개화기 지식인 서재필, 윤치호, 김지호, 의학자이자 사회사업가 오긍선, 민족 시인 김소월 소설가 나도향, 여윤형(자퇴)

 

###1. 한국에서 근현대 체육은 언제부터 시작 되었을까요? 

 

1994년 갑신정변 이후 선교사들의 입국과 더불어 설립된 각종 기독교계 학교들은 복음전파와 새로운 서구 체육 문화를 보급하였다. 이들 기독교계 학교 가운데 배재학당은 최초로 선교사들의 지도 아래 근대 스포츠를 과외활동이나 특별활동으로 수용하였다. 이들은 과외활동으로 연설회, 강연회, 토론회와 같은 집회와 함께 야구, 축구, 정구와 같은 서양식 운동경기를 시작했다.

 

이와 같이 역사적으로 배재학당은 한국 체육의 선구자적 입장에서 각종 구기운동을 보급해 왔다. 다시 말하여 우리나라의 근대체육 발상지는 배재학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일제치하에서 배재는 이러한 체육을 민족운동의 원동력으로 삼아 항일에 늘 앞장서 왔다.

 

일제 식민교육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차별교육을 통한 우민교육이었으므로 모든 방면에 있어서 일본과의 공정한 경쟁은 사전에 철저히 봉쇄되어 있었다. 이러한 일제 식민통치하에서 일본학생과 어느 정도 동등한 입장에서 실력을 견줄 수 있었던 분야가 바로 체육활동이었다. 이 방면에서의 일본인과 일본 학생들에 대한 승리나 우승은 곧 일본민족에 대한 조선민족의 우월감의 발휘로 직결되었던 것이다.

 

이렇듯 배재 체육은 단순한 운동경기 수준을 넘어 나라 잃은 한과 울분을 이 체육경기를 통하여 풀곤 했다.

 

배재가 어느 종목에서 전 일본대회를 석권하게 되면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의 민족지들이 그 소식을 대서특필하고 때로는 호외까지 발행하기도 하였다. 이를 통하여 울적했던 당시 우리 민족의 사기앙양과 민족적 자부심을 심어주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 근대체육을 태동시켰을 뿐만 아니라 애국 체육의 선두주자였던 배재체육의 대표적 종목들을 살펴본다.

 

 

1. 기계체조

구한말 도포입고 ABC를 배우던 시절 시내 곳곳에 갓 쓰고 맨손체조를 하는 사람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바로 배재가 이러한 신 체육문화를 수용하고 보급하는데 선봉에 서 있었던 것이다. 1897년 배재학당 운동장에 우리나라 최초로 체조용 운동기구인 철봉, 사다리, 기구, 뜀틀 등이 구비되어 배재 학생들뿐만 아니라 시민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였다. 이 시기의 배재 체육 시간은 이러한 기구들을 이용한 운동과 손, 팔, 허리, 머리 돌리기 등의 도수체조가 보급되었고 배재의 특별행사, 특히 운동회 때 시범을 보임으로써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2. 정구

1990년 배재가 최초로 정구부를 조직하여 각급 학교에 보급함으로써 배재의 명성을 드높였다. 처음에는 네트 대신 새끼줄을 치고 라켓 대신 널조각을 가지고 시작하였으나 그 후 정구의 인기도가 상승함에 따라 배재의 정구부가 한층 강화되었다. 그 이후 1925년 ‘전조선정구대회’에서 우승하는 등 많은 전국대회를 석권하여 정구부의 원조인 배재의 입지를 굳건히 하였다.

 

3. 축구

스포츠왕국 배재학당에 축구공이 구르기 시작한 것은 1902년 가을부터였다. 그 후 배재 축구는 전국적으로 단연 독보적인 존재였다. 배재는 1924년 ‘전조선학생기독교청년연합축구대회’, 이듬해 ‘전조선축구대회’ 등을 잇달아 제패함으로써 배재 축구의 무적 명성을 드높였던 것이다. 배재학당 축구선수로 가장 명성이 높았던 사람이자 조선을 대표하는 선수로 신국권 선수를 꼽을 수 있다.

 

4. 야구

배재의 야구부는 1911년 학교 최초로 조직되어 1920년에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에 참가하였다. 그 이후 1922년 조선체육회주최 ‘제3회전국야구대회’에 참가하였고 그 이후 1922년 조선체육회 주최 ‘제3회전국야구대회’에 참가하여 당시 중등부 패자로 군림하던 휘문보고팀을 3대0으로 물리치고 정상에 올랐다. 특기 1924년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 전신)와의 대전에서 승리, 우승을 차지한 사실인데, 대학 팀을 상대로 승리하였다는 것은 배재 야구 전력이 막강하였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 당시 최고의 선수였던 3루수 이영민의 명성은 실로 대단하였다. 오늘날 이 선수의 위업을 기리고자 전국 아마추어 야구선수권대회에서 ‘이영민타격상’이란 이름으로 매년 우수선수를 발굴, 시상하고 있다. 한편, 특기할만한 사실은 1922년 겨울에 배재 야구부가 미국메이저리그팀을 초청하여 친선경기를 펼쳤던 것이다. 이와 같이 배재는 전 조선을 대표하는 팀으로 성장하여 선진 야구를 수용하는 진취성을 엿볼 수 있었던 것이다.

 

5. 육상

배재는 이미 축구와 야구의 전국제패로 그 명성이 널리 알려지고 인정받고 있었던 시기에 육상에서까지도 두각을 보이게 되어 배재 체육의 인기와 위상은 하늘 높은 줄 모르게 되었다. 더구나 일제 치하에서 암울했던 우리 민족의 가슴속에 민족적 긍지와 자부심을 심어준 사건들이 배재의 육상부를 통하여 나타나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하여 일본 학생들과 경쟁하여 승리하는 등 전 일본을 제패함으로써 체력과 육상경기에서는 조선 젊은이들이 일본인들보다 우수하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보여줬기 때문이다.

 

특히, 1937년 일본에서 육상 강호 144개교가 참가한 ‘전일본중등대항육상경기대회’에 양정을 물리치고 조선을 대표하여 참가한 배재 육상부는 종합점수 65점을 획득하여 우승하였다. 17점을 얻어 준우승한 우라와포화 중등 팀과는 무려 48점이나 났다. 이 우승은 일제시대에 일본 땅에서 조선민족의 한을 풀었던 역사적인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러한 배재의 전 일본 제패 승전보로 전국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국내 매스컴들은 앞 다퉈 이 승리를 민족적 쾌거로 보도하였고, 특히 조선일보는 호외까지 발행하면서 대서특필하였다. 전국이 당시 이렇게 열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1년 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살 사건으로 반일 감정이 전국을 휩쓸고 있었던 시기였으므로 배재 육상의 전 일본 제패는 1년 전의 민족적 감격을 재생시키는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6. 유도, 검도

사립학교에서 유도와 검도를 필수과목으로 채택한 최초의 학교가 바로 배재이다. 1925년부터 유도와 검도가 전국체전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어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특히, 배재의 유도부는 1927년 ‘강무관 개설 5주년 연무대회’ 및 1931년 ‘제3회 전 조선중등학교 유도대회’에서 우승함으로써 그 명성을 드높였다.

 

7. 권투

권투는 1931년 중등에서 최초로 조직되었다. 그 당시 사회적으로 아직 인기를 끌지 않았던 권투를 배재가 운동부 조직을 하게 된 것도 배재의 진취성을 보여주는 일면이기도 하다. 이후 배재 권투는 전국대회를 석권하며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8. 럭비

럭비 배재는 1932년 조직되어 일본대회 대표팀 선발경기에서 우승하는 등 전 조선을 대표하는 팀으로 성장하였다. 특히, 1936년 일본 갑자원대회 결승전에서 대만의 대북제일중학교 팀을 누르고 우승함으로써 전 일본을 제패하는 쾌거를 이룩하였다.

 

9. 탁구

1933년 조직된 배재 탁구는 단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종목으로 군림하였다. 특히, 1938년 ‘전일본중등탁구선수권대회’ 준우승에 이어 1940년에 우승을 차지함으로써 배재가 일본을 제패하는 종목으로서 탁구도 그 이름을 올려놓았다.

 

그밖에 1922년 빙상부 등 총 15개 분야에서 학교 최초로 운동부를 조직하여 명실 공히 우리나라 학원스포츠 요람구실을 하였다. 이와 같이 배재학당은 체육을 통하여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나아가 한국이 오늘날 스포츠 선진국으로 부상하는데 배재가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김홍설 배재대학교 레저스포츠학과 교수

 

[출처] 한국체육의 발상지 배재학당(배재신문 2005.6.7)|작성자 배재대레저스포츠학과

 

###2. 한국에서 신문은 언제부터 매일 발행했을까요? 

 

새로운 소식을 전해주는 신문은 언제부터 매일 발행했을까요? 

시작을 알려면 구한말에 나온 '협성회회보'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협성회회보(매일신문) → 독립신문

 

 

 

▲국내 최초의 일간신문인 매일신문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이권침탈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협성회회보(왼쪽)는 배재학당 학생들이 만든 협성회의 회보로, 자주독립정신을 고취했다. 신문박물관 제공

 

협성회회보(매일신문) 

 

협성회회보는 배재학당 학생들이 만든 협성회(協成會)에서 발행한 회보입니다.

 

협성회 회보(協成會 會報)는 배재학당의 학생회인 협성회(協成會)가 1898.1.1 창간한 주간 신문이다. 편집 체재와 내용은 일반을 상대로 하는 종합지의 성격을 띠었으며 외부의 보조를 받지 않고 발행된 신문이다. 자주 독립 정신 고취 및 비판기능 등을 갖춘 신문으로서 최초의 일간지인 매일신문의 기초가 되었으며, 우리나라 근대 신문발달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배재학당은 선교사인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1858∼1902)가 1885년에 설립한 최초의 근대식 중등교육기관입니다. 여기서 강의를 맡았던 서재필(徐載弼·1864∼1951) 선생의 지도 아래 사회 참여적이고 민주적인 토론회를 전개하여 민중의 큰 호응을 이끌었습니다.

 

이들은 토론 내용과 결과를 널리 알리며 개화정신을 고취시킬 신문 발행의 필요성을 느껴 1898년 1월 1일 협성회회보를 창간했습니다. 자주독립정신을 고취하고 사회비판 기능을 갖춘 주간신문으로 시작해서 이후 일간지로 발전합니다.

 

 

1898년 4월 2일 제14호까지는 주간으로 발행하다가 회를 거듭할수록 큰 호응을 얻자 같은 해 4월 9일부터는 '매일신문'으로 제호를 바꿔 국내 최초의 일간이 됐습니다. 

 

 

 

 

독립신문

매일신문보다 2년 앞선 1896년 창간된 독립신문은 격일로 주3회 발행했습니다. 우리나라가 자주적인 힘을 가지기 위해서는 말과 글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던 주시경은 독립운동가 서재필을 만나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한글로 만들어진 '독립신문'을 창간 하였습니다.

 

 

 

 

"의심할 나위도 없이 조선에서 가장 교육적, 도덕적, 지적 영향력을 행사해 왔고 지금도 행사하고 있는 학교는 배재대학이다." 

-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388쪽. 이사벨라 비숍(Isabella Bird Bishop)

... 이사벨라 비숍 눈에 비친 구한말 상황과 배재학당 가치

 

 

 

 

 

 

 

 

 

 

 

 

 

 

 

 

 

 

 

 

 

 

일본과 친일파들이 숨기고 있는 대한제국의 진실

 

 

#마라도함 #문무대왕함 #세종대왕함 

대한민국 주력 함대 총출동…한미 해군 항모강습 훈련 (현장영상) / SBS 

https://www.youtube.com/watch?v=DmfhvourAkc 

 

#SBS뉴스 #전투기 #kf21 

KF-21 엔진 · 활주 시험…7월 첫 시험 비행 / SBS 

https://www.youtube.com/watch?v=SyCqXIbkyB8 

 

#전투기 개발 필요한 이유 #전투기 구입비 30% #전투기 보수비용 70% 
자립에 성공한 한국/ 국방력 급상승 이대로만 가자! 
https://www.youtube.com/watch?v=PzuGXe76_bg

 

 

#일본어 카타카나는 신라 시대 구결문자

#신라 #일본 #구결문자 #각필 #가타카나 #일본 가타카나 기원은 신라 구결

한글 창제 이전시기 고대국어 #서기체 #차명 #향찰 #이두 #구결

구결(口訣)은 한문을 쓸 때 단어나 구절 사이에 붙이는 한국어 토씨 표시용으로 사용되던 문자로, 반대 어순인 한문을 쉽게 읽고자 또는 올바른 풀이, 문법 구조를 나타내고자 각 구절마다 한국어 토를 다는 데 쓰였다. 기록할 때 한자나 한자를 줄임꼴로 만들어 사용하였고, 향찰과 서로 상승 작용을 하여 함께 발달하였다. 

 

구결은 한글로 쓴 것이 아니고 한자의 획을 일부 줄여서 쓰기도 하고, 간단한 한자는 그대로 쓰기도 하였으며, 주로 한국어의 관계사나 동사 등 한문 구절의 단락을 짓는 데 사용되었다. 구결문자는 한문을 읽을 때 한자 사이에 쓰는 일종의 발음기호 같은 문자로 신라에서 불교 경전을 읽을때 한자를 읽기 편하도록 자체적인 문자를 경전 옆에 자국을 내어 빛을 비스듬히 반사하면 보이도록 새겨 놓았던 것입니다. 

 

구결 문자는 한자의 일부분을 따온 약체자로 신라인들이 한자를 줄여쓰는 방법이었는데 일본 문화재에서 발견된 각필이 일본의 카나카나와 똑같다는 것이 증명됐습니다. 구결은 훈민정음 창제 후 국문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자연 국문으로 대체, 사용되었다.

 

구결 문자들은 일단 유니코드 내의 한자를 사용하여 표기할 수 있다. 유니코드의 한자에는 구결에만 사용된 특수한 약자들도 상당수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사용에 별 무리가 없다. 유니코드 UTF-8 인코딩 방식을 적용하면 한자도 구결문자 통해 입력이 쉬워진다. 

중국어 발음대로 영어 알파벳 입력해 한자 입력하는 중국........보고있나?

 

#불매운동 #일본아베 #가타카나 #구결문자 #히로시마대학 명예교수 고바야시 요시노리 #일본어는 신라 구결문자+한자어

日 가타카나 한국이 발명했다 밝혀지자 일본 네티즌 '그럴리가 없다' 잡아떼는 웃긴 상황

https://www.youtube.com/watch?v=lm5f49owVaw 

#구결 #일본어  #가타카나 #히라가나 #한자 #동아시아 역사언어학자 알렉산더 보빈

일본의 가타카나는 한국의 구결에서 왔다 

https://www.youtube.com/watch?v=bt1Q1KbUOKw 

#구결문자 #고려대장경 

KBS 역사스페셜 – 천 년 전 이 땅에 또 다른 문자가 있었다 / KBS 2002.10.12 방송 

https://www.youtube.com/watch?v=rEcOR-Sc2Ac 

 

 

 

 

"나라를 한번 잃으면 다시 찾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우리 국민들은 잘 알아야 하며.
경제에서나 국방에서나 굳건히 서서
두번 다시 종의 멍에를 메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내가 우리 국민들에게 주는 유언이다."
-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유언으로 남긴 것으로 알려진 한 마디.

 

이런거 보면 실학을 실생활에 적용한 고종 황제가 정말 대단한거 같다. 독립신문 창간, 한성전기회사 설립, 1899.5.4 아시아 최초 전차 개통, 종로에 전등 보급, 문관이 아닌 보부상인 이용익 궁내부 내장원경 채용, 1899년 육해군 총괄 원수부 창설하고 해군사관학교도 개설. 양무호 군함도 만들고, 제국익문사비보자정 이라는 밀서도 만들고.. 대한제국 근대화를 위해 고종이 엄청난 투자와 노력을 했지만 일본이 그걸 방해할려고 고종을 궁안에 가둬두고.. 그런데도 일본 식민지 근대화 떠들어 대는 녀석들이 있는게 더 신기..토착왜구의 한계. ㅡㅡ

 

"나라를 하잃으면 다시 찾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우리 국민들은 잘 알아야 한다. 두번 다시 종의 멍에를 메지 말아야 한다"

-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유언으로 남긴 것으로 알려진 한 마디.

 

[팩트체크] 미국등 서양인들에게 동양은 단지 그들의 이용 도구로 인식될뿐이다.

 

###1. 미국은 이승만에게 친일파를 관리로 등용할 것은 꾸준히 요구하였다. 

미국은 한국을 해방시키는데 중요한 역활을 했지만 친일파란 '악의 씨'를 보호하고 육섬함으로써 대한민국 근대사에 뼈아픈 역사를 남겼다. 1945년 9월 상륙한 미 점령군은 한국인들은 적으로, 재한 일본인들은 친구로 비쳐졌다. 조선 총독부 기구는 미군정 기구가 되었다. 일제에 부역한 친일 민족반역자들은 유임되었고 곧 승진했다. 특히 해방지 되자 두려워 피신했었던 경찰을 다시 불러 불러들인 것은 한국인을 분노케 했다. 해방은 해방이 아니었다. 

 

미국이 한국인 의사와는 반대로 친일파를 관리자로 유임시킨 것은 친일파에 대한 한국인의 감정과 한국의 현실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미 군정이 조직저긍로 잘 훈련된 친일 경찰을 중시한 이유는 경찰 책임자 마글린 대려의 다음과 같은 발언에 드러나 있다. "그들이 일본인을 위해서 훌륭한 업무를 수행했다면 우리를 위해서도 그럴 수 있으리라고 생각 합니다."

 

남조선 과도 입법의원에서 미군정과 극우 세력의 반대를 무릅쓰고 1947년 7월 '민족반역자 부일 협력자 간상배에 대한 특별법'이 통과 되자 미군정은 이것을 공포할 것을 거부했다. 미국은 제헌 국회에서 친일파를 처단하려는 것에 대해서도 곱지 않은 시선으로 지켜봤다. 미국은 이승만에게 친일파를 관리로 등용할 것은 꾸준히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일본과의 수교조건으로 대마도 반환, 식민지보상 36억불 청구 등 사실상 일본이 받아 들일 수 없는 요구를 함으로써그는 끝끝내 일본과의 수교를 거부했다.

 

###2. 미군정은 친일파 관료들과 인사들을 대거 재기용했다.

해방 이후 38도선 이남을 통치하게 된 미군정은 행정의 안정화와 반공주의를 위해 친일파 관료들과 인사들을 대거 재기용했다. 제2조. 정부 등 전 공공사업 기관에 종사하는 유급 또는 무급 직원과 고용인, 그리고 기타 제반 중요한 사업에 종사하는 자는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종래의 정상 기능과 업무를 수행할 것이며, 모든 기록 및 재산을 보호•보존하여야 한다. 미국 태평양 방면 육군 총사령부 맥아더 사령관 명의 포고 1호(1945.9.9.)

 

미군정은 38도선 이남의 일본군은 무장해제 시켰지만 일경으로 복무했던 조선인 경찰들은 거의 그대로 기용했으며 조선총독부 산하 관리들도 변함이 없었다,  군정 경찰은 경무국이라는 이름으로 1945년 10월 21일에 창설됐다. 1946년 11월 기준으로 상위 계급의 간부가 된 군정 경찰의 82%에 달하는 사람들이 친일 경력이 있었다.

 

###3. 친일파 재기용에 대한 미국 경찰 책임자와 맥아더 장군 인식 수준

"그들이 일본인을 위해서 훌륭한 업무를 수행했다면 우리를 위해서도 그럴 수 있으리라고 생각 합니다." 라고 말한 미국 경찰 책임자 마글린 대령 말을 기억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일본인이 훈련시킨 사람들을 계속 쓰는 일이 현명한 처사인지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경찰로서의 자질을 갖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일본인을 위해서 훌륭한 업무를 수행했다면 우리를 위해서도 그럴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일본인이 훈련시킨 사람들을 경찰에서 몰아내는 일은 공정하지 못한 것입니다."이 이유에는 맥아더 사령부의 규정에도 나와 있듯이 "...공산주의에 대한 방벽을 구축하는 것"이라는 목적이 제일 컸다.

 

7:20 막아더 연합군 최고 사령관.. 대마도 반환은 미국 주도의 리더십에 방해요소가 된다며 제동을 걸었죠. 
맥아더 저 녀석은 해방되고 나서 이승만에게 친일매국노를 관리경험이 있으니 계속 채용하라고 했던 미국놈. 미국은 공산주의 팽창 방어만 생각할뿐. 나라의 아픔이나 고충 같은건 생각하지 않는 놈팽이
#대마도 #맥아더
'일본은 한국 땅'이라는 한국정부의 팩트폭격. 일본총리까지 나서서 강력하게 반발하고 중국이 지지의사를 표한 이유

http://https://www.youtube.com/watch?v=cAd41a9kGkk 

 

 

 

 

 

###4. 이승만은 일본과의 수교조건으로 대마도 반환, 식민지보상 36억불 요구

이승만은 재임기간 12년동안 미국으로부터 일본과 수교를 맺으라는 수 많은 협박과 회유가 있었지만, 일본과의 수교조건으로 대마도 반환, 식민지보상 36억불 청구 등 사실상 일본이 받아 들일 수 없는 요구를 함으로써 그는 끝끝내 일본과의 수교를 거부했다.

 

###5. 일본은 한국, 미국은 필리핀 차지하기로 합의한 '가쓰라-테프트 밀약'

가쓰라­태프트 밀약 (러․일전쟁 중 1905.7.29) 

미국의 필리핀에 대한 지배권과 일본 제국의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상호 승인.

 

루스벨트 대통령은 "1900년 이래 한국은 자치할 능력이 없으므로 미국은 한국에 대해 책임을 져서는 안되며,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여 한국인에게 불가능했던 법과 질서를 유지하고 능률있게 통치 한다면 만인을 위해 보다 좋은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피력하고 일본의 조선 지배를 승인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은 조선에 대해 을사조약을 강요했으며, 미국은 이를 적극 지지했다. 

 

 

미국 트럼프는 주한 방위 부담금 5조원 요구. 문재인이 약속한 10조 원대의 무기 구매 계획.. 미국은 우리의 우방도 아니고 동지도 아니다. 오바마 역시도 마찬가지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의 구심체로 작용하면서 적지 않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독립운동의 중추 역할을 수행했다. 더 나아가 이들은 국권회복 이후 대한민국 정부 건설에도 참여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 초대 부통령 이시영, 초대 국방부장관 이범석, 2대 국회의장 신익희 등이 대표적이다. 이 외에도 유동열, 최용덕, 김홍일, 송호성, 안춘생, 김신 등은 광복군 출신으로 건군 혹은 국군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며 6·25전쟁에서 대한민국의 수호에 크게 기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한국 이승만 정부시절 친일청산이 돼지 못했을까. 살펴보면 이유는 간단하다. 

미국은 이승만에게 친일파를 관리로 등용할 것은 꾸준히 요구하였다. 미군정은 친일파 관료들과 인사들을 대거 재기용했다.

 

이런 비극적 결말 때문에 우리는대한 제국의 역사를 애써 외면하려 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역사는 단지 과거형의 사건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를 보는 창입니다.

 

한국의 왕정 시대를 통들어 최고의 왕 아니 황제은 고종이라는 사실은 틀림이 없다. 

 

대한제국 시절 고종의 피눈물 나는 근대화 노력이 보이지 않는가... 

일본 식민지 근대화론 떠들어 대는 토착왜구 박멸 가즈아!!! 

 

[팩트체크] 대마도는 한국땅, 오가사와라 제도는 미국땅, 센카쿠 제도는 중국땅, 오키나와 제도는 메이저 합병전 류큐왕국 재건

일본이 대마도를 불법점거 중이고 국제법상 대마도는 한국땅!

1. 유럽 동양학자 클라프로트가 번역한 지도 <삼국접양지도> 프랑스어판

오가사와라 제도.. 미국 페리제독이 일본 강제 개항하면서 동양 진출의 섬으로 식민지로 만듬.
일본이 영토 소유 주장한  근거자료로 <삼국접양지도> 프랑스어판 제시
미국은 어쩔수 없이 삼국접양지도의 증거를 인정하고 일본에 오가사와라 제도 반환
그런데 <삼국접양지도>에 독도와 대마도가 한국 땅이라고 표시.
일본이 주장한 것과 마찬가지로 <삼국접양지도>를 근거로 대마도가 한국땅임이 명확해짐.
2. 미국 육해군 합동 정보조직 "JANIS 75'
대마도가 한국 땅이라는 지도가 발견

3. 청나라 강희제 시절 제작한 <십육성구변도>  대마도는 한국땅이라 표기

4. 대마도가 드디어 한국땅으로! UN국제사법재판소에서 결정

 

[팩트체크] 대마도는 한국땅, 오가사와라 제도는 미국땅, 센카쿠 제도는 중국땅, 오키나와 제도는 메이저 합병전 류큐왕국 재건

일본이 대마도를 불법점거 중이고 국제법상 대마도는 한국땅!

.대마도는 옛날에 우리 계림에 예속되었는데 언제부터 왜인이 살게되었는지 모르겠다..(동지여지승람)
.대마도주는 동번으로 청하면서 우리나라에 신하로서 섬겼으며...(조선실록) 
.대마도는 섬으로서 경상도의 계림에 예속 되었던바...(세종실록)
...조선 1557년에도 1860년에도 대마도가 경상도에 속한 우리땅임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어리석은 정책이었던 국경선 일대의 섬을 비워둔다는 ‘공도(空島) 정책’으로 일본인들이 들어와 살게 되고 파벌정치에 빠져있던 조선이 알지 못하는 사이 우리영토가 정식적으로 일본의 영토로 일본이 선포한 것은 1868년 메이지 유신 때입니다. 대마도는 1868년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거쳐 1872년 나가사키 현에 편입되었다.

 

[팩트체크] 대마도는 한국땅, 오가사와라 제도는 미국땅, 센카쿠 제도는 중국땅, 오키나와 제도는 메이저 합병전 류큐왕국 재건

일본이 대마도를 불법점거 중이고 국제법상 대마도는 한국땅!

이승만 대통령이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무려 60차례나 일본을 향하여 국제법의 근거를 대고 대한민국에 반환할 것을 주장하였다.  2022년 6월 25일 대마도가 드디어 한국땅으로! UN국제사법제판소에서 대마도의 일본 영유권을 박탈하였다. 

#대마도 간논지(관음사) 불상 #충남 서산 부석사 금동관음보살좌상 불상 #간논지 제출할 기록물에 대마도가 한국땅 #대마도 영유권 주장했던 이승만
#오가사와라 제도 반환소송 #삼국접양지도 프랑스판 #대마도는 한국땅
#영국 지리학자 J.H.케르놋 1790년 '일본과 한국' 지도 #대마도는 한국땅
#미국 육해군 합동 정보 조직 'JANIS 75' CHAPTER1 #대마도는 한국땅
#소련 외교부 1945년 과거 문서 '현재 일본 소유로 넘어간 대마도를 한국에 이관(transfer) 해야 한다며 일본이 아시아 침략의 발판으로 대마도를 이용했다는 사실로 이 사실을 널리 알려야 한다는 소련의 기록'
#대마도 곳곳에 있는 항일 의졍 전적비
#대마도 과거 생활 양식에 남아 있는 한국식 생활 습관
#유엔 국제사법재판소(UN ICJ) 대마도 국제분쟁지역으로 분류하는 판결

 

[팩트체크] 대마도는 한국땅, 오가사와라 제도는 미국땅, 센카쿠 제도는 중국땅, 오키나와 제도는 메이저 합병전 류큐왕국 재건

[일본 오키제도는 대한제국의 영토] 

#대한제국영토 오키제도 #UN 국제사법재판소 #대마도, 오키섬 한국 영토 인정 #1905년 일본이 강탈해간 섬

#재미한국학교협의회(NAKS) 학술대회 - 아치디오세슨 역사기록보존소 구한말 대한제국 문서.

#오키 제도는 과거 대한제국의 영토로 표시, 대한제국의 세금출납, 행정명령이 기록 되어짐.

[긴급] 독도 옆 오키섬 주민들, 한국편입 요구시위 했다!!! 

 

[팩트체크] 대마도는 한국땅, 오가사와라 제도는 미국땅, 센카쿠 제도는 중국땅, 오키나와 제도는 메이저 합병전 류큐왕국 재건

[일본 오가사와라 제도는 미국땅]

1. 스페인 발견 - 1543년 10월 2일, 스페인 탐험가 '베르나르도 데 라 토레.

2. 영국 소유 - 1827년 HMS Blossom 호의 선장 비체이 대위 영국 소유물 선언.

3. 미국 주민 거주 - 1830년 미국인 5명과 하와이 폴리네시아인 20명이 거주. 

4. 일본 주민 거주 - 1876년 일본 정착민 38명 파견.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미국령으로 편입되어 관리. 1968년에 다시 일본으로 반환.

...최초 주민 거주는 미국. 일본이 어떤 억지 논리 펼쳐서 미국한테 오가사와라 제도 가져오게 된걸까 궁금해 지는군. 미국은 주민 먼저 거주 했는데 왜 반박도 못하고 오가사와라 제도 뺏기게 된걸까.

...미국아. 왜 니땅인 오가사와라 제도 일본한테 뺏긴거냐? 언넝 오가사와라 제도 찾아가거라.. 원래 미국민이 정착한 실소유 실거주지였던 미국땅이었잖아! 미국은 언넝 오가사와라 제도 찾아 가거라.

 

[팩트체크] 대마도는 한국땅, 오가사와라 제도는 미국땅, 센카쿠 제도는 중국땅, 오키나와 제도는 메이저 합병전 류큐왕국 재건

[센카쿠 제도는 중국땅]

센카쿠 열도 댜오위다오 조어도... 장제스가 미국의 반환 거부해 일본땅 된것일뿐.

대만 섬과 오키나와 제도 사이에 동중국해 남서쪽의 5개의 무인도와 3개의 암초로 이루어진 제도. 중국이 댜오위다오를 가장 먼저 발견. 일본은 류큐 왕국과 센카쿠 열도를 오키나와현 편입. 1895년 청일전쟁 이후 일본의 영토로 귀속. 1951년 9월 미일강화조약 체결로 일본에서 미국으로 이양. 처음에 미국은 당연히 중국에 모두 반환해주려고 했는데 장제스가 거절한 이후 미국은 땅 욕심이 생겨서 결국 미국의 영토가 됐다. 그러다 다시 일본에 반환.

 

[팩트체크] 대마도는 한국땅, 오가사와라 제도는 미국땅, 센카쿠 제도는 중국땅, 오키나와 제도는 메이저 합병전 류큐왕국 재건

[오키나와 류큐 제도는 삼별초 후손들이 사는 한국땅]

#삼별초 #류큐 오키나와 #한국 후예 #계유년 고려와장조 #1237 #족보문화 #절구공이 #태극무늬 #류큐 왕국 삼태극 #홍길동 #이어도 신화 #류큐만국진량 
[속보] 태평양의 어느 섬에서 태극문양을 국기로 삼는 나라 발견!! 섬 인구 대부분이 한국인의 후예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원래 일본이 아니었던 류큐 왕국. 오키나와 제도 류쿠왕국.. 1879년 메이지 시대 일본에 병합된 것뿐이니 다시 독립선언 해라. 일본에 지원도 못 받는데 메이지 시대때 강제 병합된거 해지하고 독립해라. 메이지 유신때 일본한테 먹히고, 2차 세계대전후 미국한테 먹히고 1972년대 일본한테 먹히고도 미국기지로 활용되고.. 그냥 류쿠왕국으로 부활해라. 일본이 재해 지원도 안해주고 건설개발도 안해주는데.. 좀 깨어나 류큐왕국 재건설 가즈아. 조선 왕조는 류큐국에 1416년(태종 16년), 이예를 사신('유구국통신관')으로 파견하였다.

 

 

#류큐 자치 연방공화국 #오키나와 독립단체, 한국군 주둔검토 #류큐국 ##1879년 일본 강제병합 #한국은 독립 #류큐는 독립못함 

일본, 오키나와 독립선포! 난리난 일본상황, 오키나와 독립단체 "일본인 쫓아내고 한국인 주둔시키겠다" 

https://www.youtube.com/watch?v=PlvY5f8Gcto 

 

 

 

"이대로는 못살겠다" 한국 되겠다는 오키나와 

https://www.youtube.com/watch?v=DXd9D8Hr3qE 

 

 

#대한제국영토 오키제도 #UN 국제사법재판소 #대마도, 오키섬 한국 영토 인정 #1905년 일본이 강탈해간 섬

#재미한국학교협의회(NAKS) 학술대회 - 아치디오세슨 역사기록보존소 구한말 대한제국 문서.

#오키 제도는 과거 대한제국의 영토로 표시, 대한제국의 세금출납, 행정명령이 기록 되어짐.

[긴급] 독도 옆 오키섬 주민들, 한국편입 요구시위 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VhXJ33HhiVQ 

 

 

일본은 대한제국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침략하여 가장 먼저 한 일이 한국 역사가 한반도를 벗어난 적이 없고, 중국의 속국으로 살아왔다고 조작하여 세괴 교육을 시켰습니다. 현재 한국 정부에서는 우리 역사를 지킨다는 명목하에 많은 돈을 투자해 왔지만, 아직 일본이 조작한 식민사관, 그리고 중국이 주장하는 동북공정 사관을 털어내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현실이 이어진다면 국제사회는 한국을 중국의 속국이나 위성국으로 인정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우리 대일본제국은 패전하였지만 조선은 승리한 것이 아니다. 내가 장담하건대, 조선인들이 다시 제정신을 차리고 찬란하고 위대했던 옛 조선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여년이라는 세월이 훨씬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선인들에게 총과 대포보다 더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 놓았다. 결국 조선인들은 서로를 이간질하며 노예적인 삶을 살 것이다. 

보아라! 실로 옛 조선은 위대하고 찬란했으며 찬영했지만 현재의 조선은 결국은 식민교육의 노예들의 나라로 전락할 것이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가 한국을 떠나면서 남긴 저주의 말

 

 

 

 

 

###1. 1886년 6월 8일 고종황제는 친히“배재학당(培材學堂)”이라는 현판을 하사하였다. 배재는 배양영재(培養英材)의 줄임말로 ‘유용한 인재를 기르고 배우는 집’이란 뜻을 담고 있으며, 설립 당시부터 대학(PAI CHAI COLLEGE)으로 출발했다. 

###2. "의심할 나위도 없이 조선에서 가장 교육적, 도덕적, 지적 영향력을 행사해 왔고 지금도 행사하고 있는 학교는 배재대학이다." 

-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388쪽. 이사벨라 비숍(Isabella Bird Bishop)

 

... 물론 네티즌중에 이런 부류의 대한제국 시절 근현대화 흐름과 경향을 무시하고 부정하려는 사람들도 보인다. 대한제국 시절 근대화를 위해 깨어나고 있는 한국의 모습을 애써 부정하고 외면하는건가. 근현대적 교육과 체육을 한국에 이끌고 전파할려고 했던 배재학당의 노력을 애써 외면하려 하는건가. 묻고싶다. 저들의 논리는 '한국의 일본 식민지 근대화론'을 옹호, 지지하고 있는건지 진심 묻고 싶을뿐이다.

 

 

 

 

나라가 바로 설려면 우선 국민의 뜻이 바로 서야한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말했다. "역사는 어느 집단의 힘으로 변화되는 게 아니다. 그 집단을 이끄는 창조적 천재의 능력만이 새로운 역사의 발전을 창조해왔다"

 

 

 

 

 

 

 

흔하디 흔한 133년 전통의 명문사학 배재대학교 품위.

 

배재는 배양영재(培養英材)의 줄임말로 ‘유용한 인재를 기르고 배우는 집’이란 뜻을 담고 있으며, 설립 당시부터 대학(PAI CHAI COLLEGE)으로 출발했다. 설립 초기부터 개방화된 전통을 이어받아 배재대는 40개 나라의 243개 대학 및 기관과 자매결연을 맺고 활발하게 교류활동을 전개하고 있으며, 현재 74개 나라에서 유학 온 726명의 외국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다.

 

배재대는 교육부의 '잘 가르치는 대학' 대학자율역량강화지원사업(ACE+), 대전 유일 사회맞춤형 산학협력선도대학(LINC+) 육성사업 학과중점형, 고용노동부의 IPP형 일학습병행제 및 듀얼공동훈련센터, 대학일자리본부(국내취업거점대학), 청해진대학 운영기관(해외취업거점대학)에 잇달아 선정돼 양질의 교육과 취·창업 인프라를 확충했다.

 

"의심할 나위도 없이 조선에서 가장 교육적, 도덕적, 지적 영향력을 행사해 왔고 지금도 행사하고 있는 학교는 배재대학이다."

-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388쪽. 이사벨라 비숍(Isabella Bird Bishop)

 

Let me inside make me stay right beside you, PAI CHAI Univ.

 

 

... 무릇 캠퍼스 천하를 읽지 않은 자와는 '배재대'를 논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