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타임지 두번 실린 이승만 대통령

ㅋㅌㅌ 2018. 10. 12. 15:24

#사형수 출신 이승만 해외 독립운동 주도  

KBS 한국사전 – 이승만 제1부 / KBS 2008.8.30. 방송 

https://www.youtube.com/watch?v=SqMOfDesFXQ 

 

프런체스카 도너 (ft 이부란, 이금순)

한국 호적상 기재된 이름은 '푸랜시스카 또나'이고, 스스로 '푸랜시스카'라는 한글 표기를 썼으며, 한국명은 이부란이다. 귀화 후에는 남편이 지어준 '이부란(李富蘭)'이라는 이름도 썼다. 다른 하나는 이금순이다. 우연히 만난 오스트리아인이 "당신은 오스트리아 사람인가요?"라고 묻자 "난 한국 사람입니다. 우연히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났을 뿐"이라고 대답한 일화가 있다고 하며 다른 일화로는 서양인이면서도 한복을 무척 사랑했다고 한다. 문서에 있는 사진도 한복을 입고 찍은 것이다. 

 

프란체스카 여사가 한복을 처음 입어 본 것은 신혼시절인 1935년이었다. 독립운동을 하던 이승만 박사와 25년의 나이차를 극복하고 결혼한 이듬해, 미국 순회도중 윤치영(훗날 초대 내무부장관)부인으로부터 한복을 선물로 받았다. 그대 한복의 아름다음에 매료된뒤 거의 평생 '한복패션'을 즐겼다.

 

이승만 대통령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
그녀는 12년 동안 남편의 독립 운동을 돕고, 12년 동안 영부인으로 살았으며, 22년 동안 남편 없는 땅에서 살다간 파란 눈의 이방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쪽을 찌고, 한복을 입고, 한국 음식만 먹고, 조금이라도 낭비하는 것이 보이면 국민들이 낸 세금이라며 절약하고 또 절약하라고 당부한 한국인보다 더 한국적인 사람이었다.

프란체스카 vs 김정숙, 대한민국 영부인의 패션, 극과 극 

https://www.youtube.com/watch?v=L11y4q6ng9c

 

 

 

 

 

 

 

 

 

 

 

 

 

.1895. 09. 01 배재대학부 (Pai Chai College) (영문학과, 국한문학과, 신학과)

.이승만이 조지워싱턴대를 3학년에 편입한 것은 ‘배재대학’ 2년 학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이후 하버드대 석사 1년, 프린스턴대 박사 2년 과정을 일사천리로 마쳤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과 휴전협정이 이뤄진 1953년 총 2번 타임지 글로벌판 표지에 올랐다.

 

한국 대통령중 처음으로 타임지 표지에 등장한 한국의 전 대통령은 이승만 전 대통령이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한국전쟁 당시인 1950년 10월 타임지 표지를 장식했다.

 

1950년 표지에는 "우리는 절망하지 않았다. 우리는 낙담해서는 안 된다", 1953년 표지에는 "자유의 뿌리는 얼마나 깊은가" 라는 제목으로 커버스토리가 게재 되었다. 두 경우 모두 한국전쟁으로 인한 불안한 상황이 주 내용입니다. 1953년 표지에는 위태로운 한국의 모습을 보여주듯 앙상한 나무가 그려져 있습니다.

 

Monday, Oct. 16, 1950.

그러니까 6.25가 터진 뒤 3개월 후에 쓴 글입니다.

 

1) 그는 철저하게 반공이었다.

2) 그는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3) 그는 공정하게 선출된 대통령이었다. 그것은, 만약 오늘 다른 표가 주어졌더라면 정권이 다른 쪽으로 넘어갈 수도 있는 가능성을 지닌 존재로서 유일한 사람이었음을 의미한다.

 

이승만이 태어난 해인, 지금으로부터 75년 전은 한국 귀족만을 위한 불변의 법칙이 지배하던 세상이었다. 그것은 신사(선비)란 꼭 학자여야만 하고, 또한 그 학자들이 사람들을 지배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법이었다. 이승만의 아버지는 1392년에서 1910년에 이르는 이씨(조선)의 후예였다. 그의 아들은 중국어와 유교식 전통 안에서 한국 선비 교육을 받도록 준비했다. 이승만은 열심히 전통적인 학습을 했다(그는 여전히 중국고전시를 쓴다). 그는 젊은 학자들이 관료로 등용되는 한국의 국가시험에서 1등을 차지했다.

 

그런 학문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즉시로 정부에 들어가지 않았다. 1895년 한국은 독립 상태였지만 러시아와 일본 제국 양쪽으로부터 엄청난 압력을 받고 있었다. 영민하게도 이승만은 서양 교육과 영어로 된 지식이 결국에는 미래의 한국 정부에 유용할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이승만은 서울에 있는 배재대학부 학생이 되었다. 배재대에서 그는 영어뿐만 아니라 기독교와 서양 정치사상에 노출되었다.

 

“우리는 절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결코 실망하지 않습니다.”

 

55년 동안 이승만은 그의 나라의 “국부”로서 사명을 다해 달려왔다. 지난주에, 이 늙고 지쳐 있는, 그리고 눈이 어두워 잘 읽지도 못하는, 그렇지만 여전히 한국 독립의 상징인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거기에 바짝 가까이 다가서 있었다.

 

이것이 저 일러스트레이션의 표정이 일그러져 있는 이유다.

 

[출처] 

http://blog.naver.com/dusdkcydl/221305426514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미 국 프린스턴대에서 박사학 위를 받을 때의 모습.[ 유 영익 지음 『이승만의 삶 과 꿈』에서]

 

 

 

 

 

 

 

 

 

 

 

 

<독립정신>은 이승만 대통령이 1899년 1월 9일 박영효 일파의 고종 폐위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한성감옥에 수감되었을 때 옥중에서 집필한 역사서이며 한국인 최초의 외교사 저술서이다. 이 책은 우리 대한 독립에 관계된 중요한 내용을 쓴 것이므로 이를 읽음으로써 독립이 무엇이며, 우리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그리고 당시 우리나라에 왜 독립정신이 필요했는지, 또 이후의 정세가 어떻게 변화될지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독립정신>은 20대 청년 우남 이승만이 옥중에서 집필한 그의 대표 저서로서, 5천년 동안 지속되어온 우리나라 왕정의 역사를 민주 공화정으로 탈바꿈시키고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을 제시한 책이다. 대한제국 시절 협성회 회보와 독립신문 주필, 교육계몽운동으로는 독립협회 활동 등을 하면서, 왕정 폐지와 공화국 수립을 도모하였다는 반역의 죄목으로 옥살이를 하였으며, 독립정신을 저술하였다.

 

"폴란드는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에 분할되어 망하였지만, 그 국민들이 마음속에 항상 조국을 잊지 않고 이를 회복하려 노력한다면 전과 같은 독립국이 될 수 있다."

 

을사조약 직전에 쓴 이 책에서 이승만은 폴란드의 사례를 들어 다가올 일본의 주권침략에 대한 우리 민족의 대응자세를 주문한다. 이 책의 핵심은 '독립정신 실천 6대 강령'에 요약되어 있다.

 

이승만 독립정신 실천 6대 강령

 

첫째, 우리는 세계에 대해 개방해야 한다.

둘째, 새로운 문물(文物)을 자신과 집안과 나라를 보전하는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셋째, 외교를 잘해야 한다.

넷째, 나라의 주권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다섯 째, 도덕적 의무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여섯 째, 자유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첫째, 우리는 세계에 개방하고 통상해야 한다

① 우리는 세계와 반드시 교류해야 한다. 서양의 새로운 문물을 우리 혼자 막아선 안된다.

② 통상은 서로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한다. 증기선, 열차, 전보, 우편 등 각종 교통 및 통신 수단을 발명한 서양의 기술들을 하루 속히 배워 우리도 시시각각으로 전국이 고르게 발전해야 한다. 이로써 모든 나라들을 이웃처럼 사귀면 공통의 이익을 누리게 된다.

③ 오늘날 통상은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기본이다. 일찍이 산업화에 눈을 떠 새 물건을 만들어 각국에 수출한 영국처럼 해야 한다. 오늘날 전쟁은 상권 쟁탈전이다. 국제 상업을 부국의 근본으로 삼아야한다.

④ 외국인들이 들어오는 것은 우리를 해치려는 게 아니라 서로에게 이익이 된다. 물품의 수입과 수출을 균형있게 해야 외국과 똑 같은 이익을 얻을 수 있다.

⑤ 외국인들을 무조건 원수 같이 여기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동학란이 청일전쟁을 일으켰듯이 백성이 어리석은 것은 나라를 멸망시키는 지름길이다.

 

둘째, 새로운 문물을 자신과 집안과 나라를 보전하는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① 외국인들과 함께 살면서 우리 것을 보전하면서 우리도 균등한 이익을 볼 수 있게 하자.

   우리가 얕보던 일본인들에게 경제권을 모두 내주면 안된다. 경쟁해서 이겨야 한다. 외국인으로부터 무식하다는 말을 듣지 않으려면 우리도 문명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② 세계의 새로운 학문을 공부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이 국제법, 통상조약, 우리나라 역사와 자리에 대해 공부하고 실천해야 한다. 일본이 그동안 성공한 것은 지도층부터 개화하고 국민을 가르치고 인도한 덕분이다. 우리나라 지도층엔 기대할 수 없으니 백성이 공부하자.

③ 신학문을 익혀 외국인들에게 경제적 이익을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 농업을 연구하여 외국인들에게 황무지를 빼앗기지 말고 우리가 개간하고, 농사를 기계화하고, 상업과 광산학, 항해술, 전신과 우편, 어업, 산림벌채와 조림 등을 우리가 외국인들보다 잘해야 한다. 물품을 외국보다 값  싸게 잘 만들어 수출하고, 국민이 한마음으로 국산품을 산다면 부강해질 것이다.

④ 신학문의 혜택을 누려야 한다. 빨리 외국어를 공부하여 번역서만 읽지 말고 우리 글로 책을 많이 내야 한다. 그러려면 외국 유학을 많이 가야한다. 공부가 잘살기 위한 투자이다. 우리 나라가 자립하려는 의지를 자꾸 키워야 한다.

 

셋째, 외교가 나라를 유지하는데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① 외교가 없다면 나라는 고립되며 다른 나라의 침략을 받기 쉽다. 국제법을 잘 지켜야 다른 나라로부터 대접도 잘 받는다. 특히 강대국 사이에서 약한 나라가 국가보존을 위해서는 외교가 너무나 중요하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이런 사실을 몰라서 큰 불행을 당하였다.

② 다른 나라와 친밀한 관계를 가지려면 모든 나라를 공평하에 대해야 한다.오직 원칙과 법을 기준으로 공평한 외교를 해야하며, 문명국가의 도덕적 원칙이 중요하다. 

③ 외국과 우방이 되려면 그 나라들과 공통된 특성을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 진정한 친구, 진정한 우방이 되려면 문화를 공유하고 법과 정치, 학문과 도덕이 무엇인지 본받을 것은 본받아 실행하면 자연스레 긴밀해지고 우리를 도와주러 올 것이다.

④ 진실을 외교의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외국과 협상함에 있어 권모술수를 부리면 당장은 이긴 것 같지만 큰 손해가 된다. 국가망신은 물론이고 망국의 원인까지 될 것이다.

⑤ 국내 외국인들의 잘못은 시시비비를 분명하게 가려야 한다. 나 혼자 살기 위해 외국인의 잘못된 일에 굴복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침략당하는 문을 열어주는 것이 된다.

 

넷째, 나라의 주권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① 외국인에 치외법권 허용은 수치로 알고 회복해야 한다. 그러려면 우리나라도 비인도적인 형벌등을 폐지, 법치주의를 도입하여 외국법과 같도록 빨리 고쳐야 한다.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려면 인도적 사업을 많이 하고 우리의 수준높은 문화를 널리 알려야 한다.

② 자신의 직분을 다한 후에야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수 있다. 

③ 외국인의 조롱거리가 되는 일은 모두 고쳐 업신여김을 받지 않도록 해야한다.

④ 국기를 존중하는 것을 배워야한다. 국기도 모르고 나라의 주권도 모르고 침해하는 사람이 있으면 원수로 여겨야 한다.

⑤ 어떤 일이 있어도 외국 국적을 갖지 말아야 한다.

⑥ 우리나라는 외국 빚을 빌리는 것을 삼가야 한다. 강한 나라는 항상 돈을 빌려주고 그것을 빙자하여 내정간섭을 하므로, 주권을 잃게 되는 지름길이다.

 

다섯째, 도덕적 의무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① 뜻이 같은 사람끼리 감정을 표현해서 뭉쳐야 한다. 기회주의자나 중상모략자, 나라를 팔아먹는 자는 어떤 이유로든 용납해선 안된다. 선악을 분명이 구분하여 정의사회를 만들자.

② 우리는 공적(公的) 의무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나라를 위한 일을 할때는 부모형제 간의 천륜이라도 내던질 줄 알아야 하며, 임금이 백성을 해치고 영토를 팔아넘기고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데도 임금이라 하여 그에 따르는 것은 나라를 위한 것이 아니다.

③ 나라에 충성함에는 용기를 가지고 행동해야 한다. 나라가 곤경에 처했을 때가 큰 공로를 세울 수 있는 기회이다. 역사상 유명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이 그렇다. 지금 우리나라도 그런 때이므로 어찌 일신이나 가족을 걱정하고 있을 수 있겠는가.

 

여섯째, 자유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① 자유를 자기 목숨처럼 여기며 남에게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② 다른 사람의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 지금까지 내려온 온작 억압하는 폐습을 버리고 아랫사람과 천민들을 자유롭게 하여 법 앞에서 평등하게 하여 자유롭게 공부하여 성공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놔야 한다. 그렇게 되면 나라 전체에 활력이 생기고 부유해지고 강력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야말로 독립된 나라를 세우는 근본이 되는 것이다.

 

 

 

 

 

 

 

 

 

 

대한제국 시절 우남 이승만 박사

이승만은 일찌감치 개화사상을 받아들여 아펜젤러의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1895년 배재대학부(Pai Chai College)를 졸업했다.

 

대한제국 시절 협성회 회보와 독립신문 주필, 교육계몽운동으로는 독립협회 활동 등을 하면서, 왕정 폐지와 공화국 수립을 도모하였다는 반역의 죄목으로 옥살이를 하였으며, 독립정신을 저술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한성 임시정부와 각지에서 수립된 임시정부의 수반을 거쳐 1919년 9월 11일부터 1925년 3월 23일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역임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 국무위원회 외교위원 등을 역임했다. 주로 미국에서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을 벌였다.

 

일제 강점기 중반에는 미국 및 스위스 등을 무대로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한편 일본내막기를 저술하는 등 일본의 미국 침략을 경고하였으며 태평양 전쟁 이후 미군 OSS와 임시정부 간의 연결을 주선하였다. 대한민국의 독립을 공약한 1943. 11. 27. 카이로 선언의 배경에는 이승만의 집요한 외교노력이 있었고 그 결실이었다.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미국 체신청에서 발행한 태극기 모양 우표 발행에 크게 기여했으며, 항일 단파 라디오 방송 연설 등에도 참여하였다. 1945년 해방 후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에 추대되었으나, 귀국 후 거절하였다.

 

초등학교 의무교육 도입으로 문맹률을 획기적으로 낮춘 점. 국민 학교 의무 교육제도 실시. 전국 만 7세 아동의 95.3%가 초등학교에 입학. 전문적 인재 육성을 위해 한국외국어대학교, 인하대학교, 배재대학교 등 많은 대학교를 세움. 그 결과 문맹률은 22%로 떨어짐.

 

지주가 독식하고 있었던 서민은 소작농에 불과했던 한국의 토지개혁. 1950년 3월에 농지개혁법을 단행하여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있던 지주제를 혁파하고 농민들의 불만을 해소하는데 성공한다. 이 농민 불만 해소야말로 6.25전쟁 초반의 패전을 극복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원인

 

이승만은 재임기간 12년동안 미국으로부터 일본과 수교를 맺으라는 수 많은 협박과 회유가 있었지만, 일본과의 수교조건으로 대마도 반환,  식민지보상 36억불 청구 등 사실상 일본이 받아 들일 수 없는 요구를 함으로써 그는 끝끝내 일본과의 수교를 거부했다.

 

UTC+9'를 표준시로 삼은 건 1912년 1월부터인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나라는 해방 뒤인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이 일제 잔재 청산을 명분으로 동경 127도30분으로 바꿨다. 그러나 1961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 쿠데타 뒤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국제관례를 이유로 시간대를 돌이켰다. 실제 6·25 전쟁 직후 이승만 정부에선 30분 차이가 나는 표준시를 썼다. 동경 127도 30분 표준자오선에 따른 결정으로, 현재 북한의 것과 같다.

 

한국의 서울 및 수도권을 기준으로 볼 때 경도는 동경 `126도 5분~127도 5분` 사이에 위치하는데 중간값 127도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경도 1도당 4분 정도의 시차가 있으므로 토쿄 시간과는 약 32분의 차이가 있다. 그러다 1961년 박정희가 다시 동경 135도를 기준으로 삼는 법안을 만들어 오늘에까지 이르렀다. 왜 일본 식민 사상에 젖어 살아가고 있는건가? 말로는 친일청산 이라고 할뿐. 생활과 표준은 일본 기준에 맞춰 살고 있는것인가.

 

이승만 정부의 농지 개혁은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형태의 토지 개혁으로 이 과정에서 토지 가격은 폭락하고, 지주들에게 땅을 매입하고 나중에 토지의 값을 지불하겠다는 유가증권을 주었는데, 이 유가증권은 6.25 전쟁 등을 거쳐서 완전히 휴지조각이 되어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지주들의 몰락과 농민층 분해, 근대적 자본가의 성장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한편 6년 의무교육제 도입과 더불어 각 급 학교를 증설하는 것과 아울러, 일제의 식민지정책에 따라 제한되어 있던 고등교육 기회를 부활시켜 전 국민의 교육수준을 향상시켰다. 국민 학교 의무 교육제도를 실시하였고, 전쟁으로 잠깐 계획에 차질이 있었지만 1954년부터 본격적으로 재개하여 1959년에는 전국 만 7세 아동의 95.3%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문적 인재 육성을 위해 한국외국어대학교, 인하대학교, 배재대학교 등 많은 대학교를 세우는 데 투자했다. 그 결과 문맹률은 22%로 떨어졌고, 학교 수와 학생 수는 3~11배 이상으로 크게 늘었다. 특히 1956년부터 시행된 미네소타 계획은 서울대학교의 많은 교수들에게 미국 유학 기회를 주었다. 그들은 나중에  한국 과학기술계를 이끌 중심 세력으로 떠올랐다. 

 

대한민국이 출범하던 1948년에 문맹률은 80%에 이르렀다. 이승만은 1949년에 모든 어린이가 6년제 초등교육을 무상으로 받도록 하는 의무교육제를 도입했다. 결과 문맹자 수는 1959년에 와서 22.1%로 낮아졌다. 

 

1952년 1월 18일 독도를 포함한 '이승만 라인' 설치하였다. 1954년 1월18일 이승만은 독도 한국령 표지석을 건립 하었다. 

1954년 8월10일 

무인도 독도에 등대불이 켜졌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4년 8월10일 '깜짝 이벤트‘를 벌였다. 미리 독도에 등대를 세워놓고 미국 방문 일정에 맞춰 전세계를 향해 등대 점등식을 열었던 것이다. 일본과 미국이 깜짝 놀란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대한민국 국토의 동쪽 끝 땅임을 알리는 독도 등대불! 일본에 남의 땅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 등불이었다. 


이승만 동상은 지난 1987년 2월 당시 배재대 졸업 동문들이 기증해 세웠다. 많은 철거 논란이 있었지만 배재대학교 측은 대학총동창회, 총학생회와 함께 지난 2008년 6월 5일 우남관 앞에 다시 동상을 세웠다.   
국익을 위한 환율 정책

1950년대 한국은 전쟁의 파괴로부터 경제를 복구를 하고 국민의 의식주 기초 생활을 위한 물자 수입을 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였다. 하지만 한국은 외환 부족 상태에 있었고 부족한 외환을 주로 원조 자금, 유엔군 지출 경비 등으로 충당하였다. 


이승만 정부는 복수환율제를 운용하였는데 외화를 최대한 끌어오는데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협정 환율은 미국으로부터 받는 무상 원조 물자 판매 가격을 가급적 낮게 책정해 민간기업의 재건 활동을 지원했다. 그리고 수출 시장에서는 협정 환율보다 높은 시장 환율의 영향을 받게 했는데, 민간 부문의 수출 활동을 억제하지 않기 위한 일종의 수출지원정책이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미국에서 받은 원조는 최대한 값싸게 민간 부문에 판매하고 수출은 상대적으로 고환율의 영향을 받도록 해서 수출로 벌어 들이는 외화를 극대화하려는 조치였다. 미국이 이에 대해서 끊임 없이 이 복수환율제, 저환율정책에 대한 시정을 요구했지만 이승만은 이를 거부하고 이 때문에 1950년대 후반 한미관계가 갈등에 놓이기도 했다.
다만 이승만 정부의 공정 환율과 시장 환율 등, 복잡한 환율 제도와 관련해 외환프리미엄이라는 경제적 지대가 창출됐는데, 이 때문에 많은 자본가들은 국가가 보유한 외환을 배정 받기 위해 애썼다. (1951년 11월 공정 환율과 시장 환율의 비율은 3.03에 이르렀다.)

 

 

‘한국의 MIT’를 목표로 '인하공과대학' 설립. 

이승만은 미국의 MIT를 모방한 최고수준의 공과대학을 세우려고 했다. 그것은 한국인들이 전통적으로  문과를 강조해오던 전통을 바꾸어 공업을 발전시켜 보려는 야심찬 의지에서 나온 것이었다. 
6 · 25 전쟁 중인 1952년에 하와이 교민들은 하와이 ‘한인기독학원’ 부지를 판 돈의 일부를 이승만에게 보내왔다. 그 학교는 독립운동 시기에 이승만이 세운 것이었다. 

학교 이름을 인하(仁荷)로 한 것은 1903년 최초의 하와이 이민을 떠난 인천과 그들이 정착해서 돈을 보낸 하와이에서 한 글자씩 고른 것이었다. 

 

국제관계 전문가를 양성하기 위해 '한국외국어대학' 설립

이승만 대통령은 해외로 진출할 국제관계 전문가를 양성하기 위해 

정부 보조로 외국어대학을 세울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정부의 자금 부족으로 실업가 김흥배에 의해

 한국외국어대학이 설립되었다. 

그 과정에서 이승만은 백두진 총리와 영어학자인 박술음 사회부장관을 통해 

행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도록 지시했다.

 

한국 지방자치 시작 이승만
우리나라 대부분의 일반인들은 1950년 대 그것도 전쟁 중인 1952년에 지방자치가 처음으로 실시 된지 잘 모른다. 1948년 첫 헌법을 제정할 때부터 지방자치를 규정 하였고, 이를 구체화한 『지방자치법』을 1949년 7월 4일 제정하였다. 해방 후 미군정에서도 명목상 지방자치와 비슷핫 제도를 시행하려 했지만 미군정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부를 원했기에 제대로 실시하지 않았다. 이승만 정권 시대에 와서야 지방자치가 실시된다. 이승만은 1949년 12월 한 번도 시행되지 않은 지방자치법을 개정, 국내적 불안정을 이유로 지방자치의 실시보류로 인한 지방행정의 공백에 대응하였다.

이승만은 지방자치제를 도입하여 한국의 풀뿌리 민주주의를 성장시켰다. 이승만이 도입한 지방자치제는 박정희의 쿠데타 이후 폐지되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당시 단식투쟁을 불사하며 "지방자치제는 민주주의를 위해 꼭 필요했다"고 호소했다. 거의 30년이나 지나서야 노태우 정권에서 다시 부활했다.
 

 

......

이승만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후 행적은 논란이 될만한 건 부정할수 없지만, 대한제국 시절의 행위는 이게 팩트이다. 이승만은 두개의 얼굴을 가진 야누스를 닮은 거인으로 비쳐지고 있다. 한민족의 독립과 번영의 기초를 다진 국부로 추앙 받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 지나친 친미, 종미주의 경향과 한번도의 통일을 저해하고 민주주의를 압살시킨 시대착오적 독재자로 매도당하고 있다.

 
이승만 동상은 지난 1987년 2월 당시 배재대 졸업 동문들이 기증해 세웠다. 많은 철거 논란이 있었지만 배재대학교 측은 대학총동창회, 총학생회와 함께 지난 2008년 6월 5일 우남관 앞에 다시 동상을 세웠다.
 
 
 
... 학교측에서 세운것도 아니고 배재대 졸업생 동문들이 세운 이승만 동상을 니들이 왈가불가 왜 시비거는 거냐고. 배재대 학생들끼리 훼손하고 철거하고 다시 세우고 하는건 다양한 의견을 가진 재학생들의 의견 개진 과정이니 이해 하겠는데.. 일부 시민단체등 왜 다른 집안의 사람들이 간섭질인거지. 남의 집에 걸려있는 초상화 걸어라 마라 지적질 해대는 모습이 한심해 보인다. 

 

역사학자 E.H. Carr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 라고 했다.

Carr는 역사란 단순히 과거 사실의 기술이 아니라 현재의 상황에 위치지어져있는 현재의 역사가가 과거를 평가하고 서술하는 것이 역사라고 말한다. 그리고 역사란 하나의 과학이고, 과거의 인물들의 평가를 하는 도덕가는 아니라고 말한다. 역사는 Carr가 말한데로 현재와의 대화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역사가의 시각에 따라 변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역사적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역사는 사실이고 그러한 사건의 열거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역사가 그렇게 사건의 나열로서만 끝날것은 아닐 것이다. 사건을 보고 그것에서 배우며 그를 해석하는 방안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이 바로 歷史다.

Carr가 <역사란 무엇인가>의 첫 장에서 비판의 도마 위에 올린 역사가들을 지배하고 있던 ‘실증’과 ‘주관’에 관한 오도된 인식. 즉 ‘실증주의’와 주관주의’의 문제는 결국 인간의 이성과 합리를 기준으로 역사적 ‘사실’과 ‘판단‘에 관한 자세를 가다듬어야 비로소 역사에 대한 제대로 된 조망이 가능하리라 봅니다. 

 

 

역사학자 E.H. Carr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 라고 했다. Carr는 역사란 단순히 과거의 사실의 기술이 아니라 현재의 상황에 위치지어져있는 현재의 역사가가 과거를 평가하고 서술하는 것이 역사라고 말한다. 그리고 역사란 하나의 과학이고, 과거의 인물들의 평가를 하는 도덕가는 아니라고 말한다. 역사는 Carr가 말한데로 현재와의 대화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역사가의 시각에 따라 변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역사적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역사는 사실이고 그러한 사건의 열거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역사가 그렇게 사건의 나열로서만 끝날것은 아닐 것이다. 사건을 보고 그것에서 배우며 그를 해석하는 방안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이 바로 歷史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과도하고 현재 중심적 폄하는 결국 ‘대한민국 정통성을 부정하는 자해적 이고 정치적 결론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이 든다. 


Carr가 <역사란 무엇인가>의 첫 장에서 비판의 도마 위에 올린 역사가들을 지배하고 있던 ‘실증’과 ‘주관’에 관한 오도된 인식. 즉 ‘실증주의’와 주관주의’의 문제는 결국 인간의 이성과 합리를 기준으로 역사적 ‘사실’과 ‘판단‘에 관한 자세를 가다듬어야 비로소 역사에 대한 제대로 된 조망이 가능하리라고 봅니다. 
 
 

 

 

 

 

 

 

 

 

 

배재대학부(Pai Chai College) → 배재고등학당 → 배재중학교 → 배재고등학교 → 배재대학교(Pai Chai University)

1885년 8월 3일, 미국의 감리교 선교사인 헨리 아펜젤러가 배재학당을 설립했다. 배재학당은 한국 최조의 근대신 중등교육기관으로 배재중학교, 배재고등학교, 배재대학교의 전신이다.
1885년 8월 3일, 미국의 감리교 선교사인 헨리 아펜젤러가 배재학당을 설립했다. 고종황제는 1887년 ‘유용한 인재를 기르고 배우는 집’이라는 뜻으로 배재학당(培材學堂)이란 이름을 하사하였다. 1885년 헨리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을 모체로 하여 1895년 배재대학부(Pai Chai College)를 설립하였다. 같은 해 영문과 106명, 국한문과 60명, 신학과 6명의 입학으로 정규 대학과정이 시작되었다.

1909년 배재고등학당으로 인가되었다. 이후 일제 탄압으로 YMCA 안에서 잠시 명맥만 유지하다가 1925년 일제에 의하여 대학과정은 폐지되었고 1937년 배재중학교(6년)로 개칭하였다. 해방 이후에 1951년 배재중학교(3년) 및 배재고등학교(3년)로 개편하였고, 1958년 학교법인 배재학당의 인가를 받았다.

 

... 대학부 그리고 대학교. 어차피 돌고돌아 배재대학교.

 

 

 

 

https://www.youtube.com/watch?v=UyQ3xR0un-0

 

[어썸 코리아] 한국이라는 나라가 본질적으로 다른 이유

한국은 지난 몇 십년만에 큰 경제성장을 이루어냈죠

외국인들이 느끼기에 한국의 경제성장.

왜 이루어졌다고 생각할까요?

 

불가리아 '토도르', 카자흐스탄 '오네게'

1. 여러가지 제도의 개혁

... '토도르'가 약간 혼동하고 있는게 초등학교 무상교육 도입과 토지 지주제 폐지는 박정희가 아닌 이승만 업적.

2. 인간자원 활용

3. 한국만의 정서

4. 집단주의

 

헐.. 고국천왕 진대법을 아는 '오네게'..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