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무장 독립운동의 구심점이었던 배재학당 지청천 장군

ㅋㅌㅌ 2018. 10. 21. 16:30

 

 

 

 

 

 

 

 

 

 

앞줄 가운데 지청천 장군 ( 출처: 국가보훈처 )

 

무장 독립운동의 구심점이었던 지청천 장군 (1888.2.15~1957.1.15)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으로 무장독립운동 전두지휘. 본명 지대형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매진했던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있었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으로서 독립운동 전체의 구심점이었다면, 지청천 장군은 무장투쟁의 구심점이었습니다.

 

지청천은 1906년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1908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교했다. 지청천은 일본으로 갔고 1914년에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이때 일본행을 택한 각오가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 병과는 보병이었고 일본군 육군 장교로 근무하던 중에 동기 김경천과 함께 1919년에 남만주 삼원보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이 되었다.

 

지청천 장군은 배재학당 배재대학부와 한국무관학교를 거쳐 일본에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 근대적인 군사지식을 습득한 군사인재였다. 3.1운동 발발 후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신흥무관학교의 교장으로 취임, 수많은 독립군을 양성하는 데 힘썼으며 이후 일제의 독립군 말살 정책이 시행되었을 때에는 서로군정서를 지휘하며 일군과의 교전 최전선에서 활동하였다. 

 

 

 

 

1920년 지청천은 상하이 임시정부에 합류했다가 곧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의 만주군정부로 건너갔다가 초빙을 받고 서로군정서 간부에 취임, 활동하였다. 1924년 조선의용군 총사령관에 선임돼 일제 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국내 진격작전을 벌였습니다. 서로군정서 등에서 근무하면서 1920년 북만주에서 청산리 전투 이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신흥무관학교를 폐쇄, 북만주로 이동하여 정의부와 혁신의회에 참여하였다.  

 

1930년에는 한국독립당을 조직, 산하 한국독립군 총사령관으로 ‘대전자령전투’ 등 큰 승리를 일궈냅니다. 그러나 청산리 대첩 이후 일본군의 한국인에 대한 대대적인 보복을 피하여 신흥무관학교를 폐교하고 병력을 간도로 이끌고 건너가, 서일, 홍범도, 김규식, 김좌진 등과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했다. 

 

1940년에 충칭으로 가, 임시정부 한국광복군 창설에 참여하여 광복군의 총사령관을 맡게 되면서, 명실공히 한국군을 대표하는 주역으로 활동하였다. 조선의용대 김원봉이 부사령관이었고 지청천은 총사령관이었다.

 

광복이 이뤄지자 1946년에 귀국해 광복군을 재건하려고 하였으나 미군정의 반대로 실패하고 우익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단을 세웠다. 남북협상에 반대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했다.

 

출처: 나무위키 지청천 

출처: http://mpva.tistory.com/1915 [국가보훈처 대표 블로그 - 훈터]

 

 

 

 

 

배재대 한국어문학과, 3.·1운동 100주년 상하이 방문

 

배재대학교는 이 대학 한국어문학과 학생들이 비교과 과목인 ‘배재 리더십’을 통해 중국 상하이에서 진행한 ‘3‧1운동 100주년 기념 콘텐츠 발굴 프로그램’을 지난 20일 ‘배재 리더십’ 강의에서 공유했다고 22일 밝혔다.

 

학생들은 이날 프로그램 공유에 앞서 지난달 25~28일 현지에서 홍구공원, 임시정부청사, 한국문화원 등 역사적 장소를 방문해 독립을 갈망한 선조들의 숨결을 되짚었다.

 

프로그램에 참여한 학생들은 “한국 역사를 제대로 알고 가르치는 한국어 선생님이 되고 싶어 현장을 찾았다”며 “윤봉길 의사의 의거현장을 바라보면서 지금 나라와 민족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다”는 후기를 털어놨다.

 

배재대 한국어문학과 학생들의 상하이 프로그램은 ‘배재대 자체특성화 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됐다. 배재대는 수년 전부터 자체특성화 사업을 진행해 대외 경쟁력이 높은 학과를 지원하고 있다.

 

배재대 한국어문학과 학생들의 상하이 프로그램은 ‘배재대 자체특성화 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됐다. 배재대는 수년 전부터 자체특성화 사업을 진행해 대외 경쟁력이 높은 학과를 지원하고 있다.

 

한편 한국어문학과는 한국어문학을 기반으로 인문실학 인재 양성을 추진하는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순항 중이다. 특히 미래 한국어 교원인 학생들의 역량 강화를 위해 매년 해외 프로그램 진행하고 있다.

 

한국어문학과 학생들은 지난해 일본, 라오스 등에서 한국어 보조교사로 활약하여 화제가 된 바 있다.

 

박석준 학과장은 “한류와 한국문화에 대한 세계인의 관심이 날로 높아지면서 국내외에서 한국어‧한국문화 교육 전문가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며 “특성화사업을 기반으로 전문성을 갖춘 한국어 교원 양성을 체계적으로 이뤄내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이 매일 미사일 쏘고, 핵 쏘고 하더니.. 결국 우리땅이었던 간도를 정복하러 중국 공격하러 가는구나. ㅎㅎ  

심상치않은 압록강 상황 

https://www.youtube.com/watch?v=8W0Cl849dZw 

 

 

 

 

나눔과 섬김의 배재리더십 

- 인성 감성 지성 소통 수행

 

 

창의적인 개척자 I am

첫 시간은 자아성찰 및 발견, 성장시키는 시간으로 영화감상과 심리검사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탐색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전인적 감성인

두번째 시간으로는 미술을 통해 타인을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첫시간에 자아를 발견했다면 이번엔 타인을 알아보는 시간이었습니다

타인을 발견하고 이해하기 위해선 자신의 감정을 내려놓고 그 사람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자신의 감정으로 타인을 인식하게 되면 온전히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는걸 알게 되었어요

 

실천적 지성인

마지막 날에는 공동체를 알아가고 리더십을 기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도미노게임을 통해 함께 하나의 목적을 달성하기위해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어요

조장, 연결부 담당, 쌓기 담당, 블럭 전달담당등 각자의 역할을 정해 서로를 도와주면서 제한시간동안 완벽하게 도미노를 쌓을 수 있었습니다

 

1. 교과서는 책, 수업은 독서

읽기인증제는 ‘빅 데이터와 세상읽기’ 등 72개 과목을 수강하는 학생 중 884명이 신청해 진행되고 있다. 학생들은 자신이 수강하고 있는 강좌에서 추천한 권장도서 10권 중 3권을 읽고 워크북을 작성하여 제출하게 된다. 또 독후감 UCC 만들기·포토 에세이·독서화 그리기 등 창작물 경연대회도 갖는다.

 

2. 문화속으로 들어간 수업

문화예술인증제는 ‘음악 어드벤처’ 등 10개 과목을 듣는 학생 162명이 수행하고 있다. 과목과 관련 있는 음악회 관람이나 시낭송회 등 문화예술 활동에 참여해 감상 품평회를 갖는다.

 

3. 나눔과 섬김의 기본! 봉사

봉사인증제는 ‘인성과 예(藝) 티켓’ 등 8개 과목을 수강하는 98명이 △사랑의 밥차 △누기길 봉사 △복지시설 환경미화 △사랑의 연탄배달 등 봉사활동에 3회 이상 참여하고 워크북을 작성하게 된다.

 

4. 체험을 통한 교육

체험인증제는 ‘리더십과 코칭스킬’ 등 12개 과목을 듣는 학생 304명이 △기업탐방 △채용박람회 참가 △모의면접 △아펜젤러 역사체험 등 다양한 체험활동을 전개한 후 워크북을 제출하게 된다.

 

 

세계로 나섬-글로벌 프론티어 연수단 발대식 (feat 배재대)

 

과정별 연수단은 1.교환학생(7개국) 2.도전 글로벌 배낭여행 3.중국 하얼빈 단기 연수 4.크로스 월드-크로스 컨트리 5.해외 장‧단기 언어연수 및 단기 인턴십 6.배재제언어봉사단 7.주시경교양대학 ‘인성로드’ 8.2018 나섬활동학기 ‘배재판 정글의 법칙’ 등이다. 교환학생 프로그램은 짧게 10여일, 길게 한 학기 동안 해외 자매대학에서 수학하면서 학점을 인정받는다. 가장 높은 인기를 구가하는 '도전 글로벌 배낭여행'은 면접과 프레젠테이션 심사를 뚫고 52명이 선발돼 미국 실리콘밸리, 스페인, 프랑스, 싱가포르 등으로 떠난다.

 

배재대학교 주시경교양대학이 대학자율역량강화지원사업(ACE+) 일환으로 5대 필수역량(인성·감성·지성·소통·수행)을 강화를 위한 교육을 전개하고 있다. 한편 배재대는 교양교육 중점사항으로 '안항(雁行)교육'도 운영하고 있다. 안항교육은 배재학당 설립자인 아펜젤러 선교사 정신을 이어받아 소수학생(다문화배경 학습자, 외국인 유학생, 장애학생 등)을 배려하는 맞춤형 및 튜터제 활용 사회통합교육이다.

 

 

 

 

 

 

 

 

다까기 마사오(박정희) 혈서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써 일사봉공(一死奉公 한번 죽음으로 황제에게 충성)을 위해 굳건한 결심입니다.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일본)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

 (다까기 마사오 (高木正雄, 박정희)1939년 3월 31일자 만주신문, 2009년 혈서 원본 확인)

 

박정희는 소학교 교사 하다가 늦은 나이에 만주군관학교 들어갈 자격을 상실한 나이였으니까 일왕에게 혈서를 쓰고 그 충성을 보였다는 이유로 일본 헌병학교에 들어간다. 그리고 만주에서 독립군을 토벌하며 지냈다.

 

.... 일본육군사관학교에서 배운 군사기술로 무장 독립운동 했던 배재대학부 지청천 장군. 

그리고 일본헌병 학교에서 배운 군사기술로 만주에서 독립군 때려잡는데 활용한 다까기 마사오 박정희.

 

 

 

 

 

 

 

 

 

 

 

 

 

 

 

판락, 노덕술, 김덕기, 김창용 이 네사람의 이름을 들어본적이 있는가?

하판락, 노덕술, 김덕기는 조선인 3대 악질 형사

 

하판락은 경남 진주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1936년도에 일제의 치하 아래 순경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단순하게 경찰로만 일했다면 언급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독립 운동가를 잡고, 고문하기로 유명한 '고등경찰'로 일했다. 그는 경남지역의 독립운동가를 색출하는 일을 맡았다. 그가 근무할 때 불리던 별명은 '고문귀' 였다. 그가 고문귀 이름을 날린 시초는 신사참배를 거부한 기독교 교인들을 잡아들이고 고문하기 시작했을 때부터였다.

 

노덕술도 마찬가지로 일제 치하 아래 고문으로 유명했던 경찰이었다. 그는 사법경찰로 경찰 일을 시작했다. 고등경찰도 아니었던 그가 독립운동가를 잡아다가 취조하고, 고문하는 것으로 유명해져 고등경찰이 되었다. 정말 악랄하기 그지없었다는 말이다. 노덕술은 고문의 신기원을 이루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혁조회 사건을 취조하며 혀를 빼는 고문과 머리카락을 잡아 뽑는 고문을 자행했다. 노덕술은 일제에 적극적으로 부역하며 부를 쌓았다. 해방되었을 때 그의 재산은 현재가치로 100억쯤 되었다고 한다. 그 부를 어떻게 쌓았을지는 뻔하다.

 

이 두 명의 공통점은 반민특위에 의해 잡혔다가 풀려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제가 끝이 나도 그들의 권력은 무너지지 않고 건재했다는 것이다. 미군정의 재등용 정책으로 관직을 이어갔다.

 

김덕기 또한 친일 경찰이었다. 1913년에 일제 경찰 일을 시작했다. 그에게 잡힌 독립운동, 반일 인사가 1000명을 넘었다고 한다. 체포된 인사 중에 안창호 선생, 조봉암 선생, 박헌영 선생 등이 있었다. 김덕기 때문에 독립운동에 큰 타격을 입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독립 운동가가 그의 손에 잡혔다.

 

김창용은 군인으로서 적극적으로 일제에 부역했다. 1941년에 일제 군인으로 만주에서 활동했다. 항일 단체를 감시하고, 43년도에서 45년도까지 50여개의 친일 단체를 검거했다. 해방되고 반공을 등에 업고 승승장구하게 된다.

 

이 글을 쓰면서 어릴 적에 본 야인시대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김두한과 끊임없이 대결 구도를 펼치던 일본 경찰인 미와 경부가 독립되자 권총으로 만세를 외치고 자살을 하는 장면이었다. 자살이라는 충격적인 행위도 기억에 남는데 한몫했지만, 일본 순사가 독립을 맞자 죽음을 맞는다는 정의로운 구도 때문에 자극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달콤한 드라마의 한 장면일 뿐이었다. 현실은 광복을 맞은 대한민국에 친일파 청산은 없었고, 단죄보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더욱더 권세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http://m.mc-plus.net/news/articleView.html?idxno=6129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joonho1202&logNo=221627767330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joonho1202&logNo=221580720615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haru8283&logNo=221521005480

 

 

 

 

 

 

 

사진 SBS 녹두꽃

[팩트체크] 

일본 순사가 독립을 맞자 죽음을 맞는다는 정의로운 구도 때문에 자극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달콤한 드라마의 한 장면일 뿐이었다.

현실은 광복을 맞은 대한민국에 친일파 청산은 없었고, 단죄보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더욱더 권세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미국 대통령 임기는 4년이고 중임은 가능

해리 S. 트루먼(1945~1953),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1953~1961)

 

1. 미군정의 친일파 매국노 재등용 정책으로 관직을 이어갔다. (ft 판락, 노덕술)

2. 이승만은 재임기간 12년동안 미국으로부터 일본과 수교를 맺으라는 수 많은 협박과 회유가 있었지만, 일본과의 수교조건으로 대마도 반환,  식민지보상 36억불 청구 등 사실상 일본이 받아 들일 수 없는 요구를 함으로써 그는 끝끝내 일본과의 수교를 거부했다

 

... 어차피 미국은 한국의 일본 식민지 상황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단지 미국의 아시아 진출에만 관심 있을뿐. 이는 오바마 대통령의 한국 정책 집행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트럼프도 마찬가지고... 미국에게 한국은 단지 아시아 진출의 도구일뿐이다. '미군정의 재등용 정책'으로 인해 악질 친일파 매국노가 재등용 되는 사태가 발생했는데 그걸 이승만 타령 해대며 나라안 자기 식구들끼리 서로 손가락질 해대며 싸움질 해대는 모습이 측은해 보이기까지 한다.

 

미국등 서양인들에게 동양은 단지 그들의 이용 도구로 인식될뿐이다.

 

일본에서 독립한 한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에게 재임기간 12년동안 미국으로부터 일본과 수교를 맺으라는 수 많은 협박과 회유가 있었다. 

 

미국은 한국을 해방시키는데 중요한 역활을 했지만 친일파란 '악의 씨'를 보호하고 육섬함으로써 대한민국 근대사에 뼈아픈 역사를 남겼다. 1945년 9월 상륙한 미 점령군은 한국인들은 적으로, 재한 일본인들은 친구로 비쳐졌다. 조선 총독부 기구는 미군정 기구가 되었다. 일제에 부역한 친일 민족반역자들은 유임되었고 곧 승진했다. 특히 해방지 되자 두려워 피신했었던 경찰을 다시 불러 불러들인 것은 한국인을 분노케 했다. 해방은 해방이 아니었다. 

 

미국이 한국인 의사와는 반대로 친일파를 관리자로 유임시킨 것은 친일파에 대한 한국인의 감정과 한국의 현실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미 군정이 조직적으 잘 훈련된 친일 경찰을 중시한 이유는 경찰 책임자 마글린 대려의 다음과 같은 발언에 드러나 있다. "그들이 일본인을 위해서 훌륭한 업무를 수행했다면 우리를 위해서도 그럴 수 있으리라고 생각 합니다."

 

남조선 과도 입법의원에서 미군정과 극우 세력의 반대를 무릅쓰고 1947년 7월 '민족반역자 부일 협력자 간상배에 대한 특별법'이 통과 되자 미군정은 이것을 공포할 것을 거부했다. 미국은 제헌 국회에서 친일파를 처단하려는 것에 대해서도 곱지 않은 시선으로 지켜봤다. 미국은 이승만에게 친일파를 관리로 등용할 것은 꾸준히 요구하였다. 

 

또한 이승만은 일본과의 수교조건으로 대마도 반환,  식민지보상 36억불 청구 등 사실상 일본이 받아 들일 수 없는 요구를 함으로써그는 끝끝내 일본과의 수교를 거부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0MnvPDtt5c&t=155s

외국인들은 욱일기를 알까?/ Do foreigners know the Rising Sun flag? [Loving korea]

 

https://www.youtube.com/watch?v=zZOSRyKcbg8&t=309s

미국인들은 왜 '욱일기'를 좋아할까?

 

https://www.youtube.com/watch?v=j3v3EplO-LM

서양애들이 욱일기 문제에 무심한 이유 #욱일기 #역사

 

미국등 서양인들에게 동양은 단지 그들의 이용 도구로 인식될뿐이다.

이승만은 1차-북한, 2차-일본을 이용해 미국을 효율적 도구로 삼을줄 알았다. 

 

일본에서 독립한 한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에게 재임기간 12년동안 미국으로부터 일본과 수교를 맺으라는 수 많은 협박과 회유가 있었다. 

 

미국은 한국을 해방시키는데 중요한 역활을 했지만 친일파란 '악의 씨'를 보호하고 육섬함으로써 대한민국 근대사에 뼈아픈 역사를 남겼다. 1945년 9월 상륙한 미 점령군은 한국인들은 적으로, 재한 일본인들은 친구로 비쳐졌다. 조선 총독부 기구는 미군정 기구가 되었다. 일제에 부역한 친일 민족반역자들은 유임되었고 곧 승진했다. 특히 해방지 되자 두려워 피신했었던 경찰을 다시 불러 불러들인 것은 한국인을 분노케 했다. 해방은 해방이 아니었다. 

 

미국이 한국인 의사와는 반대로 친일파를 관리자로 유임시킨 것은 친일파에 대한 한국인의 감정과 한국의 현실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미 군정이 조직적으로 잘 훈련된 친일 경찰을 중시한 이유는 경찰 책임자 마글린 대령의 다음과 같은 발언에 드러나 있다. "그들이 일본인을 위해서 훌륭한 업무를 수행했다면 우리를 위해서도 그럴 수 있으리라고 생각 합니다."

 

남조선 과도 입법의원에서 미군정과 극우 세력의 반대를 무릅쓰고 1947년 7월 '민족반역자 부일 협력자 간상배에 대한 특별법'이 통과 되자 미군정은 이것을 공포할 것을 거부했다. 미국은 제헌 국회에서 친일파를 처단하려는 것에 대해서도 곱지 않은 시선으로 지켜봤다. 미국은 이승만에게 친일파를 관리로 등용할 것은 꾸준히 요구하였다. 

 

또한 이승만은 일본과의 수교조건으로 대마도 반환,  식민지보상 36억불 청구 등 사실상 일본이 받아 들일 수 없는 요구를 함으로써그는 끝끝내 일본과의 수교를 거부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집권기는 워싱턴과의 갈등으로 채워졌으며 심지어 6ㆍ25 전쟁 중엔 미국이 이승만 제거계획-‘플랜 에버레디(Plan Everready)’를 검토했다는 것을 지난 기사(‘‘이승만 제거작전’까지 세웠던 美…주한미군 탄생 비화’ 참조)에서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수십 년 전 우리는 미국에게 일본에 대해 경고했지만, 그 경고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미국은 진주만을 공격당했다. 오늘날 우리는 동일한 경고를 반복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은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일본을 이전보다 더 강력한 국가로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

 

... 격앙된 대통령은 일본에 대한 비판과 경고와 동시에 미국에 대한 실망을 쏟아냈습니다. 1957년 6월 26일 한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발언 내용입니다.

 

갈등을 협상의 지렛대로 삼았던 이승만 대통령은 ‘남한 단독 북진’이라는 카드를 적절히 활용해 1954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얻어내는 데 성공합니다. 6ㆍ25 전쟁을 끝내고 싶었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남한의 북진을 막기 위해 이승만 대통령의 요구를 대부분 들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승만식 ’벼랑 끝 외교‘의 승리로 평가하는 이유입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면서 이승만-아이젠하워의 갈등은 종식될 줄 알았지만, 역사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1954년까지가 미국과의 갈등 국면의 1차전이라면 1955년부터는 2차전이 벌어집니다. 1차전에서 갈등의 매개체가 북한이었다면 2차전은 일본이었습니다.

 

미국의 ‘뉴룩(New Look)’ 전략이 나왔다. 일본=경제개발, 한국=군사 강화’라는 등식으로 일본과 한국의 수교를 요구했습니다. 뉴룩정책은 한국보다 일본이 더 수혜를 입는 구조였습니다. 한국이 미국에서 받은 돈으로 일본 제품을 사들이면 일본의 공업화와 경제는 발전하겠지만 한국의 경제부흥은 느려지고, 일본 경제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으니까요. 그래서 일본 물자를 구매하는 것이나 일본과의 국교 개선 등에 대해 격렬하게 저항했습니다. 

 

“나는 (미국 국무장관) 덜레스씨에게 미국이 일본과의 협조를 강요하여 일본의 주도 아래 놓인다고 믿게 되면 대부분의 아시아인들은 미국에게 등을 돌리고 공산주의자와 협력해 미국과 싸우게 될 수도 있다고 이야기했다.” (1957년 12월 20일 이승만이 정치고문 로버트 올리버 박사에게 보낸 편지)

 

이승만은 사실 그의 일생 대부분은 일본에 대한 저항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이승만은 1941년 7월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 야욕을 경고한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라는 책을 냈는데, 5개월 뒤 일본의 진주만 습격이 벌어지면서 비로소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런 이승만의 반일 기조는 미국의 동아시아 구상에 짐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미국의 한 관료는 한ㆍ일 관계개선 및 뉴룩 전략은 “이승만이 현장에서 사라진 후에야(only after Rhee's departure from the scene) 해결될 수 있는 주요한 정치적 문제”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6ㆍ25 전쟁 중엔 미국이 이승만 제거계획-‘플랜 에버레디(Plan Everready)’를 검토했다는 것을 지난 기사(‘‘이승만 제거작전’까지 세웠던 美…주한미군 탄생 비화’ 참조)에서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미국은 이를 중국 견제를 염두에 둔 한·미·일 안보협력의 틀을 흔드는 위협으로 받아들였다. 지난 8월22일 정부의 지소미아(GSOMIA) 종료 결정 직후 “문재인 정부의 결정은 동북아에서 우리가 직면한 안보적 도전에 대한 심각한 오해를 나타낸다”는 미 국무부의 논평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들이 일본인을 위해서 훌륭한 업무를 수행했다면 우리를 위해서도 그럴 수 있으리라고 생각 합니다." 라고 말한 미국 경찰 책임자 마글린 대령의 말.

.... 보다시피 미국은 한국은 동아시아 진출을 위한 작은 도구로 인식할뿐이다. 일본 식민지때 당한 아픔과 고통에 대해서는 그 어떤 관심과 아픔이 없다. 언제까지 미국의이용도구로 전락할 것인가. 정확한 사실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역사는 분노를 자극하고 분풀이를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중요한 갈림길에서 과거에 저지른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는 차가운 이성을 찾을 때 의미가 있습니다.

 

김일영 『이승만 정부에서의 외교정책과 국내정치-북진·반일정책과 국내 정치경제와의 연계성』, 홍석률 『이승만 정권의 북진통일론과 냉전외교정책』, 신욱희 『이승만의 역할 인식과 1950년대 후반의 한미관계』, [유성운의 역사정치] 이승만 제거 4번 검토한 美..'반일 한국'에 원조 깎아버렸다 뉴스를 참고했습니다.

 

나라가 바로 설려면 우선 국민의 뜻이 바로 서야한다.

 

 

 

 

 

 

 

 

 

 

 

 

 

 

 

 

 

 

 

1885. 08. 03  .배재학당 (Pai Chai Academy培材學堂) 창립 (설립자 아펜젤러 H. G. Appenzeller) 

1886. 04 .01      초대학당장 아펜젤러 취임

1886. 06. 08      고종황제로부터 '배재학당' 현판 하사 

1895. 09. 01  .배재대학부 (Pai Chai College) (영문학과, 국한문학과, 신학과)

1896. 04. 07          배재학당내에서 「독립신문」발간(서재필)

1896. 11. 30          배재협성회(학생회) 조직(지도 서재필)

1925. 09. 17      조선총독부에 의해 배재학당 교명 폐지

1937. 03. 03      배재중학교(5년)로 개칭  

1951. 08. 21      배재중학교(3년) 및 배재고등학교(3년)로 개편

1955. 04. 26      대전보육학원 설립 (설립자 허길래, Clara Howard)

1992. 03. 13  .배재대학교 (Pai Chai University)

 

... College에서 University 되는데 97년의 시간이 필요

 

[팩트체크] 

배재학당(Pai Chai Academy) → 배재대학부(Pai Chai College) → 배재고등학당 → 배재중학교 → 배재고등학교 → 배재대학교(Pai Chai University)

 

 

 

 

 

 

 

 

서재필 徐載弼

출생 1864년 1월 7일, 전남 보성(寶城)

사망 1951년 1월 5일

 

[주요활동]

.일본 유학후 배운 군사 기술로 사관학교 설립을 추진

.1884년 갑신정변 참여

.1885년 미국으로 망명.

1892년 3월 한국인 최초로 의학사 M.D.를 획득. 

.1890년 6월 19일 한국인 최초로 미국 시민권자

.1896년 4월 최초의 한글신문이자 민간신문인 『독립신문』 창간. 7월 독립협회 결성 

.1919년 4월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회의’ 개최, 한국통신부 설립, 5월 한국친우회 결성, 6월 『Korea Review(한국평론)』 발행

.1921년 5월 구미위원부 임시위원장, 9월 워싱턴회의 참가 시도

.1925년 태평양회의 참석

.1947년 해방후 귀국하여 ‘국민의 소리’ 라디오방송을 통해 대국민 방송연설을 시작

 

 

1884년 갑신정변 참여 1896년 4월 『독립신문』 창간, 7월 독립협회 결성, 1919년 4월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회의’ 개최, 한국통신부 설립, 5월 한국친우회 결성, 6월 『Korea Review(한국평론)』 발행, 1921년 5월 구미위원부 임시위원장, 9월 워싱턴회의 한국대표단 부단장

 

서울에서 생활하면서 일찍부터 개화에 눈뜬 김옥균을 비롯하여 박영효, 서광범 등과 교류하며 개화운동의 길로 들어섰다. 조선의 국방을 강화해야 한다는 김옥균의 제의를 받고 문관의 길을 마다하고 군사학을 배우기 위해 1883년 5월 일본으로 유학갔다.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에서 일본어를 배운 뒤 도쿄(東京)의 도야마(戶山)육군하사관학교에 입교하여 신식 군사 지식과 기술을 배우고 이듬해 7월 귀국하였다

 

 

 

갑신정변의 4주역

왼쪽부터 박영효 ・ 서광범 ・ 서재필 ・ 김옥균

© 독립기념관

 

귀국 후 일본에서 함께 군사교육을 받은 사관 생도들과 사관학교 설립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1884년 10월 새로 조련국이 설치될 때 사관장에 임명되었으나, 국내에 주둔한 청군(淸軍)의 간섭으로 무산되었다. 그해 12월 4일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등이 급진적인 내정개혁을 위해 갑신정변을 일으키자 사관 생도들을 이끌고 경호책임자로 참여하였다.

 

 

탈중화(脫中華)하여 근대적인 자주 독립국가를 꿈꾼 갑신정변은 청군을 앞세운 수구 세력의 무력 공격으로 3일 천하로 끝났다. 거사 실패 후 일본으로 망명하였고 조선정부로부터는 역적의 낙인을 찍혔다. 일본 망명 후 미국 선교사의 도움을 얻어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1885년 4월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막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한편 저녁에는 YMCA에서 영어를 배우고 일요일에는 교회에 나갔다. 교회에 다니면서 갖게 된 기독교 신앙은 이후 그의 사상과 인생행로에 큰 영향을 끼쳤다.

 

졸업 후 미국 육군 군의감도서관에서 중국어와 일본어로 된 의학 관련 책을 번역 ・ 정리하는 사서 일을 하였다. 그러던 중 의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하고 1888년 가을 콜롬비안대학교(현 조지워싱턴대학교)의 의학부에 입학해 1892년 3월 한국인 최초로 의학사 M.D.를 획득하였다. 사서로 일할 때인 1890년 6월 19일 한국인 최초로 미국 시민권자가 되었다.

 

1894년 7월 수립된 갑오정권(甲午政權)이 들어선 후 그의 ‘역적’ 죄명을 벗게 해 주고 동시에 귀국을 요청하자, 1895년 12월 26일 근 1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공식 직함은 중추원 고문직이었으나 정치활동보다 민중을 위한 계몽활동에 관심을 갖고 활동했다. 

 

민중들의 의식을 일깨워 한국의 정치 ・ 사회를 근대화시키기 위해 1896년 4월 7일 최초의 한글신문이자 민간신문인 『독립신문』을 발행하였다. 이 신문을 통해 한문으로 무장된 유교 지식인층 보다 한문에 문외한 일반 민중층을 상대로 ‘조선 민중의 이익’과 ‘조선 민중을 위한 조선’의 신문으로 만들어 자주자강의 근대화를 이루고자 했다.

 

 

 

 

『독립신문』(국문 제1호, 영문 제2호)

© 독립기념

 

민간 신문의 발간은 조선사회에 처음으로 정부와 민중간의 원활한 정보전달의 중요성을 인식시켜 주었고 민중들에게 근대 민권의식을 고취시켰다. 주권재민의 민주주의 정신을 배양하고 여론의 중요성을 일깨우기 위해 토론문화와 대중강연을 도입하였다. 

 

1896년 11월 배재학당 학생들을 상대로 세계정세를 가르치고 학생 자치기관인 협성회를 조직해 민주적인 토론문화를 가르쳤다.

 

1896년 7월 2일 한국 최초의 근대적인 정치 ・ 사회단체인 독립협회(1896.7~1898.12)를 결성하였다. 독립협회는 점차 계몽단체이자 정치적인 결사체로 발전하였다. 러시아의 부산 절영도 조차에 대한 반대를 위해 1898년 3월 서울 종로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주권수호의 주장을 관철시켰다. 만민공동회를 개최해 여론을 결집시켜 정부에 총의를 전달하는 방식은 자유와 민권을 신장시키는 획기적인 활동이었다. 이밖에 민중들의 호응을 받아 서대문 밖 모화관을 개수하여 ‘독립관’을 만들고 사대주의의 상징인 영은문이 헐린 앞자리에 ‘독립문’을 세워 조선의 자주독립정신을 내외에 선양하였다. 

 

그러나 자유로운민권신장을 위한 활동은 서재필 추방운동으로 이어졌다. 여론을 결집해 민감한 정치 현안까지 정부를 압박해 나가자 이권 확보에 혈안이 되어 있던 일본과 러시아 등 외세와 정부 내 수구파의 반발이 커진 것이다.

 

이들은 민중계몽운동의 배후자로 서재필을 지목하고 조선정부를 상대로 추방공작을 전개해 마침내 1898년 5월 14일 한국을 떠나야 하였다. 지난 3년여의 계몽활동은 당시 봉건적 잔재를 탈피하지 못하고 있던 조선사회에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을 위한 개혁운동이었고, 자주독립사상과 주권재민의 민주주의사상을 심어 준활동이었다. 독립협회활동의 영향은 남궁억, 정순만, 양기탁, 안창호, 이승훈, 이승만, 이상재, 김규식, 이동녕 등 수많은 개화 지식인들을 배출하였고, 이들은 이후 한국독립운동을 이끈 주요 민족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정부내 수구파 세력에게 미국으로 추방당한 서재필은 1905년 7월 러일강화회의를 대비해 미주 한인을 대표한 이승만(李承晩)과 윤병구(尹炳九)가 필라델피아에 왔을 때 외교문제를 협의하였고 미국 대통령에게 전달할 청원서를 보완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후 여운홍(呂運弘), 안창호(安昌浩) 등 국내외 애국지사들과 교류하며 한국독립을 위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1919년 3 ・ 1운동이 일어나자 그해 4월 필라델피아 리틀극장에서 이승만, 정한경과 함께 ‘제1차 한인회의’(공식 명칭은 ‘대한인국민회총대표회’)를 개최하였다. 모든 회의를 주재한 후 한국 독립의 열망과 새로운 독립국가 건설의 방향을 담은 6개의 결의문과 호소문을 작성해 대외에 공표하였다.

 

한국통신부의 설립과 별도로 톰킨스와 함께 1919년 5월 16일 필라델피아에 한국친우회를 결성하였다. 한국친우회는 일제의 강압적인 식민통치로 압박받고 있는 한국인들을 돕기 위해 친한 미국인 중심으로 결성한 것으로 필라델피아를 비롯해 미국 전역에 21개가 결성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워싱턴회의를 대비하여 1921년 9월 29일자로 단장 이승만, 부단장 서재필, 서기 정한경, 법률고문 돌프(Fred A. Dolph)로 하는 한국대표단을 구성하였다. 일본의 적극적인 방해공작과 식민지 한국에 대한 미국 정부의 철저한 무관심 등으로 한국대표단은 워싱턴회의에 참석할 수 없었다. 국내외 많은 한인들에게 실망을 주었으나 대외선전활동은 나름 성공적이었다. 미국 언론을 상대로 한 활동 결과 60여 곳의 신문에서 한국의 입장을 지지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서재필과 안창호(로스앤젤레스, 1925)

© 독립기념관

 

1926년 9월 62세의 나이에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의과대학 특별학생으로 입학해 다시 의사의 길로 들어섰다. 의사 인턴생활 때 여러병원을 거치며 고된 연구 활동에 전념하다 1927년 11월 한인 최초로 병리학 전문의 자격증을 획득하였다.

 

해방이 되자 미군정 사령관 하지 중장의 부름을 받아 군정청 수석고문이자 과도정부특별의정관의 자격으로 1947년 7월 1일 귀국하였다. 귀국 직후 정치적인 활동보다 신생 한국의 민주주의 국가건설과 민족통일을 위한 계몽활동에 중점을 두고 활동했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자신의 역할이 끝났다고 판단하고 1948년 9월 11일 한국을 떠났다. 미국으로 떠나면서 국민들에게 “우리 역사상 처음 얻은 인민의 권리를 남에게 약탈당하지 말라. 정부에게 맹종하지 말고 인민이 정부의 주인이라는 것이요, 정부는 인민의 종복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이 권리를 외국인이나 타인이 빼앗으려거든 생명을 바쳐 싸워라. 이것만이 평생의 소원”임을 밝혔다. 주권재민의 원칙에 충실한 참다운 민주정부가 되어 다시는 열강의 위세에 휘둘리지 말고 강건하고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 갈 것을 당부한 것이었다.

 

 

자택이 있는 미국 미디아시로 돌아와 다시 의사로 활동하다 한국에서 6 ・ 25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51년 1월 5일 필라델피아 근교 노리스타운의

몽고메리병원에서 87세로 생애를 마쳤다.

 

구한말 개화운동의 선각자로서 민중계몽을 위해 앞장섰고 미국에서 한국통신부와 한국친우회를 결성해 한국 독립 문제를 전 세계로 확산시키는데 기여한 인물이다. 해방 후 미군정의 최고고문으로 귀국해 독립된 대한민국을 자주자강의 통일된 민주국가로 가는데 헌신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 서재필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205XX79100134

 

 

 

친일파 백선엽

 

남로당에 연루됐던 박정희를 살려준 것도 백선엽이었다. 박정희는 육군 소령시절 남로당 가입 사실이 드러나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이때 박정희를 구명해 준 인물이 바로 백선엽이다. 1949년 당시 육군 정보국장(대령)이던 백씨는 박정희가 석방되는데 크게 기여했고, 문관으로 육군 정보국에서 일하게 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백선엽은 1920년 11월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출생했다. 1939년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한 그는 1940년(20세)에 만주국 중앙육군훈련처(일명 봉천군관학교)에 입학, 1943년 4월 만주국 소위로 임관했다. 누가 봐도 부정할 수 없는 민족반역의 길이었다. 

그가 복무한 부대 중 하나는 간도특설대다. 한국인 출신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간도특설대는 항일투쟁군에 맞서 싸우는 부대였다. 1938년부터 1945년까지 활동한 이 부대는 한국인을 이용해 한국인을 억압할 목적으로 등장했다. 한국인 군인들을 앞세워 만주 지역 한국인들을 통제할 목적으로 세워졌던 것이다. 일종의 이이제이를 위한 부대였다.

2008년 <한일관계사연구> 제31집에 실린 김주용 독립기념관 연구위원 논문 '만주지역 간도특설대의 설립과 활동'은 "한인을 이용하여 한인을 감시하고 탄압하는 방식은 일제가 즐겨 사용했던 방식으로 간도특설대 역시 이 범주 안에 있다"며 "간도특설대는 1938년 설립 이후 약 5년간 간도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를 색출하거나 항일 무장단체를 탄압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고 설명한다.

간도특설대는 명칭상으로는 만주 지역으로 활동이 국한됐지만, 이들의 활동은 중국 내륙으로도 광범위하게 확장됐다. 베이징 주변 지역으로까지 범위를 넓힌 이 부대는 잔인한 한국인 이미지를 현지인들에게 심어주었다. 한국인이 주축이라고 알려진 이 부대가 항일부대뿐 아니라 민간인 학살에도 가담했던 것.

항일 부대와의 전투뿐 아니라 민간인 학살까지 저지른 간도특설대. 이 부대에서 백선엽은 장교였다.

백선엽은 이북 출신 극우단체인 서북청년단을 중심으로 창설된 호림부대를 수하에 두었다. 이 부대는 민간인 학살을 저지른 범죄 집단이었다. 빨치산 토벌을 빌미로 강원도 인제, 경북 영천·청도·경산, 경남 거창 등에서 민간인을 약탈하고 특히 여성들에게 야만적 범죄를 저질렀다. 빨치산 토벌을 빌미로 국민들을 겁주는 역할을 맡은 부대였던 것이다. 이 부대는 육본 정보국의 지휘를 받았다. 백선엽이 정보국장일 때 이 부대의 만행이 일어났다.

이런 일은 한국전쟁 중에도 있었다. 백선엽이 이끄는 특수부대인 백야사도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다. 이들 역시 빨치산 토벌이라는 미명 하에 특히 지리산 일대에서 학살을 자행했다. 이들이 아무나 마구 죽였다는 점은 1951년 12월 2일부터 14일까지 거둔 '전과'에서도 드러난다. 이들은 4000명의 빨치산을 상대로 작전을 개시했다. 그런데 사살한 이들은 총 6600명이다. 아무나 닥치는 대로 죽였던 것이다.

백선엽이 몸담은 간도특설대는 항일 군대를 잡겠다며 민간인 학살을 저질렀다. 이런 행동 패턴이 백선엽의 해방 이후 행적에서도 고스란히 되풀이됐다.

백선엽의 민낯, 대한민국에 그가 존경받으며 누울 곳은 없다

news.v.daum.net/v/20200601124800764

 

백선엽 (feat.박정희)

https://www.youtube.com/watch?v=o2G5K5TchYI

 

 

 

6.5영웅이자 친일파 백선엽

화가나서 죄송합니다. 백선엽 2

www.youtube.com/watch?v=NWxEX2Joa1Y

나라가 바로 설려면 우선 국민의 뜻이 바로 서야한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말했다. "역사는 어느 집단의 힘으로 변화되는 게 아니다. 그 집단을 이끄는 창조적 천재의 능력만이 새로운 역사의 발전을 창조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