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 09. 01 배재대학부 (Pai Chai College) (영문학과, 국한문학과, 신학과)
.이승만이 조지워싱턴대를 3학년에 편입한 것은 ‘배재대학’ 2년 학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이후 하버드대 석사 1년, 프린스턴대 박사 2년 과정을 일사천리로 마쳤다.
이승만은 24세 때인 1899년 1월부터 1904년 8월까지 만 5년 7개월을 한성감옥에서 보냈다. 고종황제를 폐위시키고 입헌군주제를 도입하려는 쿠데타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투옥됐다. 당초 사형이 예고됐으나 결국 종신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그가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은 감옥에서 사형을 예감하면서였다.
이승만은 배재학당 영어학부에서 영어를 전공했고, 은사 서재필을 통해 서양 문명을 접했다. 배재학당에서 1학기를 마친 후엔 ‘영어 조교’로 특채됐다. 영어를 가르치며 배운 셈이다. 그만큼 습득이 빨랐다. 배재학당 졸업식에서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영어 연설을 한 인물이기도 하다. 감옥에서도 영어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영한 사전’을 만들 정도였다. 러·일전쟁이 한창인 1904년 말, 민영환·한규설이 그를 밀사로 발탁, 미국에 보낸 배경에는 무엇보다 탁월한 영어 실력과 감옥에서 익힌 국제정치 지식이 있었다.
이승만의 독립운동은 외교를 중시하는 것이었다. 국제정치 전문가인 그의 독립외교 노선은 어떤 성과가 있었는가. 이 부분도 지금까지 저평가돼 왔다. 중국의 임시정부와 만주의 무장투쟁이 주로 평가 받았다. 의혈활동과 무장투쟁이 있었기에 외교노선도 빛을 발하는 것이겠지만, 외교가 없이 한국의 독립이 가능했을까. 요즘 새롭게 주목 받는 부분이 이 대목이다.
특히 1943년의 ‘카이로 선언’이 그러하다. 미국·영국·중국의 수뇌가 처음으로 한국의 독립을 공약했다. 카이로 선언에서 한국의 독립을 특별히 명시해 놓은 것은 그야말로 놀라운 일이다. 당시 일본의 식민지가 한 둘이 아닌데 왜 유독 한국만 명시했는가. 그동안 중국의 장제스(蔣介石) 총통이 주창해서 가능했던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최근 그렇지 않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올해 3월 출간된 『카이로 선언:대한민국 독립의 문』의 저자 정일화 박사는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과 그의 특별보좌관 해리 홉킨스가 주창했다고 주장했다. 루스벨트의 심복이었던 홉킨스가 카이로 선언의 초안을 작성했고, 이를 루스벨트와 처칠이 약간의 수정을 한 후 완성됐다는 것이다.
유영익 교수는 “우리가 가만히 있는데 그들이 알아서 한국 독립 조항을 특별히 넣었을 리는 없다. 아직 뚜렷한 증거는 없는 상태다. 카이로 선언과 이승만의 독립외교의 관계를 밝히는 일이 앞으로의 연구 과제”라고 말했다.
1904년 말 이승만은 밀사로 미국을 방문한다. 한반도에선 러·일전쟁이 한창일 때였다. 러·일전쟁 이후 한반도의 독립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미국의 거중조정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당시 국제정세는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았다. 미국은 일본과 별도로 태프트-카스라 밀약을 준비하고 있었다. 일본의 ‘한국 보호국화’를 허용했다. 일본은 한국, 미국은 필리핀 차지하기로 합의한 1905년 6월 가쓰라-태프트 밀약
밀사 사행이 실패한 후 그는 귀국을 포기하고 유학을 택한다. 아버지의 유학 권유도 있었다. 그 역시 만일을 대비해 한국을 떠날 때 미국 선교사들이 써준 19통의 추천장을 가지고 갔다. 미국의 어느 대학이 좋은 지도 이미 알고 있었다. 조지워싱턴대를 3학년에 편입한 것은 ‘배재대학’ 2년 학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이후 하버드대 석사 1년, 프린스턴대 박사 2년 과정을 일사천리로 마쳤다. 프린스턴대에서 그가 주로 수강한 과목은 국제법·외교학·철학사 등이었다. 5년간 장학금으로 다녔다.
<독립정신>은 20대 청년 우남 이승만이 옥중에서 집필한 그의 대표 저서로서, 5천년 동안 지속되어온 우리나라 왕정의 역사를 민주 공화정으로 탈바꿈시키고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을 제시한 책이다. 대한제국 시절 협성회 회보와 독립신문 주필, 교육계몽운동으로는 독립협회 활동 등을 하면서, 왕정 폐지와 공화국 수립을 도모하였다는 반역의 죄목으로 옥살이를 하였으며, 독립정신을 저술하였다.
###5. 일본은 한국, 미국은 필리핀 차지하기로 합의한 '가쓰라-태프트 밀약'
가쓰라태프트 밀약 (러․일전쟁 중 1905.7.29)
미국의 필리핀에 대한 지배권과 일본 제국의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상호 승인.
루스벨트 대통령은 "1900년 이래 한국은 자치할 능력이 없으므로 미국은 한국에 대해 책임을 져서는 안되며,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여 한국인에게 불가능했던 법과 질서를 유지하고 능률있게 통치 한다면 만인을 위해 보다 좋은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피력하고 일본의 조선 지배를 승인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은 조선에 대해 을사조약을 강요했으며, 미국은 이를 적극 지지했다.
<독립정신>은 이승만 대통령이 1899년 1월 9일 박영효 일파의 고종 폐위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한성감옥에 수감되었을 때 옥중에서 집필한 역사서이며 한국인 최초의 외교사 저술서이다. 이 책은 우리 대한 독립에 관계된 중요한 내용을 쓴 것이므로 이를 읽음으로써 독립이 무엇이며, 우리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그리고 당시 우리나라에 왜 독립정신이 필요했는지, 또 이후의 정세가 어떻게 변화될지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독립정신>은 20대 청년 우남 이승만이 옥중에서 집필한 그의 대표 저서로서, 5천년 동안 지속되어온 우리나라 왕정의 역사를 민주 공화정으로 탈바꿈시키고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을 제시한 책이다. 대한제국 시절 협성회 회보와 독립신문 주필, 교육계몽운동으로는 독립협회 활동 등을 하면서, 왕정 폐지와 공화국 수립을 도모하였다는 반역의 죄목으로 옥살이를 하였으며, 독립정신을 저술하였다.
"폴란드는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에 분할되어 망하였지만, 그 국민들이 마음속에 항상 조국을 잊지 않고 이를 회복하려 노력한다면 전과 같은 독립국이 될 수 있다."
을사조약 직전에 쓴 이 책에서 이승만은 폴란드의 사례를 들어 다가올 일본의 주권침략에 대한 우리 민족의 대응자세를 주문한다. 이 책의 핵심은 '독립정신 실천 6대 강령'에 요약되어 있다.
이승만 독립정신 실천 6대 강령
첫째, 우리는 세계에 대해 개방해야 한다.
둘째, 새로운 문물(文物)을 자신과 집안과 나라를 보전하는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셋째, 외교를 잘해야 한다.
넷째, 나라의 주권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다섯 째, 도덕적 의무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여섯 째, 자유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첫째, 우리는 세계에 개방하고 통상해야 한다
① 우리는 세계와 반드시 교류해야 한다. 서양의 새로운 문물을 우리 혼자 막아선 안된다.
② 통상은 서로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한다. 증기선, 열차, 전보, 우편 등 각종 교통 및 통신 수단을 발명한 서양의 기술들을 하루 속히 배워 우리도 시시각각으로 전국이 고르게 발전해야 한다. 이로써 모든 나라들을 이웃처럼 사귀면 공통의 이익을 누리게 된다.
③ 오늘날 통상은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기본이다. 일찍이 산업화에 눈을 떠 새 물건을 만들어 각국에 수출한 영국처럼 해야 한다. 오늘날 전쟁은 상권 쟁탈전이다. 국제 상업을 부국의 근본으로 삼아야한다.
④ 외국인들이 들어오는 것은 우리를 해치려는 게 아니라 서로에게 이익이 된다. 물품의 수입과 수출을 균형있게 해야 외국과 똑 같은 이익을 얻을 수 있다.
⑤ 외국인들을 무조건 원수 같이 여기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동학란이 청일전쟁을 일으켰듯이 백성이 어리석은 것은 나라를 멸망시키는 지름길이다.
둘째, 새로운 문물을 자신과 집안과 나라를 보전하는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① 외국인들과 함께 살면서 우리 것을 보전하면서 우리도 균등한 이익을 볼 수 있게 하자.
우리가 얕보던 일본인들에게 경제권을 모두 내주면 안된다. 경쟁해서 이겨야 한다. 외국인으로부터 무식하다는 말을 듣지 않으려면 우리도 문명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② 세계의 새로운 학문을 공부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이 국제법, 통상조약, 우리나라 역사와 자리에 대해 공부하고 실천해야 한다. 일본이 그동안 성공한 것은 지도층부터 개화하고 국민을 가르치고 인도한 덕분이다. 우리나라 지도층엔 기대할 수 없으니 백성이 공부하자.
③ 신학문을 익혀 외국인들에게 경제적 이익을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 농업을 연구하여 외국인들에게 황무지를 빼앗기지 말고 우리가 개간하고, 농사를 기계화하고, 상업과 광산학, 항해술, 전신과 우편, 어업, 산림벌채와 조림 등을 우리가 외국인들보다 잘해야 한다. 물품을 외국보다 값 싸게 잘 만들어 수출하고, 국민이 한마음으로 국산품을 산다면 부강해질 것이다.
④ 신학문의 혜택을 누려야 한다. 빨리 외국어를 공부하여 번역서만 읽지 말고 우리 글로 책을 많이 내야 한다. 그러려면 외국 유학을 많이 가야한다. 공부가 잘살기 위한 투자이다. 우리 나라가 자립하려는 의지를 자꾸 키워야 한다.
셋째, 외교가 나라를 유지하는데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① 외교가 없다면 나라는 고립되며 다른 나라의 침략을 받기 쉽다. 국제법을 잘 지켜야 다른 나라로부터 대접도 잘 받는다. 특히 강대국 사이에서 약한 나라가 국가보존을 위해서는 외교가 너무나 중요하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이런 사실을 몰라서 큰 불행을 당하였다.
② 다른 나라와 친밀한 관계를 가지려면 모든 나라를 공평하에 대해야 한다.오직 원칙과 법을 기준으로 공평한 외교를 해야하며, 문명국가의 도덕적 원칙이 중요하다.
③ 외국과 우방이 되려면 그 나라들과 공통된 특성을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 진정한 친구, 진정한 우방이 되려면 문화를 공유하고 법과 정치, 학문과 도덕이 무엇인지 본받을 것은 본받아 실행하면 자연스레 긴밀해지고 우리를 도와주러 올 것이다.
④ 진실을 외교의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외국과 협상함에 있어 권모술수를 부리면 당장은 이긴 것 같지만 큰 손해가 된다. 국가망신은 물론이고 망국의 원인까지 될 것이다.
⑤ 국내 외국인들의 잘못은 시시비비를 분명하게 가려야 한다. 나 혼자 살기 위해 외국인의 잘못된 일에 굴복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침략당하는 문을 열어주는 것이 된다.
넷째, 나라의 주권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① 외국인에 치외법권 허용은 수치로 알고 회복해야 한다. 그러려면 우리나라도 비인도적인 형벌등을 폐지, 법치주의를 도입하여 외국법과 같도록 빨리 고쳐야 한다.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려면 인도적 사업을 많이 하고 우리의 수준높은 문화를 널리 알려야 한다.
② 자신의 직분을 다한 후에야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수 있다.
③ 외국인의 조롱거리가 되는 일은 모두 고쳐 업신여김을 받지 않도록 해야한다.
④ 국기를 존중하는 것을 배워야한다. 국기도 모르고 나라의 주권도 모르고 침해하는 사람이 있으면 원수로 여겨야 한다.
⑤ 어떤 일이 있어도 외국 국적을 갖지 말아야 한다.
⑥ 우리나라는 외국 빚을 빌리는 것을 삼가야 한다. 강한 나라는 항상 돈을 빌려주고 그것을 빙자하여 내정간섭을 하므로, 주권을 잃게 되는 지름길이다.
다섯째, 도덕적 의무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① 뜻이 같은 사람끼리 감정을 표현해서 뭉쳐야 한다. 기회주의자나 중상모략자, 나라를 팔아먹는 자는 어떤 이유로든 용납해선 안된다. 선악을 분명이 구분하여 정의사회를 만들자.
② 우리는 공적(公的) 의무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나라를 위한 일을 할때는 부모형제 간의 천륜이라도 내던질 줄 알아야 하며, 임금이 백성을 해치고 영토를 팔아넘기고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데도 임금이라 하여 그에 따르는 것은 나라를 위한 것이 아니다.
③ 나라에 충성함에는 용기를 가지고 행동해야 한다. 나라가 곤경에 처했을 때가 큰 공로를 세울 수 있는 기회이다. 역사상 유명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이 그렇다. 지금 우리나라도 그런 때이므로 어찌 일신이나 가족을 걱정하고 있을 수 있겠는가.
여섯째, 자유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① 자유를 자기 목숨처럼 여기며 남에게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② 다른 사람의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 지금까지 내려온 온작 억압하는 폐습을 버리고 아랫사람과 천민들을 자유롭게 하여 법 앞에서 평등하게 하여 자유롭게 공부하여 성공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놔야 한다. 그렇게 되면 나라 전체에 활력이 생기고 부유해지고 강력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야말로 독립된 나라를 세우는 근본이 되는 것이다.
"나라를 한 번 잃으면 다시 찾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우리 국민들은 잘 알아야 한다."
"두 번 다시 종의 멍에를 메지 말아야 한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유언으로 남긴 것으로 알려진 한 마디.
러일전쟁이 발발했던 1904년 2월 한성감옥서(漢城監獄署)에서 집필을 시작 하여 1910년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순한글로 초판된 『독립졍신』은 저자인 우남 이승만(雩南 李承晩, 1875-1965)에 대한 정치적 논쟁에 가려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다.
이승만은 24세이던 1899년 1월 9일 전제군주정의 개혁을 통해 독립을 보전하려는 정치활동을 벌이던 중 일본에 있던 박영효의 정계복귀를 도모하다가 투옥되었다. 수감 직후 옥중동지 최정식, 서상대, 주시경을 통해 전해진 권총을 들고 탈옥을 시도했다가 1899년 7월 11일 평리원 재판에서 곤장 1백대와 무기징역에 처해졌다.
안중근이나 김윤식과 같은 당대의 지식인들은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것을 기뻐했는데, 이승만은 이 책에서 “일인과 아인이 하는 일이 다 한가지”라고 보면서 승세를 잡은 일본 정부와 백성의 생각을 분석했다.
3.1절에 읽어야 할 책 - 이승만의 옥중저서 [독립정신] 세계사적 의미
대한제국 시절 우남 이승만 박사
이승만은 일찌감치 개화사상을 받아들여 아펜젤러의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1897년 배재대학부(Pai Chai College)를 졸업했다.
대한제국 시절 협성회 회보와 독립신문 주필, 교육계몽운동으로는 독립협회 활동 등을 하면서, 왕정 폐지와 공화국 수립을 도모하였다는 반역의 죄목으로 옥살이를 하였으며, 독립정신을 저술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한성 임시정부와 각지에서 수립된 임시정부의 수반을 거쳐 1919년 9월 11일부터 1925년 3월 23일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역임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 국무위원회 외교위원 등을 역임했다. 주로 미국에서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을 벌였다.
일제 강점기 중반에는 미국 및 스위스 등을 무대로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한편 일본내막기를 저술하는 등 일본의 미국 침략을 경고하였으며 태평양 전쟁 이후 미군 OSS와 임시정부 간의 연결을 주선하였다. 대한민국의 독립을 공약한 1943. 11. 27. 카이로 선언의 배경에는 이승만의 집요한 외교노력이 있었고 그 결실이었다.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미국 체신청에서 발행한 태극기 모양 우표 발행에 크게 기여했으며, 항일 단파 라디오 방송 연설 등에도 참여하였다. 1945년 해방 후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에 추대되었으나, 귀국 후 거절하였다.
초등학교 의무교육 도입으로 문맹률을 획기적으로 낮춘 점. 국민 학교 의무 교육제도 실시. 전국 만 7세 아동의 95.3%가 초등학교에 입학. 전문적 인재 육성을 위해 한국외국어대학교, 인하대학교, 배재대학교 등 많은 대학교를 세움. 그 결과 문맹률은 22%로 떨어짐.
지주가 독식하고 있었던 서민은 소작농에 불과했던 한국의 토지개혁. 1950년 3월에 농지개혁법을 단행하여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있던 지주제를 혁파하고 농민들의 불만을 해소하는데 성공한다. 이 농민 불만 해소야말로 6.25전쟁 초반의 패전을 극복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원인
이승만은 재임기간 12년동안 미국으로부터 일본과 수교를 맺으라는 수 많은 협박과 회유가 있었지만, 일본과의 수교조건으로 대마도 반환, 식민지보상 36억불 청구 등 사실상 일본이 받아 들일 수 없는 요구를 함으로써 그는 끝끝내 일본과의 수교를 거부했다.
UTC+9'를 표준시로 삼은 건 1912년 1월부터인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나라는 해방 뒤인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이 일제 잔재 청산을 명분으로 동경 127도30분으로 바꿨다. 그러나 1961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 쿠데타 뒤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국제관례를 이유로 시간대를 돌이켰다. 실제 6·25 전쟁 직후 이승만 정부에선 30분 차이가 나는 표준시를 썼다. 동경 127도 30분 표준자오선에 따른 결정으로, 현재 북한의 것과 같다.
한국의 서울 및 수도권을 기준으로 볼 때 경도는 동경 `126도 5분~127도 5분` 사이에 위치하는데 중간값 127도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경도 1도당 4분 정도의 시차가 있으므로 토쿄 시간과는 약 32분의 차이가 있다. 그러다 1961년 박정희가 다시 동경 135도를 기준으로 삼는 법안을 만들어 오늘에까지 이르렀다. 왜 일본 식민 사상에 젖어 살아가고 있는건가? 말로는 친일청산 이라고 할뿐. 생활과 표준은 일본 기준에 맞춰 살고 있는것인가.
이승만 정부의 농지 개혁은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형태의 토지 개혁으로 이 과정에서 토지 가격은 폭락하고, 지주들에게 땅을 매입하고 나중에 토지의 값을 지불하겠다는 유가증권을 주었는데, 이 유가증권은 6.25 전쟁 등을 거쳐서 완전히 휴지조각이 되어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지주들의 몰락과 농민층 분해, 근대적 자본가의 성장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이승만 정권의 교육정책 중 가장 핵심은 국민학교의 무상 의무화이다. 1948년 제헌헌법 제16조에서 “모든 국민은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 적어도 초등교육은 의무적이며 무상으로 한다.”고 하여 국민학교의 무상의무화를 규정하였다.
대한민국이 출범하던 1948년에 문맹률은 80%에 이르렀다. 이승만은 1949년에 모든 어린이가 6년제 초등교육을 무상으로 받도록 하는 의무교육제를 도입했다. 결과 문맹자 수는 1959년에 와서 22.1%로 낮아졌다.
한편 6년 의무교육제 도입과 더불어 각 급 학교를 증설하는 것과 아울러, 일제의 식민지정책에 따라 제한되어 있던 고등교육 기회를 부활시켜 전 국민의 교육수준을 향상시켰다. 국민 학교 의무 교육제도를 실시하였고, 전쟁으로 잠깐 계획에 차질이 있었지만 1954년부터 본격적으로 재개하여 1959년에는 전국 만 7세 아동의 95.3%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또한 1951년 3월, 전쟁 중이었지만 종래의 6년제 중학을 3년제 중학교와 3년제 고등학교, 두 과정으로 분리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전문적 인재 육성을 위해 한국외국어대학교, 인하대학교, 배재대학교 등 많은 대학교를 세우는 데 투자했다. 그 결과 문맹률은 22%로 떨어졌고, 학교 수와 학생 수는 3~11배 이상으로 크게 늘었다. 특히 1956년부터 시행된 미네소타 계획은 서울대학교의 많은 교수들에게 미국 유학 기회를 주었다. 그들은 나중에 한국 과학기술계를 이끌 중심 세력으로 떠올랐다.
1952년 1월 18일 독도를 포함한 '이승만 라인' 설치, 독도 표지석, 독도 등대
1952년 1월 18일 독도를 포함한 '이승만 라인' 설치하였다. 1954년 1월18일 이승만은 독도 한국령 표지석을 건립 하었다. 1954년 8월10일 무인도 독도에 등대불이 켜졌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4년 8월10일 '깜짝 이벤트‘를 벌였다. 미리 독도에 등대를 세워놓고 미국 방문 일정에 맞춰 전세계를 향해 등대 점등식을 열었던 것이다. 일본과 미국이 깜짝 놀란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대한민국 국토의 동쪽 끝 땅임을 알리는 독도 등대불! 일본에 남의 땅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 등불이었다.
이승만은 지주 철폐, 교육 진흥, 제도 신설 등 지금 우리가 디디고 서 있는 바탕이 이승만의 손에서 나왔다. 원자력발전조차 그에 의해 첫발을 내디뎠다. 또한 1948년, 노동자의 권리 등에 대한 별다른 법령이 없던 우리나라에 노동관계 법률이 제정되었다. 헌법 제17조는 “모든 국민은 근로의 권리와 의무를 가진다.”, “여자와 소년의 근로는 특별한 보호를 받는다.”는 조항이 규정되었고 제18조에는 “근로자의 단결, 단체교섭과 단체행동의 자유는 법률의 범위 내에서 보장된다.”고 규정되어 노동자의 사측에 대한 단체 행동이 법률 내에서 허가되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이 노동관계법은 곧 발발하는 한국전쟁 때문에 시행되지는 못하였다. 현재 노동법의 근본이
이승만의 손에서 나왔다.
이승만 동상은 지난 1987년 2월 당시 배재대 졸업 동문들이 기증해 세웠다. 많은 철거 논란이 있었지만 배재대학교 측은 대학총동창회, 총학생회와 함께 지난 2008년 6월 5일 우남관 앞에 다시 동상을 세웠다.
국익을 위한 환율 정책
1950년대 한국은 전쟁의 파괴로부터 경제를 복구를 하고 국민의 의식주 기초 생활을 위한 물자 수입을 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였다. 하지만 한국은 외환 부족 상태에 있었고 부족한 외환을 주로 원조 자금, 유엔군 지출 경비 등으로 충당하였다.
이승만 정부는 복수환율제를 운용하였는데 외화를 최대한 끌어오는데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협정 환율은 미국으로부터 받는 무상 원조 물자 판매 가격을 가급적 낮게 책정해 민간기업의 재건 활동을 지원했다. 그리고 수출 시장에서는 협정 환율보다 높은 시장 환율의 영향을 받게 했는데, 민간 부문의 수출 활동을 억제하지 않기 위한 일종의 수출지원정책이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미국에서 받은 원조는 최대한 값싸게 민간 부문에 판매하고 수출은 상대적으로 고환율의 영향을 받도록 해서 수출로 벌어 들이는 외화를 극대화하려는 조치였다. 미국이 이에 대해서 끊임 없이 이 복수환율제, 저환율정책에 대한 시정을 요구했지만 이승만은 이를 거부하고 이 때문에 1950년대 후반 한미관계가 갈등에 놓이기도 했다.
다만 이승만 정부의 공정 환율과 시장 환율 등, 복잡한 환율 제도와 관련해 외환프리미엄이라는 경제적 지대가 창출됐는데, 이 때문에 많은 자본가들은 국가가 보유한 외환을 배정 받기 위해 애썼다. (1951년 11월 공정 환율과 시장 환율의 비율은 3.03에 이르렀다.)
‘한국의 MIT’를 목표로 '인하공과대학' 설립.
이승만은 미국의 MIT를 모방한 최고수준의 공과대학을 세우려고 했다. 그것은 한국인들이 전통적으로 문과를 강조해오던 전통을 바꾸어 공업을 발전시켜 보려는 야심찬 의지에서 나온 것이었다.
6 · 25 전쟁 중인 1952년에 하와이 교민들은 하와이 ‘한인기독학원’ 부지를 판 돈의 일부를 이승만에게 보내왔다. 그 학교는 독립운동 시기에 이승만이 세운 것이었다.
학교 이름을 인하(仁荷)로 한 것은 1903년 최초의 하와이 이민을 떠난 인천과 그들이 정착해서 돈을 보낸 하와이에서 한 글자씩 고른 것이었다.
국제관계 전문가를 양성하기 위해 '한국외국어대학' 설립
이승만 대통령은 해외로 진출할 국제관계 전문가를 양성하기 위해
정부 보조로 외국어대학을 세울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정부의 자금 부족으로 실업가 김흥배에 의해
한국외국어대학이 설립되었다.
그 과정에서 이승만은 백두진 총리와 영어학자인 박술음 사회부장관을 통해
행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도록 지시했다.
한국 지방자치 시작 이승만
우리나라 대부분의 일반인들은 1950년 대 그것도 전쟁 중인 1952년에 지방자치가 처음으로 실시 된지 잘 모른다. 1948년 첫 헌법을 제정할 때부터 지방자치를 규정 하였고, 이를 구체화한 『지방자치법』을 1949년 7월 4일 제정하였다. 해방 후 미군정에서도 명목상 지방자치와 비슷핫 제도를 시행하려 했지만 미군정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부를 원했기에 제대로 실시하지 않았다. 이승만 정권 시대에 와서야 지방자치가 실시된다. 이승만은 1949년 12월 한 번도 시행되지 않은 지방자치법을 개정, 국내적 불안정을 이유로 지방자치의 실시보류로 인한 지방행정의 공백에 대응하였다.
이승만은 지방자치제를 도입하여 한국의 풀뿌리 민주주의를 성장시켰다. 이승만이 도입한 지방자치제는 박정희의 쿠데타 이후 폐지되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당시 단식투쟁을 불사하며 "지방자치제는 민주주의를 위해 꼭 필요했다"고 호소했다. 거의 30년이나 지나서야 노태우 정권에서 다시 부활했다.
이 세상에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백 사람이 있다면
그중에 한 사람은 나입니다
이 세상에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열 사람이 있다면
그중에 한 사람은 나입니다
이 세상에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한 사람밖에 없다면
그 한 사람은 나입니다
이 세상에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면
그건 내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입니다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대통령의 부인인 프란체스카 여사 글
#프란체스카 도너(Francesca Donnere, 1900∼1992)인데 오스트리아 출생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젊은 시절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만나 결혼하게 되고 조국광복 이후, 귀국하여 이승만을 도와 대통령이 되게 했으며 평생 한국인으로 살았던 분입니다.
#한복을 즐겨 입었으며 평소 근검절약하는 생활로 올이 터진 스타킹을 신고 몽당연필을 깎아서 사용한 일화는 눈물겹기까지 합니다.
프런체스카 도너 (ft 이부란, 이금순)
한국 호적상 기재된 이름은 '푸랜시스카 또나'이고, 스스로 '푸랜시스카'라는 한글 표기를 썼으며, 한국명은 이부란이다. 귀화 후에는 남편이 지어준 '이부란(李富蘭)'이라는 이름도 썼다. 다른 하나는 이금순이다. 우연히 만난 오스트리아인이 "당신은 오스트리아 사람인가요?"라고 묻자 "난 한국 사람입니다. 우연히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났을 뿐"이라고 대답한 일화가 있다고 하며 다른 일화로는 서양인이면서도 한복을 무척 사랑했다고 한다. 문서에 있는 사진도 한복을 입고 찍은 것이다.
프란체스카 여사가 한복을 처음 입어 본 것은 신혼시절인 1935년이었다. 독립운동을 하던 이승만 박사와 25년의 나이차를 극복하고 결혼한 이듬해, 미국 순회도중 윤치영(훗날 초대 내무부장관)부인으로부터 한복을 선물로 받았다. 그대 한복의 아름다음에 매료된뒤 거의 평생 '한복패션'을 즐겼다.
이승만 대통령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
그녀는 12년 동안 남편의 독립 운동을 돕고, 12년 동안 영부인으로 살았으며, 22년 동안 남편 없는 땅에서 살다간 파란 눈의 이방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쪽을 찌고, 한복을 입고, 한국 음식만 먹고, 조금이라도 낭비하는 것이 보이면 국민들이 낸 세금이라며 절약하고 또 절약하라고 당부한 한국인보다 더 한국적인 사람이었다.
프란체스카 vs 김정숙, 대한민국 영부인의 패션, 극과 극
https://www.youtube.com/watch?v=L11y4q6ng9c
"나라를 한번 잃으면 다시 찾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우리 국민들은 잘 알아야 하며. 경제에서나 국방에서나 굳건히 서서 두번 다시 종의 멍에를 메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내가 우리 국민들에게 주는 유언이다." -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유언으로 남긴 것으로 알려진 한 마디. |
역사학자 토인비는 말했다. "역사는 어느 집단의 힘으로 변화되는 게 아니다. 그 집단을 이끄는 창조적 천재의 능력만이 새로운 역사의 발전을 창조해왔다"
......
이승만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후 행적은 논란이 될만한 건 부정할수 없지만, 대한제국 시절의 행위는 이게 팩트이다. 이승만은 두개의 얼굴을 가진 야누스를 닮은 거인으로 비쳐지고 있다. 한민족의 독립과 번영의 기초를 다진 국부로 추앙 받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 지나친 친미, 종미주의 경향과 한번도의 통일을 저해하고 민주주의를 압살시킨 시대착오적 독재자로 매도당하고 있다.
1885. 08. 03 배재학당 (Pai Chai Academy, 培材學堂) 창립
(설립자 아펜젤러 H. G. Appenzeller)
1886. 04 .01 초대학당장 아펜젤러 취임
1886. 06. 08 고종황제로부터 '배재학당' 현판 하사
1895. 09. 01 배재대학부 (Pai Chai College)
(영문학과, 국한문학과, 신학과)
1896. 04. 07 배재학당내에서 「독립신문」발간(서재필)
1896. 11. 30 배재협성회(학생회) 조직(지도 서재필)
1925. 09. 17 조선총독부에 의해 배재학당 교명 폐지
1937. 03. 03 배재중학교(5년)로 개칭
1951. 08. 21 배재중학교(3년) 및 배재고등학교(3년)로 개편
1955. 04. 26 대전보육학원 설립 (설립자 허길래, Clara Howard)
1981. 03. 01 개교 배재대학
1992. 03. 13 배재대학교 (Pai Chai University)
... College에서 University 되는데 97년의 시간이 필요
[팩트체크] 배재학당(Pai Chai Academy) → 배재대학부(Pai Chai College) → 배재고등학당 → 배재중학교 → 배재고등학교 → 배재대학교(Pai Chai University)
1885년 배재학당 (Pai Chai Academy, 培材學堂)
1885년 8월 3일, 미국의 감리교 선교사인 헨리 아펜젤러가 서울에 세운 한국 최초의 근대식 중등교육기관이며 배재중학교, 배재고등학교, 배재대학교의 전신이다. PAICHAI ACADEMY 번역이 배재학당 이고 대학이라는 제도가 우리나라에 만들어지지 않았을 때라 학당이라고 한 것이다.
1895년 배재대학부 (Pai Chai College)
1885년 헨리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을 모체로 하여 1895년 배재대학부(Pai Chai College)를 설립하였다. 배재학당은 예비과정(preparatory dept.), 교양과정(academic dept.), 대학과정(college dept.)으로 나뉘어진 각 과정마다 교과과정에도 반영되어 기본 교과목으로 영어, 한문, 언문, 문법 등이 개설되었다. 1895년 영문과 106명, 국한문과 60명, 신학과 6명의 입학으로 정규 대학과정이 시작되었다.
아펜젤러는 “통역관을 양성하거나 우리 학교의 일꾼을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 교육을 받은 사람을 내보내려는 것이다”라고 설립목적을 밝혔고, ‘욕위대자 당위인역(欲爲大者當爲人役)’이라는 학당훈(訓)을 내걸었다. 그리스도교인과 국가 인재양성을 위하여 일반 학과를 가르치는 외에, 연설회·토론회 등을 열고 사상과 체육 훈련에 힘을 쏟았다. 당시 배재학당에 설치되었던 인쇄부는 한국의 현대식 인쇄 시설의 효시이다.
대한제국에서 배재학당을 지원한 이유는 독립협회와 신진 세력양성기관으로 고종이 지원하였으며 고종페위사건당시 이승만은 배배학당 학생을 동원하여 이를 저지하고 왕실과 자주독립을 위해 노력한바 커
학교운영자금을 지원해 주었다
그리고 1992년 배재대학교 (Pai Chai University)
양자 역학의 역설 '슈뢰딩거의 고양이'의 역설과 배재대학교 기원
양자 역학에서는 관찰 대상의 본질을 규정할 수 없다고 한다. 관찰자의 생각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관찰자가 어떤 생각에 의해, 어떤 관찰 프레임으로 관찰하느냐에 따라 대상의 본질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나라가 바로 설려면 우선 국민의 뜻이 바로 서야한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말했다. "역사는 어느 집단의 힘으로 변화되는 게 아니다. 그 집단을 이끄는 창조적 천재의 능력만이 새로운 역사의 발전을 창조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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