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미국등 서양인들에게 동양은 단지 그들의 이용 도구로 인식될뿐이다.

ㅋㅌㅌ 2018. 10. 15. 16:10

 

 


1885. 08. 03     배재학당 (Pai Chai Academy, 培材學堂) 창립 (설립자 아펜젤러 H. G. Appenzeller)
1886. 04 .01     초대학당장 아펜젤러 취임
1886. 06. 08     고종황제로부터 '배재학당' 현판 하사
1895. 09. 01     배재대학부 (Pai Chai College) (영문학과, 국한문학과, 신학과)
1896. 04. 07      배재학당내에서 「독립신문」발간(서재필)
1896. 11. 30     배재협성회(학생회) 조직(지도 서재필)
1898.             아펜젤러 '서울대학교(Seoul University)' 설립 계획 
                   - 법과 400명, 문리과대학 1180명, 사범대학 1320명, 공과대학 1320명, 의과대학 400명.
1925. 09. 17     조선총독부에 의해 배재학당 교명 폐지
1937. 03. 03     배재중학교(5년)로 개칭 
1951. 08. 21     배재중학교(3년) 및 배재고등학교(3년)로 개편
1955. 04. 26     대전보육학원 설립 (설립자 허길래, Clara Howard)
1959. 11.         배재대학교 기공식 (의대 포함. 서울 성북구 하월곡동) - 4.19로 잠정중단
1992. 03. 13     배재대학교 (Pai Chai University)

배재대학부 역사

배재학당을 설립한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1858~1902)는 대한민국 근대사에서 최초를 만들어낸 선교사 중 한 명이다. 아펜젤러는 국내 최초의 서양식 사립학교이자 감리회 종립학교인 배재학당을 설립하였다. 배재학당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남자교복을 입었다. 이 교복을 입고 처음으로 수학여행도 갔다. 또 학칙이 처음 생겨난 곳도 배재학당이다. 고종은 학교 이름을 培材學堂(유능한 인재를 기르고 배우는 집) 이라 짖고 현판을 하사하였다.

 

배재학당의 교사인 한문학자 조성규 선생님이 아펜젤러 목사님과 의논하고, 성경 말씀 중에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라는 말씀을 한문으로 번역하였습니다. 그것이 "欲爲大者 當爲人役(욕위대자당위인역)" 이었습니다.

 

아펜젤러는 배재학당에 대학부를 설치하고, 실제로 Paichai college로 표시하였다. 

 

그러던 와중에 배재학당(그당시는 배재중학교/배재고등보통학교)이 항일운동에 앞장섰다는 이유로 배재중학교로 강등되었다. 다시 말해 대학부는 맥이 끊겼다. 이때의 배재중학교가 지금의 배재중/고등학교로 바뀌었지만, 대학부는 그저 부활만을 바라야 했다.

 

광복 이후에 배재학당 동문들이 배재대학교를 서울에 세우려고 하였지만 순탄치 못하였다. 서울 성북구 하월곡동에 대학 부지까지 마련했지만 여러 가지 문제 때문에 대학설립이 계속 늦춰졌다. 1950년대 후반에 드디어 기공식을 했건만, 자랑스런 동문 이승만이 하야해야 했던 4.19혁명 때문에 또 무산되었다. 이러한 문제가 해결될 즈음에는 수도권정비계획법 때문에 서울에 대학을 세울 수 없었다.

박정희 정권 시절 강력한 수도권 팽창 억제정책이 시행되면서 서울지역에는 신규 대학의 설립은 물론 기존대학의 정원증가도 허가하지 않았다. 인서울 막차는 찬 한성대는 한성여고 교사로 사용하고 있는 7층 건물이 개교당시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대학 건물로 사용했던 유일한 건물이었다. 오히려 그 시절은 지금의 한성대 부지에 한성여중, 한성여고가 있었다. 배재대학교는 서울에 대학 설립 논의가 꽤 오랫동안 오고 갔으나 시기를 놓쳐서 결국 인서울이 아닌 대전에 대학을 설립하게 되었다. 배재대학교는 배재학당 대학부와 대전초급보육대학의 역사를 모두 가지고 있는 셈이다.

대학교별 옛날 이름
서울대학교경성제국대학교 
연세대학교연희전문학교 
고려대학교보성전문학교 
한양대학교 동아공과대학,건국기술학교 
성균관대학교 성균관 
중앙대학교 중앙유치원 
이화여대 이화여전
경희대학교 신흥무관학교 
시립대학교 서울 농업대학
한국외대 동양대학
건국대학교 조선정치학관
동국대학교 불교사범학교, 혜화전문학교
홍익대학교 수도공과대학
세종대학교 경성인문중등학원
서경대학교 국제대학
숭실대학교 숭전대
배재대학교  배재학당, 배재대학부
1885. 08. 03 배재학당 (Pai Chai Academy, 培材學堂) 창립
1895. 09. 01 배재대학부 (Pai Chai College) (영문학과, 국한문학과, 신학과)

시간의 끝은 그 한계성을 가지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연속해서 흐르며 한계가 없는 시간은 멈출 수 없는 무한한 그 무언가 인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시간은 한계성을 지니지는 않지만 시간의 흐름이라는 연속성 안에서 존재하는 대부분의 모든 것들은 한계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은 시간과 같은 연속성을 지닐 수도 없으며 일정하지는 않지만 확실하게 한계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시간의 소비는 누구도 선택 할 수 없는 것이다. 넓은 범위에서 보자면 살아있는 생명체는 모두 강제적 시간 소비를 강요받고 있다. 오늘의 시간을 내일에 사용하기 위해 저장하거나 멈출 수 없으며 내일의 시간을 부족한 오늘의 시간을 늘리기 위기 위해 끌어다 사용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시간의 연속성은 누구에게나 다가올 시간의 한계가 오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
공간이 시간을 기억한다 
공간은 시간을 기억하며 시간은 공간을 기억한다.
... College에서 University 되는데 97년의 시간이 필요

[팩트체크] 배재학당(Pai Chai Academy) → 배재대학부(Pai Chai College) → 배재고등학당 → 배재중학교 → 배재고등학교 → 배재대학교(Pai Chai University)

1885년 배재학당 (Pai Chai Academy, 培材學堂)

1885년 8월 3일, 미국의 감리교 선교사인 헨리 아펜젤러가 서울에 세운 한국 최초의 근대식 중등교육기관이며 배재중학교, 배재고등학교, 배재대학교의 전신이다. PAICHAI ACADEMY 번역이 배재학당 이고 대학이라는 제도가 우리나라에 만들어지지 않았을 때라 학당이라고 한 것이다.
1895년 배재대학부 (Pai Chai College)

 

1885년 헨리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을 모체로 하여 1895년 배재대학부(Pai Chai College)를 설립하였다. 배재학당은 예비과정(preparatory dept.), 교양과정(academic dept.), 대학과정(college dept.)으로 나뉘어진 각 과정마다 교과과정에도 반영되어 기본 교과목으로 영어, 한문, 언문, 문법 등이 개설되었다. 1895년 영문과 106명, 국한문과 60명, 신학과 6명의 입학으로 정규 대학과정이 시작되었다.

아펜젤러는 “통역관을 양성하거나 우리 학교의 일꾼을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 교육을 받은 사람을 내보내려는 것이다”라고 설립목적을 밝혔고, ‘욕위대자 당위인역(欲爲大者當爲人役)’이라는 학당훈(訓)을 내걸었다. 그리스도교인과 국가 인재양성을 위하여 일반 학과를 가르치는 외에, 연설회·토론회 등을 열고 사상과 체육 훈련에 힘을 쏟았다. 당시 배재학당에 설치되었던 인쇄부는 한국의 현대식 인쇄 시설의 효시이다. 

대한제국에서 배재학당을 지원한 이유는 독립협회와 신진 세력양성기관으로 고종이 지원하였으며 고종페위사건당시 이승만은 배배학당 학생을 동원하여 이를 저지하고 왕실과 자주독립을 위해 노력한바 커 학교운영자금을 지원해 주었다

그리고 1992년 배재대학교 (Pai Chai University)

 

 

 

 

자랑스러운 배재인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한글학자 주시경,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 개화기 지식인 서재필, 윤치호, 김지호, 의학자이자 사회사업가 오긍선, 민족 시인 김소월 소설가 나도향, 여윤형(자퇴)

 

이승만 배재대학부(Pai Chai College) 영어학부에서 영어를 전공했고, 은사 서재필을 통해 서양 문명을 접했다. 배재학당에서 1학기를 마친 후엔 ‘영어 조교’로 특채됐다. 배재대학부 영문학과 학력을 인정받아 1905년 2월 워싱턴 DC의 조지워싱턴 대학(George Washington University)에 2학년 장학생으로 편입하였다. 

 

지청천 광복군 총사령관, 1888 - 1957 . 독립운동가, 정치가

 1888년1월 5일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1906년 배재학당 졸업 1908년 정부유학생으로 일본 육군중앙유년학교를 졸업, 1913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보병중위로 있다가 1919년 만주로 망명하였다. 

 

신흥무관학교 교성대장이 되어 독립군 간부양성에 진력하였으며, 1920년 서로군정서가 조직되자 그 간부에 취임하였다. 청산리전투 후 일본군의 대대적인 보복을 피하여 신흥무관학교를 폐쇄, 병력을 이끌고 간도 안도현 밀림으로 이동하였다. 서일, 김좌진 장군 등과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고, 여단장으로 있다가 만주를 벗어나 헤이룽장성 자유시에 집결하였다. 흑하사변으로 러시아혁명군의 포로가 되었으나 만주로 탈출하였다. 1925년 양기탁, 오동진 등과 정의부를 조직, 군사위원장겸 사령장이 되고, 그해 군민의회가 설치되자 군무위원에 선출되었다. 1930년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여, 군사위원장이 되었으며, 별도로 한국독립군을 만들어 총사령관이 되고, 1932년 동아혈성동맹의 간부로서 각지의 항일단체를 규합하는 데 힘썼다. 1933년 치치하얼에 잠입하여 항일지하운동을 지휘, 한ㆍ중연합군의 총참모장이 되었으나, 중국공산당의 압력을 받아 무장해제당한 후 그 해 재만독립군을 산하이관으로 이동시키고뤄양 군관학교에 한국인특별반을 설치하여 그 총책임자가 되었다. 1940년 충칭으로 옮긴 임시정부의 광복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항일전을 수행하였다. 

 

1945년 광복 후 귀국, 대동청년단을 창설하였다. 1947년 제헌국회의원, 정부수립 후 초대 무임소장관을 역임하고, 제2대 국회의원, 민주국민당 최고위원을 지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2018년은 572돌을 맞는 한글날이다. 

1. 훈민정음 만든건 해례본 만든 집현전 학자가 아닌 세종대왕.

2. 훈민정음 한글이라 이름 지은건 배재학당 주시경. 

3. 초등학교 의무교육 도입으로 인해 일반적 보편적으로 시민들의 실생활로 한글을 이끌어낸 이승만 배재학당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4. 국내 기관, 대학중 최다의 해외 세종학당 관리와 운영 그리고 해외 세종학당이 사용하는 한글 교재를 발행하고 있는 한글의 세계화를 책임지는 배재대학교.

 

#사형수 출신 이승만 해외 독립운동 주도  

KBS 한국사전 – 이승만 제1부 / KBS 2008.8.30. 방송 

https://www.youtube.com/watch?v=SqMOfDesFXQ 

 

 

 

북한이 매일 미사일 쏘고, 핵 쏘고 하더니.. 결국 우리땅이었던 간도를 정복하러 중국 공격하러 가는구나. ㅎㅎ  

심상치않은 압록강 상황 

https://www.youtube.com/watch?v=8W0Cl849dZw 

 

 

 

 

아펜젤러 기념관 (feat 배재대학교)

 

배재대학교라는 이름은 고종 황제가 하사한 배재학당에서 유래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중등 교육기관인 배재학당은 1885년 3월 미국 감리교 선교회 선교사였던 아펜젤러(H.G. Appenzeller)가 설립하였으며, 초대 학당장인 설립자 아펜젤러이다. 

 

1885년 3월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 목사가 처음에는 2명의 학생을 가르쳤으나 이듬해 20명으로 늘어났다. 그러자 조선의 황제 고종은 '배재학당(培材學堂)'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1895년 영문학과, 국한문학과, 신학과로 구성된 배재대학부(Pai Chai College)를 설치하였다. 이듬해 서재필이 지도하는 학생회인 배재협성회가 조직되었다. 1896년 배재학당 내에서 <독립신문>을 발간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조선 그리스도인> 회보를 창간하였다. 

 

 

 

 

배재학당, 설립자 아펜젤러 선교사 탄생 160주년 맞아

 

배재대에 따르면, 학교법인 배재학당 내 아펜젤러기념사업회가 지난 25일 서울 정동 배재학당역사박물관 앞에서 ‘아펜젤러 동상 제막식 및 감사예배’를 거행했으며, 26일 학술포럼이 진행된다.

 

이번 동상 제막식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교육기관 배재학당 설립자 헨리 G. 아펜젤러(1858년 2월 6일~1902년 6월 11일) 선교사 탄생 16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마련됐다.

 

 

 

 

 

 

 

 

 

 

 

 

이승만은 배재학당 배재대학부(Pai Chai College) 영어학부에서 영어를 전공했고, 은사 서재필을 통해 서양 문명을 접했다. 배재대학부(Pai Chai College)에서 1학기를 마친 후엔 ‘영어 조교’로 특채됐다.  

 

대한제국 시절 우남 이승만 박사

 

이승만은 일찌감치 개화사상을 받아들여 아펜젤러의 배재학당에 입학하였다.

 

대한제국 시절 협성회 회보와 독립신문 주필, 교육계몽운동으로는 독립협회 활동 등을 하면서, 왕정 폐지와 공화국 수립을 도모하였다는 반역의 죄목으로 옥살이를 하였으며, 독립정신을 저술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한성 임시정부와 각지에서 수립된 임시정부의 수반을 거쳐 1919년 9월 11일부터 1925년 3월 23일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역임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 국무위원회 외교위원 등을 역임했다. 주로 미국에서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을 벌였다.

 

일제 강점기 중반에는 미국 및 스위스 등을 무대로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한편 일본내막기를 저술하는 등 일본의 미국 침략을 경고하였으며 태평양 전쟁 이후 미군 OSS와 임시정부 간의 연결을 주선하였다. 대한민국의 독립을 공약한 1943. 11. 27. 카이로 선언의 배경에는 이승만의 집요한 외교노력이 있었고 그 결실이었다.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미국 체신청에서 발행한 태극기 모양 우표 발행에 크게 기여했으며, 항일 단파 라디오 방송 연설 등에도 참여하였다. 1945년 해방 후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에 추대되었으나, 귀국 후 거절하였다.

 

우리나라의 국기 제정은 1882년(고종 19년) 5월 22일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 조인식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이승만 정부가 수립되면서 태극기의 제작법을 통일할 필요성이 커짐에 따라, 정부는 1949년 1월「국기시정위원회」를 구성하여 그 해 10월 15일에「국기제작법 고시」를 확정·발표하였다.

 

초등학교 의무교육 도입으로 문맹률을 획기적으로 낮춘 점. 국민 학교 의무 교육제도 실시. 전국 만 7세 아동의 95.3%가 초등학교에 입학. 전문적 인재 육성을 위해 한국외국어대학교, 인하대학교, 배재대학교 등 많은 대학교를 세움. 그 결과 문맹률은 22%로 떨어짐.

 

지주가 독식하고 있었던 서민은 소작농에 불과했던 한국의 토지개혁. 1950년 3월에 농지개혁법을 단행하여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있던 지주제를 혁파하고 농민들의 불만을 해소하는데 성공한다. 이 농민 불만 해소야말로 6.25전쟁 초반의 패전을 극복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원인

 

이승만은 재임기간 12년동안 미국으로부터 일본과 수교를 맺으라는 수 많은 협박과 회유가 있었지만, 일본과의 수교조건으로 대마도 반환, 식민지보상 36억불 청구 등 사실상 일본이 받아 들일 수 없는 요구를 함으로써 그는 끝끝내 일본과의 수교를 거부했다.

 

UTC+9'를 표준시로 삼은 건 1912년 1월부터인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나라는 해방 뒤인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이 일제 잔재 청산을 명분으로 동경 127도30분으로 바꿨다. 그러나 1961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 쿠데타 뒤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국제관례를 이유로 시간대를 돌이켰다. 실제 6·25 전쟁 직후 이승만 정부에선 30분 차이가 나는 표준시를 썼다. 동경 127도 30분 표준자오선에 따른 결정으로, 현재 북한의 것과 같다.

 

한국의 서울 및 수도권을 기준으로 볼 때 경도는 동경 `126도 5분~127도 5분` 사이에 위치하는데 중간값 127도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경도 1도당 4분 정도의 시차가 있으므로 토쿄 시간과는 약 32분의 차이가 있다. 그러다 1961년 박정희가 다시 동경 135도를 기준으로 삼는 법안을 만들어 오늘에까지 이르렀다. 왜 일본 식민 사상에 젖어 살아가고 있는건가? 말로는 친일청산 이라고 할뿐. 생활과 표준은 일본 기준에 맞춰 살고 있는것인가.

 

이승만 정부의 농지 개혁은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형태의 토지 개혁으로 이 과정에서 토지 가격은 폭락하고, 지주들에게 땅을 매입하고 나중에 토지의 값을 지불하겠다는 유가증권을 주었는데, 이 유가증권은 6.25 전쟁 등을 거쳐서 완전히 휴지조각이 되어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지주들의 몰락과 농민층 분해, 근대적 자본가의 성장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한편 6년 의무교육제 도입과 더불어 각 급 학교를 증설하는 것과 아울러, 일제의 식민지정책에 따라 제한되어 있던 고등교육 기회를 부활시켜 전 국민의 교육수준을 향상시켰다. 국민 학교 의무 교육제도를 실시하였고, 전쟁으로 잠깐 계획에 차질이 있었지만 1954년부터 본격적으로 재개하여 1959년에는 전국 만 7세 아동의 95.3%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문적 인재 육성을 위해 한국외국어대학교, 인하대학교, 배재대학교 등 많은 대학교를 세우는 데 투자했다. 그 결과 문맹률은 22%로 떨어졌고, 학교 수와 학생 수는 3~11배 이상으로 크게 늘었다. 특히 1956년부터 시행된 미네소타 계획은 서울대학교의 많은 교수들에게 미국 유학 기회를 주었다. 그들은 나중에 한국 과학기술계를 이끌 중심 세력으로 떠올랐다.

 
1952년 1월 18일 독도를 포함한 '이승만 라인' 설치하였다. 1954년 1월18일 이승만은 독도 한국령 표지석을 건립 하었다. 1954년 8월10일 무인도 독도에 등대불이 켜졌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4년 8월10일 '깜짝 이벤트‘를 벌였다. 미리 독도에 등대를 세워놓고 미국 방문 일정에 맞춰 전세계를 향해 등대 점등식을 열었던 것이다. 일본과 미국이 깜짝 놀란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대한민국 국토의 동쪽 끝 땅임을 알리는 독도 등대불! 일본에 남의 땅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 등불이었다.
 

대한민국이 출범하던 1948년에 문맹률은 80%에 이르렀다. 이승만은 1949년에 모든 어린이가 6년제 초등교육을 무상으로 받도록 하는 의무교육제를 도입했다. 결과 문맹자 수는 1959년에 와서 22.1%로 낮아졌다.

 

‘한국의 MIT’를 목표로 '인하공과대학' 설립.

 

이승만은 미국의 MIT를 모방한 최고수준의 공과대학을 세우려고 했다. 그것은 한국인들이 전통적으로 문과를 강조해오던 전통을 바꾸어 공업을 발전시켜 보려는 야심찬 의지에서 나온 것이었다. 

6 · 25 전쟁 중인 1952년에 하와이 교민들은 하와이 ‘한인기독학원’ 부지를 판 돈의 일부를 이승만에게 보내왔다. 그 학교는 독립운동 시기에 이승만이 세운 것이었다. 학교 이름을 인하(仁荷)로 한 것은 1903년 최초의 하와이 이민을 떠난 인천과 그들이 정착해서 돈을 보낸 하와이에서 한 글자씩 고른 것이었다.

 

국제관계 전문가를 양성하기 위해 '한국외국어대학' 설립

이승만 대통령은 해외로 진출할 국제관계 전문가를 양성하기 위해 정부 보조로 외국어대학을 세울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정부의 자금 부족으로 실업가 김흥배에 의해 한국외국어대학이 설립되었다.

그 과정에서 이승만은 백두진 총리와 영어학자인 박술음 사회부장관을 통해 행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도록 지시했다.

 

한국 지방자치 시작 이승만
우리나라 대부분의 일반인들은 1950년 대 그것도 전쟁 중인 1952년에 지방자치가 처음으로 실시 된지 잘 모른다. 1948년 첫 헌법을 제정할 때부터 지방자치를 규정 하였고, 이를 구체화한 『지방자치법』을 1949년 7월 4일 제정하였다. 해방 후 미군정에서도 명목상 지방자치와 비슷핫 제도를 시행하려 했지만 미군정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부를 원했기에 제대로 실시하지 않았다. 이승만 정권 시대에 와서야 지방자치가 실시된다. 이승만은 1949년 12월 한 번도 시행되지 않은 지방자치법을 개정, 국내적 불안정을 이유로 지방자치의 실시보류로 인한 지방행정의 공백에 대응하였다.

이승만은 지방자치제를 도입하여 한국의 풀뿌리 민주주의를 성장시켰다. 이승만이 도입한 지방자치제는 박정희의 쿠데타 이후 폐지되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당시 단식투쟁을 불사하며 "지방자치제는 민주주의를 위해 꼭 필요했다"고 호소했다. 거의 30년이나 지나서야 노태우 정권에서 다시 부활했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후 행적은 논란이 될만한 건 부정할수 없지만, 대한제국 시절의 행위는 이게 팩트이다. 이승만은 두개의 얼굴을 가진 야누스를 닮은 거인으로 비쳐지고 있다. 한민족의 독립과 번영의 기초를 다진 국부로 추앙 받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 지나친 친미, 종미주의 경향과 한번도의 통일을 저해하고 민주주의를 압살시킨 시대착오적 독재자로 매도당하고 있다.

 

배재대학부 1회 졸업생인 이승만 동상은 지난 1987년 2월 당시 배재대 졸업 동문들이 기증해 세웠다. 많은 철거 논란이 있었지만 배재대학교 측은 대학총동창회, 총학생회와 함께 지난 2008년 6월 5일 우남관 앞에 다시 동상을 세웠다.

 

 

 

 

 

 

 

 

https://www.youtube.com/watch?v=h0MnvPDtt5c&t=155s

외국인들은 욱일기를 알까?/ Do foreigners know the Rising Sun flag? [Loving korea]

 

 

 

https://www.youtube.com/watch?v=zZOSRyKcbg8&t=309s

미국인들은 왜 '욱일기'를 좋아할까?

 

 

https://www.youtube.com/watch?v=j3v3EplO-LM

 

서양애들이 욱일기 문제에 무심한 이유 #욱일기 #역사

 

미국등 서양인들에게 동양은 단지 그들의 이용 도구로 인식될뿐이다.

 

일본에서 독립한 한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에게 재임기간 12년동안 미국으로부터 일본과 수교를 맺으라는 수 많은 협박과 회유가 있었다. 

 

미국은 한국을 해방시키는데 중요한 역활을 했지만 친일파란 '악의 씨'를 보호하고 육섬함으로써 대한민국 근대사에 뼈아픈 역사를 남겼다. 1945년 9월 상륙한 미 점령군은 한국인들은 적으로, 재한 일본인들은 친구로 비쳐졌다. 조선 총독부 기구는 미군정 기구가 되었다. 일제에 부역한 친일 민족반역자들은 유임되었고 곧 승진했다. 특히 해방지 되자 두려워 피신했었던 경찰을 다시 불러 불러들인 것은 한국인을 분노케 했다. 해방은 해방이 아니었다. 

 

미국이 한국인 의사와는 반대로 친일파를 관리자로 유임시킨 것은 친일파에 대한 한국인의 감정과 한국의 현실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미 군정이 조직저긍로 잘 훈련된 친일 경찰을 중시한 이유는 경찰 책임자 마글린 대려의 다음과 같은 발언에 드러나 있다. "그들이 일본인을 위해서 훌륭한 업무를 수행했다면 우리를 위해서도 그럴 수 있으리라고 생각 합니다."

 

남조선 과도 입법의원에서 미군정과 극우 세력의 반대를 무릅쓰고 1947년 7월 '민족반역자 부일 협력자 간상배에 대한 특별법'이 통과 되자 미군정은 이것을 공포할 것을 거부했다. 미국은 제헌 국회에서 친일파를 처단하려는 것에 대해서도 곱지 않은 시선으로 지켜봤다. 미국은 이승만에게 친일파를 관리로 등용할 것은 꾸준히 요구하였다. 

 

또한 이승만은 일본과의 수교조건으로 대마도 반환,  식민지보상 36억불 청구 등 사실상 일본이 받아 들일 수 없는 요구를 함으로써그는 끝끝내 일본과의 수교를 거부했다

 

.... 보다시피 미국은 한국은 동아시아 진출을 위한 작은 도구로 인식할뿐이다. 일본 식민지때 당한 아픔과 고통에 대해서는 그 어떤 관심과 아픔이 없다. 언제까지 미국의이용도구로 전락할 것인가. 정확한 사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92년 4월 29일 LA폭동이 시작됐죠. 흑인이 백인 경찰의 구타로 청각장애인이 된 로드니 킹 사건으로 민심이 폭발하던 중, 미국 언론이 갑자기 1991년 3월 16일 15세 흑인 소녀를 강도로 오인한 한인마켓 주인 두순자가 우발적으로 총을 쏴 살해한 사건을 크게 조명하면서 흑인들의 분노는 한인을 향했습니다. 이로 인해 한인 상점 2,300여곳이 파괴됐고, 피해액은 3억 5,000만 달러(약 4,112억 원)에 달했는데요. 당시 경찰은 할리우드 등 백인들이 주로 사는 지역만 보호하고 한인타운 치안에는 손을 놓고 있었는데요. 한인들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무장하고 옥상 위로 나서면서 ‘루프 코리안(Roof Korean)’이라는 단어가 생기기도 했죠.

 

나라가 바로 설려면 우선 국민의 뜻이 바로 서야한다.

 

 

 
이승만 동상은 지난 1987년 2월 당시 배재대 졸업 동문들이 기증해 세웠다. 많은 철거 논란이 있었지만 배재대학교 측은 대학총동창회, 총학생회와 함께 지난 2008년 6월 5일 우남관 앞에 다시 동상을 세웠다. 이승만이 조지워싱턴대를 3학년에 편입한 것은 ‘배재대학’ 2년 학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 학교측에서 세운것도 아니고 배재대 졸업생 동문들이 세운 이승만 동상을 니들이 왈가불가 왜 시비거는 거냐고. 배재대 학생들끼리 훼손하고 철거하고 다시 세우고 하는건 다양한 의견을 가진 재학생들의 의견 개진 과정이니 이해 하겠는데.. 일부 시민단체등 왜 다른 집안의 사람들이 간섭질인거지. 남의 집에 걸려있는 초상화 걸어라 마라 지적질 해대는 모습이 한심해 보인다. 
 

 

 

 

 

하워드기념관 (feat 배재대학교)

 

1902년 6월 설립자 아펜젤러가 순직한 후인 1909년 배재고등학당을 인가 받았으며, 3년후인 1912년 연희전문의 전선인 기독교연합대학을 배재학당 내에 설립하였다. 1916년 기독교연합대학은 YMCA로 이전하였으며, 배재고등보통학교 설립인가를 받았다. 1925년 초선총독부에 의해 '배재학당'이란 학교 이름은 폐지되었으며, 이후 1937년 배재중학교(6년)로 개칭되었다. 1955년 4월 설립자 허길래(Clara Howard)에 의해 대전보육학원이 개교하였으며, 1956 1월 배재대학 설립 기성회가 창립했다. 같은해 5월 대전보육학원이 대전보육초급대학으로 인가 받았다. 

 

 

 

 

 

1958년 재단법인 배재학당이 인가를 받았으며 이듬해 서울 하월곡동에서 배재대학 기공식을 열었으나 건물을 짓던중 4.19혁명으로 무산 되었다. 1965ㄴ녀 4월 학교법인 대전보육학원이 인가를 받았다. 1971년 12월 대전보육초급대학이 대전여자초급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1977년 10월 학교법인 배재학당과 대전보육학원이 합병하였으며, 이듬해 대전여자초급대학은 배재실업전문대학으로 학교 이름을 바꾸었다. 

 

1985년 배재학당 창립 100주년 기념식을 가졌다. 1989년 백산관, 1990년 소월관, 1991년 김옥균관, 서재필관을 잇달아 준공했다. 1992년 종합대학교인 배재대학교로 승격되었으며, 1993년 2월 주시경 기념도서관을 준공했다. 2005년 예술관, 국제교류관을 준공하고, 중앙도서관 족보자료실을 개관햇다. 2010년 아펜젤러기념관 하워드기념관을 준공했다. 2012년 4월 한류문화산업대학원을 신설했다. 

 

현재 하워드대학(글로벌언어문화, 글로벌언어비지니스, 복지힐링, 교육 계열), 서재필대학(경영, 사회 계열),아펜젤러대학(바이오, IT융복합계열, 나노공학, 보건의료 계열), 김소월대학(관광,문화창조융합 계열), 주시경대학(기초교양교육부, 창업취업교육부, 융복합학부, 교직부)등 5개 단과대학, 일반대학원, 교육대학원, 특수대학원(국제통상대학원, 법무행정대학원, 관광축제호텔대학원, 한류문화산업대학원, 민족공동체지도자과정)으로 구성돼 있다. 

 

 

 

 

 

배재대학교는 ‘크고자 하거든 남을 섬기라’는 설립이념을 극대화하고 지역중심의 학부교육 특성화대학으로 발돋움하기 위해 ‘나섬 1885’ 발전전략을 추진해 나가고 있다. 배재가 추구하는 인재상은 나눔과 섬김을 실천하는 ‘청년 아펜젤러’이다. '크고자 하거든 남을 섬기라' 교휸은 사회, 단체, 기업등에서 인간 관계에서 안정성(stability)과 유연성(flexibility)를 확보할수 있는 서번트 리더십에 필요한 마음가짐이기도 하다. 

 

실천하는 청년 아펜젤러는 새로움에 도전하고, 불가능에 물러서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며, 긍정적이고 미래지향적으로 행동하는 실천적 지성인! 이자, 전인적 감성인! 이며, 창의적 개척자! 이다. 또한 대학 교양교육 벤치마킹 모델된 배재대 "나섬페스티벌" 운영중에 있다. 주시경교양대학이 대학자율역량강화지원사업(ACE+) 일환으로 5대 필수역량(인성·감성·지성·소통·수행)을 강화를 위한 교육을 전개하고 있다. 한편 배재대는 교양교육 중점사항으로 '안항(雁行)교육'도 운영하고 있다. 안항교육은 배재학당 설립자인 아펜젤러 선교사 정신을 이어받아 소수학생(다문화배경 학습자, 외국인 유학생, 장애학생 등)을 배려하는 맞춤형 및 튜터제 활용 사회통합교육이다. 

 

 

 

 

 

 

 

 

 

 

 

 

 

 

 

 

 

 

 

 

 

또한 배재대는 인성은 실천이다 이란 테마 아래 교과서는 책, 수업은 독서(읽기) △문화속으로 들어간 수업(문화예술) △나눔과 섬김의 기본! 봉사(봉사) △체험을 통한 교육(체험) 등 4개 분야 인증제 통한 종합 교양인 양성하고 있다. 이는 타대학의 벤치마킹 모델이 되고 있다. 

 

배재대학교는 현재 해외 40개 나라의 243개 대학 및 기관과 자매결연을 맺고 활발하게 교류활동을 전개하고 있으며 교환학생, 해외언어연수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또한 세계 75개 국가에서 온 유학 온 730여 명의 외국인 학생이 함께 공부하고 있다.

 

 

 

 

 

 

 

 

 

 

 

 

 

 

 

 

 

 

 

 

 

 

 

 

 

 

 

 

 

 

 

 

 

 

 

 

 

 

 

 

 

 

 

 

 

 

새로움에 도전하고,

불가능에 물러서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며,

긍정적이고 미래지향적으로 행동하는

실천적 배재대학교를 응원합니다.

 

.배재대학부→배재고등학당→배재중학교→배재고등학교→배재대학교

.배재대학부(Pai Chai College) → 배재고등학당 → 배재중학교 → 배재고등학교 → 배재대학교(Pai Chai University)

.흔하디 흔한 133년 전통과 역사에 빛나는 배재학당이 경영하는 배재대학교 품위.

.최고(最古) 대학에서 최고(最高) 대학으로

 

배재는 배양영재(培養英材)의 줄임말로 ‘유용한 인재를 기르고 배우는 집’이란 뜻을 담고 있으며, 배재대는 설립 당시부터 대학(PAI CHAI COLLEGE)으로 출발했다. 설립 초기부터 개방화된 전통을 이어받아 배재대는 해외 40개 나라의 243개 대학 및 기관과 자매결연을 맺고 활발하게 교류활동을 전개하고 있으며 교환학생, 해외언어연수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또한 세계 75개 국가에서 온 유학 온 730여 명의 외국인 학생이 함께 공부하고 있다.

 

1885년 8월 3일, 미국의 감리교 선교사인 헨리 아펜젤러가 배재학당을 설립했다. 고종황제는 1887년 ‘유용한 인재를 기르고 배우는 집’이라는 뜻으로 배재학당(培材學堂)이란 이름을 하사하였다. 1885년 헨리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을 모체로 하여 1895년 배재대학부(Pai Chai College)를 설립하였다. 같은 해 영문과 106명, 국한문과 60명, 신학과 6명의 입학으로 정규 대학과정이 시작되었다.

 

... 그리고 133년 전통과 역사에 빛나는 배재대학교(Pai Chai University)

 

 

 

 

 

 

 

 

 

 

 

 

이승만은 1897년 배재대학부(Pai Chai College)를 졸업하였다. 1897년에 졸업했으나 이 졸업장은 1912년 11월에 발행된 명예졸업장이다.

[vs] 

1951. 08. 21 배재중학교(3년) 및 배재고등학교(3년)로 개편. 

 

이승만은 배재대학부(Pai Chai College) 1897년 졸업생이다. 이승만은 1897년에 졸업했으나 이 졸업장은 1912년 11월에 발행된 명예졸업장이다. 미국 유학으로 뒤늦게 받은 명예 졸업장이다. 최초 발견자가 'PAI CHAI HIGH SCHOOL' 도장을 마구 찍어 버렸군. 당시에는 있지도 않던 배재고등학교 도장이 왜 찍혀 있냐고.. 배재학당.. 역사 기록물 똑바로 관리 안할래! 아오...ㅡㅡ

 

 

 

 

 

 

이승만대통령 화진포 기념관

주소: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이승만별장길 33 

관람시간: 오전 9시~오후 5시20분(11월~2월 겨울철은 오후 4시50분까지)

전화: 고성군청 (033-680-3361~3)

 

입장료: 1,500~2,000원

 

2007년 개관한 강원도 고성군 

이승만별장 뒤에 새로 지어진 기념관으로 이승만대통령의 업적 등 일대기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친필휘호, 의복과 소품, 관련도서 등이 현대적으로 전시되어있다. 이승만별장은 이와는 좀 다르게 졍겹게 꾸며져있다. 침실과 거실, 집무실, 평소에 끼던 안경과 여권, 편지 등 유품이 흥미롭게 진열되어 있다.

 

이승만 배재대학부 명예졸업장. 

이승만은 1897년에 졸업했으나 이 졸업장은 1912년 11월에 발행된 명예졸업장이다. 미국 유학으로 뒤늦게 받은 명예 졸업장이다. 

그리고 

이승만 워싱톤대 졸업장

이승만 하버드대 졸업장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돕던 교포분께서 보관했다가 전달해 드렸다고 합니다.

 

이승만은 배재대학부(Pai Chai College) 졸업생이다. 1885년 헨리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을 모체로 하여 1895년 배재대학부(Pai Chai College)를 설립하였다. 이승만은 1897년에 졸업하였다.

 

이승만은 배재학당 대학부 영어학부에서 영어를 전공했고, 은사 서재필을 통해 서양 문명을 접했다. 배재학당에서 1학기를 마친 후엔 ‘영어 조교’로 특채됐다. 1885년 헨리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을 모체로 하여 1895년 배재대학부(Pai Chai College)를 설립하였다. 같은 해 영문과 106명, 국한문과 60명, 신학과 6명의 입학으로 정규 대학과정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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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 선교부의 학교 이름을 국왕으로부터 하사받았는데, 외무아문독판(外務衙門督辦, the President of the Foreign Office)을 통해 내개 전달되었다. 그것은 '배재학당 혹은 Hall for Rearing Useful Men'이다.… 오늘 외무부의 서기요 통역관인 김씨(Mr. Kim)가 커다란 한자로 쓰인 학교 이름을 가지고 왔다. 이것은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정부의 승인을 의미하는 것이고, 지금까지 우리가 가지지 못했던 한국인들 앞에서의 설 자리를 얻는 것이 된다. 이제 비록 국립학교는 아니지만, 사립학교가 아닌 공립학교가 된 것이다."

(1887년 2월 21일자 아펜젤러의 일기 中)

 

배재학당은 예비과정(preparatory dept.), 교양과정(academic dept.), 대학과정(college dept.)으로 나뉘어진 각 과정마다 교과과정에도 반영되어 기본 교과목으로 영어, 한문, 언문, 문법 등이 개설되었다. 

 

아펜젤러는 대학과정(college dept.)을 두기 시작했는데, 1889년경부터 구상하기 시작하여 배재학당에서 대학과정을 두었던 것은 흥미롭다. 1897년의 연례보고서에서 배재대학(Pai Chai College)이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배재학당에서 양육 받은 인재들은 한국의 근대화와 반침략·독립운동을 위해 헌신하는 인물들로 성장해 갔다. 정치인으로 이승만이 그랬고, 한글을 중흥시켜 민족의 문자로 만드는 데에 공헌한 주시경이 배재학당 출신이었으며, 한국의 NGO운동의 선각자라 할 신흥우가 그랬다. 근대과학과 기술 분야는 물론이고, 내년에 100주년을 맞는 미주이민의 지도자로서 활동한 인문들 중에도 아펜젤러의 후신들은 보이고 있다.

 

아펜젤러는 학생들을 통역관이나 교환수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개혁적인 교양인으로 양성하는 데 뜻을 두었다. 봉건적 사회질서에 순응하는 그런 인간이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현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소임을 다하는” 사람들로 양성하는 데 교육의 목적을 두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가 기대했던 교육은 통역관이나 교환수 등의 기능인을 양성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적인 시민(교양인)과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이 점은 아펜젤러 전기의 저자인 그리피스도 이미 지적한 바 있다. 

 

<참고문헌>

『아펜젤러-한국에 온 첫 선교사』, 연세대학교 출판부, 1985년

『 한국 초대교회 선교사 아펜젤러』,『기독교사상』1985년 4월호, pp.60~75

 

『아펜젤러의 선교활동』,『빛과소금』1985년 5월호, pp.228~237

 

 

 

 

 

 

 

 

 

 

 

 

 

 

 

 

 

1885. 08. 03 배재학당 (Pai Chai Academy培材學堂) 창립 (설립자 아펜젤러 H. G. Appenzeller) 

1886. 04 .01 초대학당장 아펜젤러 취임

1886. 06. 08 고종황제로부터 '배재학당' 현판 하사 

1895. 09. 01 배재대학부 (Pai Chai College) (영문학과, 국한문학과, 신학과)

1896. 04. 07     배재학당내에서 「독립신문」발간(서재필)

1896. 11. 30     배재협성회(학생회) 조직(지도 서재필)

1898.             아펜젤러 '서울대학교(Seoul University)' 설립 계획 - 법과 400명, 문리과대학 1180명, 사범대학 1320명, 공과대학 1320명, 의과대학 400명.

1925. 09. 17 조선총독부에 의해 배재학당 교명 폐지

1937. 03. 03 배재중학교(5년)로 개칭  

1951. 08. 21 배재중학교(3년) 및 배재고등학교(3년)로 개편

1955. 04. 26 대전보육학원 설립 (설립자 허길래, Clara Howard)

1959. 11.        배재대학교 기공식 (의대 포함. 서울 성북구 하월곡동) - 4.19로 잠정중단

1992. 03. 13 배재대학교 (Pai Chai University)

 

 

아펜젤러의 근대적인 시민(교양인)과 지도자를 양성하는 배재학당 대학과정(pai chai college dept.)의 교육이념의 가치는 배재대학교 청년아펜젤러봉사단, 주시경 교양대학 나섬페스티벌, 그리고 대전 서구 대학생연한 행복나눔봉사단 '어울림 한마당', 대전 대학생 연합 기획봉사단 '다원' 등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또한 배재대는 인성은 실천이다 이란 테마 아래 교과서는 책, 수업은 독서(읽기) △문화속으로 들어간 수업(문화예술) △나눔과 섬김의 기본! 봉사(봉사) △체험을 통한 교육(체험) 등 4개 분야 인증제 통한 종합 교양인 양성하고 있다. 이는 타대학의 벤치마킹 모델이 되고 있다.

 

아펜젤러는 봉건적인 사회질서에 순응하는 인간이 아닌, 개혁적인 교양인의 ‘근대적인 시민’과 ‘지도자’로 학생들을 양성하는 데에 뜻을 두었다. 그 뜻을 배재대학교가 충실이 이어가고 있다. 

 

아펜젤러는 대학과정(college dept.) 통해 봉건적인 사회질서에 순응하는 인간이 아닌, 개혁적인 교양인의 ‘근대적인 시민’과 ‘지도자’로 학생들을 양성하는 데에 뜻을 두었다. 그 뜻을 배재대학교가 충실이 이어가고 있다

 

조선총독부 해체 (이승만 ~ 김영삼)

조선 총독부 기구는 미군정 기구가 되었다. 일제에 부역한 친일 민족반역자들은 유임되었고 곧 승진했다. 특히 해방지 되자 두려워 피신했었던 경찰을 다시 불러 불러들인 것은 한국인을 분노케 했다. 해방은 해방이 아니었다. 

 

미군정은 38도선 이남의 일본군은 무장해제 시켰지만 일경으로 복무했던 조선인 경찰들은 거의 그대로 기용했으며 조선총독부 산하 관리들도 변함이 없었다,  군정 경찰은 경무국이라는 이름으로 1945년 10월 21일에 창설됐다. 1946년 11월 기준으로 상위 계급의 간부가 된 군정 경찰의 82%에 달하는 사람들이 친일 경력이 있었다.

 

미국이 한국인 의사와는 반대로 친일파를 관리자로 유임시킨 것은 친일파에 대한 한국인의 감정과 한국의 현실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미 군정이 조직저긍로 잘 훈련된 친일 경찰을 중시한 이유는 경찰 책임자 마글린 대려의 다음과 같은 발언에 드러나 있다. "그들이 일본인을 위해서 훌륭한 업무를 수행했다면 우리를 위해서도 그럴 수 있으리라고 생각 합니다."

 

남조선 과도 입법의원에서 미군정과 극우 세력의 반대를 무릅쓰고 1947년 7월 '민족반역자 부일 협력자 간상배에 대한 특별법'이 통과 되자 미군정은 이것을 공포할 것을 거부했다. 미국은 제헌 국회에서 친일파를 처단하려는 것에 대해서도 곱지 않은 시선으로 지켜봤다. 미국은 이승만에게 친일파를 관리로 등용할 것은 꾸준히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일본과의 수교조건으로 대마도 반환, 식민지보상 36억불 청구 등 사실상 일본이 받아 들일 수 없는 요구를 함으로써그는 끝끝내 일본과의 수교를 거부했다.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었다가 1995년에 일제 잔재의 청산과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우자는 일환으로 철거되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역사 바로세우기를 위해 조선총독부 건물을 해체하라고 지시하였고,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1995년 8월 15일 광복절에 중앙돔 해체를 시작으로 1996년 11월 13일에 모든 철거작업을 완료했다.

사실 6.25 전쟁이 끝나고 이승만 초대 대통령부터 노태우 대통령 시절까지 매번 대통령들이 조선총독부를 철거하려는 움직임은 있었다. 

35년간의 식민시대가 지나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부터 곧바로 치욕의 과거사를 대표하는 총독부 건물 철거를 둘러싼 찬반 논쟁이 시작되었다. 

이승만 전 대통령도 지나가면서 저 건물을 놔두어서 되느냐고 여러 차례 되내었다고 한다. 맨 처음에 해체가 논의된 것은 6.25 전쟁 중이었던 1.4 후퇴 이후에 막 서울을 수복한 직후. 이승만 대통령이 일제의 상징을 서울의 심장부에 둔다는 것이 말이 되냐면서 철거를 지시하면서였다.

당시 이 계획을 검토한 사람은 육군 공병감 엄홍섭과 육군 참모총장친일파 매국노 버저리 개색히 백선엽이었는데, 당시 공병대에서는 "이렇게 막대한 석재를 나를 장비를 도무지 못 구하겠다." 하고 난색을 표했고 백선엽도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미군에게 불도저 4대를 빌려오긴 했는데 중장비는 그게 고작이었고 기껏해야 지게꾼들이나 동원할 수 있었다. 해체할 능력은 아예 없고 폭파라도 시켜서 억지로 없앤다 해도 무거운 석재를 나를 능력은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핵심적 원인은 당시 대한민국의 국력으로는 철거할 능력이 없었다는 것. 당시는 모든 정부 재정과 수입 물자를 미국 원조에 의존할 때였다. 

백선엽은 1943년 2월 간도특설대의 일원으로서 압록강, 두만강 상류 일대에서 중국 항일 게릴라 토벌에 종사했다. 당시 중국 공산당이 주도한 항일 게릴라에는 중국인, 만주인과 함께 조선인도 포함돼 있었다.

백선엽, 일어 자서전에 조선인 토벌 고백
만주 군관학교를 나와 간도특설대에 배치
2009년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는 백 장군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했고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도 백 장군의 이름이 올라가 있다.
간도특설대는 항일 조직을 공격하기 위해 1938년 조선인 중심으로 조직해 1939년부터 본격적인 작전을 수행하였으며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존속한 800~900여 명 규모의 대대급 특수부대였다. 백 장군의 자서전에는 이 시가를 아예 다루지 않았으며 일본어로 출판한 자서전에만 간략하게 다뤘다.
백선엽은 간도특설대의 일원으로서 압록강, 두만강 상류 일대에서 중국 항일 게릴라 토벌에 종사했다. 당시 중국 공산당이 주도한 항일 게릴라에는 중국인, 만주인과 함께 조선인도 포함돼 있었다.
"우리가 전력을 다해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졌던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배반하고 오히려 게릴라와 함께 싸웠더라도 독립이 빨라졌다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조금 후회스럽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은 사실이었고 그 때문에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

...문재인 친일 매국노 백선엽 현충원 안장
...백선엽 장군 빈소에 조화 보냈던 문재인 대통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