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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국가 검색
2018 애국가
작사: 안익태, 작곡: 박인영
... 다운로드해 애국가 들어보자. 정부기관 사이트이니 검증되고 인정된 애국가.
... 여기에서 애국가에 대해 한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자랑스러운 배재인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한글학자 주시경,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 개화기 지식인 서재필, 윤치호, 김지호, 의학자이자 사회사업가 오긍선, 민족 시인 김소월 소설가 나도향, 여윤형, 한국인 최초의 서양음악 교사이자 애국가 작곡자 김인식.
... 배재학당 교사였던 서재필, 김인식은 사진에는 없구나.
애국가 작사 윤치호
애국가 작곡 김인식
한국인 최초의 서양음악 교사 김인식(金仁湜, 1885~1963)
우리 나라 작곡가로 최초라고도 하는 김인식은 학생시절 서양 선교사로부터 음악을 배워 작곡과 오르간, 금관악기 등을 배웠고 배재학당에서 음악교사를 하면서 작곡했다.
1907년 22세 나이로 황성기독교처년회(YMCA의 전신)가 설립한 성동청년학원 중학부의 음악교사가 되었고, 조선정악전습소에서 본격적인 후진을 양성하여 홍난파, 이상준등과 같은 제자를 길러냈다. 그 뒤 황성기독교청년회에서 합창을 지도하였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합장단인 경성합창단을 결성하였다. 애국가, 전진가, 국기가등을 작곡하였다.
여기에서 애국가에 대해 한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애국가의 자취는 개화기(조선말) 갑오개혁 직후까지 올라간다. 1896년 당시 독립문 정초식에서 배재학당 학생들에 의해 그 유명한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의 멜로디로 불린 작사 미상인 애국가가 최초의 애국가로 여겨진다. 여기서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죠션 사람 죠션으로 길이 보죤하세" 라는 가사가 지금의 애국가 가사에서도 맥을 이어 변형(조선→대한)되어 쓰이고 있는 데서 확인할 수 있다. 이 때는 한 해에 수십개의 애국가가 쏟아져 나왔다.
사실 애국가란 제목의 노래는 1896년 대한제국 수립이후 '독립신문'에 실린 것만 수십 편이 넘는다. 작가 이름이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었다. 독립가도 마찬가지였다.
기독교에서서 애국가 같은 것을 한번 만들어 보자고 하여 이상재가 주선하여 대성학교 교장 윤치호, 화가 지운영등 기독교인 4명이 4절까지 만들었고 윤치호가 현재 교장으로 있었기에 그냥 자네를 작사자로 하자고 하여 그때부터 작사자는 윤치호가 되었다고 한다.
(이 내용은 주효한과 윤치영의 증언에 의한 것임)
'동해물과 백두산이...' 애국가 가사는 독립신문 사장과 대성학교 교장을 지낸 윤치호가 지었음을 밝히는 외국 문헌이 발견됐다. 애국가 가사를 영문으로 싣고, 그 작사자를 윤치호로 명기한 'National Anthems-And How They came to be written'을 미국에서 입수, 13일 공개했다.
앞집에 살던 서양 음악 강사 김인식에게 애국가의 곡을 붙여 보라고 하였더니, 당시 우리나라 기독교 찬송가 대부분이 그랬던 것처럼 김인식도 스코틀랜드 민요에서 곡을 따 왔다. "올드 랭사인(Auld Lang Syne)" 이라는 곡에다 이 애국가 노랫말에다 붙인 것이다. 이 악보가 아직도 남아 있는데, 1910년 9월 1일자 '신한민보(안창호 신민회 신문)에 '국민가' 라는 제목을 게재되었다. 이 곡이 언제부터인가 '애국가'란 제목으로 바뀌어 버렸다고 한다.
경신,배재, 이화등 여러 학교에 강사로 나가던 김인식 교사는 1909년 경부터 각 학교에 이 노래를 퍼뜨렸고 한일합방 이후이 노래의 출처를 조사하던 일본 경찰에 붙들려 가는 신세가 되었다고 하는데 경찰 취초 과정에서 '곡은 일본 친구 나라 영국 것이고 가사는 옛날부터 내려 오던 것'이라 둘러 대엇다고 한다. 김인식은 결국 재판에 회부되어 1년 6개월의 징역을 살게 되는데, 죄명은 '풍기문란' 죄였다고 한다. 김인식은 이 노래가 기독교를 통해 계속 이어지다가 1919년 3.1 운동 때에 기독교 학생들을 통해 전국적으로 학산 되었다.
이 노래가 결국 안익태에게도 들려지게 된 것이다.
안익태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한국인 교회에서 다시 접한 태극기와 애국가는 신선한 충격이 아닐수 없었다. 11년전 3.1 운동때 잠깐 보고 들었던 것인데, 여기 미국에서 정말 겁도 없이 태극기와 애국가가 넘쳐나고 있었다.
이 애국가 노래는 LA 한이니 교회에서 만든 노래책에서 윤치호 작가 애국가 악보가 발견 되었다고 한다. 안익태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애국가 악보와 가사를 잘 배껴서 음악학교가 있는 신시내티로 향했다.
1935년 11월 뉴욕 카네기 홀에서 한익태 자신이 만든 곡 '한국 환상곡(코리아 판타지)'을 연주하였지만, 뉴욕 카네키 홀에서 동양인 안익태를 우습게 보고 너무 불성실하게 연주했고, 화가 난 안익태를 독일 나치정권으로 간다.
나치정권 독일에서 스트라우스를 만난 안익태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 기념행사에 사용될 '올림픽찬가'를 고민하던중 안익태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배껴 왔던 '애국가' 가사를 활용하면 되겠다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안익태 본인의 말에 의하면 1936년 6월 어느 날 갑자기 악상이 떠 올랐고, 그걸 바로 '애국가'의 곡으로 삼았다고 한다.
[팩트체크] 갑자기 악상이 떠 올랐고...??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안익태는 "안익태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애국가 악보와 가사를 잘 배껴서 음악학교가 있는 신시내티로 향했다."
안익태는 이 악보를 즉시 샌프란시스코 한인 교회로 보냈고, 이 악보는 이승만을 통하여 상하이 임시정부에 전달되었고, 그 이후부터는 애국가는 안익태가 작곡한 것으로 불리어 지게 되었다.
[팩트체크] 안익태가 작곡한 것으로 불리어 지게 되었다...???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안익태는 "안익태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애국가 악보와 가사를 잘 배껴서 음악학교가 있는 신시내티로 향했다."
그럼 안익태가 샌프란시스코에서 빼긴 애국가 악보와 가사는 누가 만들었을까.
애국가 작사 윤치호
애국가 작곡 김인식
안익태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윤치호 작가, 김인식 작곡의 애국가를 배낀후 독일로 간후 나치정권에서 베를릴 올림픽 '올림픽찬가'에 배껴온 애국가를 잘 활용해먹고 그걸 이용해 샌프란시스코 한인 교회, 이승만, 상하이 임시정부를 통하는 과정에서 안익태 작곡인것처럼 위장하여 이미지 세탁된 것이다.
애국가의 작곡자로 잘못(?!) 알려진 안익태(1906-1965)는 1918년 숭실중학에 입학하지만, 1921년 일본 도쿄의 사립 세이소쿠중학교에 편입하는 바람에 숭실중학을 미처 졸업하지 못한 인물이다.
안익태는 일본 유학에 이어 미국에 유학한 후 주로 유럽에서 활동하는데, 에키타이 안이라는 일본식 이름을 사용하면서 1938년에는 천황에 대한 충성을 주제로 하는 일본 정신이 배어 있는 <에텐라쿠>를 발표하였다. 1942년에는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 건국 10주년을 경축하는 <큰 관현악과 혼성합창을 위한 교향적 환상곡 '만주'>(만주환상곡)를 4개의 악장으로 완성한다. (<친일인명사전> 참조)
안익태는 유럽에서 1940년부터 <에텐라쿠>와 <만주환상곡>은 물론 독일 나치제국의 제국음악원 총재이자 나치 협력자였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작곡한 <일본축전곡> 등을 계속 연주하였다.안익태는 최근 이해영(한신대 교수)이 <안익태 케이스>(삼인)를 펴내면서 다시 한 번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지난 2015년에도 안익태가 1941년에 '기미가요'를 피아노로 연주한 사실을 밝혀냈던 이해영은 이번에는 한발 더 나아가 안익태를 일본군국주의는 물론 나치에도 부역한 인물이었다고 문제제기하였다.
안익태의 유럽 활동은 나치의 외곽조직인 독·일협회의 후원을 받아 진행되었고, 안익태는 1943년 괴벨스가 주도하여 만든 나치의 나팔수 '음악가 조직' 제국음악원의 정회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안익태는 2009년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숭실대학교에는 안익태 기념관과 동상이 있다.
2019년은 100주년 태극기를 다는 3.1절 입니다.
기억하십시요.
애국가 작사 윤치호
애국가 작곡 김인식
안익태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윤치호 작가, 김인식 작곡의 애국가를 배낀후 독일로 간후 나치정권에서 베를릴 올림픽 '올림픽찬가'에 배껴온 애국가를 잘 활용해먹고 그걸 이용해 샌프란시스코 한인 교회, 이승만, 상하이 임시정부를 통하는 과정에서 안익태 작곡인것처럼 위장하여 이미지 세탁된 것이다. 안익태는 애국가를 작곡한 것이 아니라, 샌프란시스코에서 윤치호 작가, 김인식 작곡의 애국가를 배낀 것이 전부다. 베를린 올림픽을 이용해 자기가 만든 것처럼 위장한것 뿐이다.
부끄러움이자 안위만을 탐닉해온 대학의 부끄러운 모습이다. 변화되지 못하고 사는 그 대학의 모습을 돌이켜보며, 창피함과 부끄러움을 느껴보는 하루가 됐으면 합니다. 다른 대학과 달리 잘못된 부분에 지적을 하는데 질척거리면서 변명 아닌 변명만 주구장창 늘어놓고 있을뿐이다. 결국 욕심을 내려놓아야 진정한 대학의 위치를 찾게 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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