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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골프 역사와 이승만의 골프외교

ㅋㅌㅌ 2019. 1. 1. 13:17

한국의 골프 역사


한국에 처음 골프가 들어온 것은 1900년(고종 37) 황실의 고문으로 온 영국인들이 함경남도 원산(元山)의 세관 구내에 6홀의 코스를 만들어 경기를 즐긴 것이 시초였다. 이후 1911년에 한 일본인이 서울의 효창공원에 7홀짜리 골프장을 만들었다. 


그후 1919년 5월, 서울 효창공원(孝昌公園)에 미국인 H.E. 댄트가 설계한 9홀의 코스가 등장함으로써 골프 애호가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1924년에는 청량리에 18홀 규모의 경성골프장이 문을 열였다. 길이 4,000야드(3,657미터), 파70이었다. 군자리 골프장은 1930년에 건설되었다.


영친왕(英親王)은 한국인 최초의 골퍼였다. 1907년 11세 때 일본으로 끌려간 그는 일본에서 골프를 배웠다. 1929년 영친왕(英親王)이 서울 성동구 능동(현재의 어린이대공원)의 땅을 무상으로 대여해 주고 경기장 건설비를 보조하여 만든 전체 길이 6㎞, 18홀의 서울컨트리클럽이 개장되면서부터이다. 영친왕의 희사로 건설된 군자리골프장이 제2차 세계대전 동안 폐허가 되었다가 이승만에 의해 1950년 5월 복원된 것이다. 


그 뒤 1937년 조선골프연맹이 결성되었고, 1941년 한국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연덕춘이 일본오픈대회에서 우승하였다. 제2차세계대전을 겪는 동안 서울컨트리클럽이 폐쇄되고, 8·15 광복 및 한국전쟁으로 한때 침체되기도 하였으나, 1954년 서울컨트리클럽이 재건되면서 다시 보급이 활발해졌다. 이때까지 골프는 귀족 스포츠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했으나 한국전쟁이 끝난 후부터 세계적인 골프 붐을 타고 한국에도 골프인구가 급속히 늘어가기 시작하였다. 광복 후 시작되어 1998년 현재 제45회 대회를 개최한 아마추어골프선수권대회는 가장 역사가 깊은 대회이다. 






초대 이승만 대통령에게 있어서 골프는 군사적 활용수단이었을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1주년 축하연에서 주한 외교관들과 군 고위층 인사들이참석한 가운데 미군 장성들이 골프를 즐길 골프장이 없어 일본 오키나와로 라운딩을 간다는 말을 듣고 지금의 어린이 대공원 자리에 골프장을 건립하게 되었다고 한다. 일본에서 골프를 즐기는 사이에 북에서 내려오면 큰일 아닌가? 즉 군사적인 전략이 숨어있었던 것이다.



이승만의 골프외교


군자리골프장이 복원된 지 한달만에 한국 전쟁이 일어났다. 골프장은 다시 폐허가 되었다. 또 다시 복원된 것은 1954년. 역시 이승만의 지사에 따른 것이었다. 이승만은 미군들에게 놀이터를 제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골프장 복원을 명했다. 그 중심은 이순용이었다. 이순용은 원래 이승만이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 함께 활동하던 인물이다. 이름은 서울CC. 서울CC는 미군 장교, 서울 주재 외교관, 한국군의 장성, 정부 관료들의 사교장이 되었다. 1972년 서울CC가 이전했고 그 자리는 어린이대공원이 되었다. 


이승만은 1958년 서울 용산의 미군 주두닞에 골프장을 짓는 것도 허용해줬다. 당시 주한미군사령관이 조지 데커(George Decker)였다. 핸디캡 3의 아마골프 고수였다. 수요일과 토요일은 꼭 골프를 하는 골프광이었다. 당시 국방장관이던 김정렬도 핸디캡 7의 역시 대단한 골퍼였다. 


두 사람은 친근한 골프 파트너로서 말이 잘 통했고, 한미간의 주요 정책도 골프장에서 논의했다. 미군 부대에 골프장을 짓는 일이니 오죽 뜻이 잘 통했겠는가. 그래서 이승만은 남산에 있는 미군 사격장을 이전하고 그 자리에 한국군 아파트를 짓는 조건으로 골프장을 허가했다. 미8군 연병장 인근에 피난민 200여 가구가 사는 국유지가 있었는데 여기에 골프장을 만들었다. 


미군의 요구를 수용하는 형식이었지만, 이승만으로서도 싫지 않은 것이었다. 미군이 원하는 것은 웬만하며 들어주고, 대신 미군의 분명한 안보 공약을 얻고 싶은 것이 이승만의 본심이었다. 골프장을 허용해 주고 미군의 서울 주둔을 분명하게 할 수 있다면 이승만으로서는 오히려 좋은 것이었다. 이승만의 이런 내심은 한국 전쟁의 정전 상황을 되새겨 보면 익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1954년 한국 아마추어골프대회를 창설. 이승만 대통령은 직접 시상을 하기도 했다. 대회명을 '대통령배 아마추어 챔피언대회'로 바꿔 1975년가지 대통령배 대회로 이어지기도 했다. 당초 계획대로 주한 외교사절과 미군들의 골프 참여로 국익에 기역하며 한국골프 발전에 기틀이 됐다. 


6.25 동란 이후 어려운 나라 살림과 기난한 국민의 배고픔에 무슨 골프냐고 질타를 받아가며 연속된 고난속에서도 한국 골프의 기틀을 마련하고 안보를 위해 골프 외교를 적극 활동했던 이승만이었다. 


자주 국방에 힘쓴 이승만


한국의 안보를 위해 이승만의 골프외교과 더불어 군대 군인 급여는 이승만 대통령때 제일 많은 돈을 지급했다. 이승만은 적어도 사병의 급여만큼은 제대로 지급했다.


현재까지 현역병의 급여는 이승만 대통령때 제일 많은 돈인데 당시 이승만은 이등중사(현재의 병장)의 급여를 120환으로 지급했는데 이는 같은 시기의 준장의 급여인 1200환의 10%였다. 2017년 현재 준장의 급여가 817만원인 것을 감안한다면 그 당시의 비율대로 지급할 경우, 병장의 급여는 82만원이 된다.


이승만은 어떻게든 사병의 급여를 제대로 지급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후 박정희가 정권을 잡으면서부터 사병 급여는 동결 내지는 인하되어 전두환의 치세기간 중에는 병장 급여가 준장 급여의 1.5% 수준까지 하락하기도 했다.




배재대학교 기숙사 국제 언어생활관에서 실내 골프를 즐겨 BOAY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