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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끼줍쇼' 3주년 맞아 하와이 간다.

ㅋㅌㅌ 2019. 11. 4. 02:35











'한끼줍쇼' 3주년 맞아 하와이 간다.

한끼줍쇼 첫방송: 2016년 10월 19일 첫방송

한끼줍쇼 1주년:  2017년 7월 일본 요코하마와 신주쿠

한끼줍쇼 2주년:  2018년 4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와 사할린

한끼줍쇼 3주년:  2019년 12월 미국 하와이


‘한끼줍쇼’가 3주년을 맞아 미국 하와이로 간다.


'한끼줍쇼'는 평범한 가정, 국민들의 저녁 속으로 들어가 저녁 한 끼를 나누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엿보고자 하는 프로그램으로 지난 2016년 10월19일 첫 방송을 시작해 올해로 방송 3주년을 맞이했다.


해외 독립운동의 핵심 지역 중 하나였던 하와이를 찾아 재외동포들을 만나 뜻 깊은 시간을 가질 전망이다. '한끼줍쇼'는 하와이에서 한인 교포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통해 정을 나누는 것은 물론, 한인이주역사의 발자취를 찾아가는 의미있는 시간을 담을 것으로 기대된다. ‘한끼줍쇼’  미국 하와이 편의 촬영 일정이 아직 나오지 않았으나 12월 중 방송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끼줍쇼’는 1, 2주년을 맞아 일본과 러시아로 해외특집 촬영에 나선 바 있다. 지난 2017년 7월 일본 요코하마와 신주쿠, 2018년 4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와 사할린에서 재외동포의 집을 방문해 한끼를 함께 했다. 당시 이경규와 강호동은 재외동포들을 만나 의미있는 한끼 식사 시간을 가지면서 시청자들에게도 재미와 감동을 안겼다. 당시 연출을 맡았던 방현영 PD는 오쿄하마 편을 두고 “이 기획은 실수였나보다 생각할 정도로 무모한 방송이었다”며 “초인종을 누르고 한국인 음성이 들려왔을 때 제가 엉엉 울었다”며 뒷이야기를 전하기도 했다.


한끼줍쇼 해외특집은 더욱더 빛날수 밖에 없다. 해외 교민들과 함께하며 그들의 추억과 과거를 떠 올릴수 있고, 근현대사에서 한국의 독립운동과 역사적 사실을 다시금 환기시키고 있다. 일반적 해외 촬영 예능은 막대한 제작비 쏟아 부어가며 왜 저런 콘셉트의 예능 콘텐츠를 꾸미는지 한숨이 나올때가 많다. 


김민정, 여진구, 임시완, 그리고 히든게스트 김영철과 함께 하와이로 한끼줍쇼 떠납니다. 한끼줍쇼 하와이 편은 12월 11(수)일 방송됩니다.





하와이 제도는 여덟 개의 유인도와 부속도서로 이뤄졌다. 1898년 미국에 병합됐으며, 사탕수수 농장 개발 이후 한국, 중국, 일본, 필리핀 등 다국적 노동자가 이민사회를 개척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loORyi6vKlk

하와이 독립운동 기록 97년 만에 최초 국내 공개 / KBS뉴스(News)





미국 하와이의 독립운동 거점인 '대한인국민회' 한국독립문화원, 무명애국지사 추모비

호놀룰루시 루크 애비뉴 2756번지에 있는 하와이 한국독립문화원 전경과 뒤뜰에 세워진 무명애국지사 추모비. 이 건물은 1947년부터 대한인 국민회관으로 사용됐었다.




이승만이 세운 한인기독교회

호놀룰루 릴리하 스트리트 139번지. 하와이와 빼놓을 수 없는 인연인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1918년 세운 한인기독교회이다.




대조선국민군단

1914년 6월 10일하와이 오아후(Oahu)섬 코올아우(Koolau)지방 카할루우(Kahaluu)의 아후이마누(Ahuimanu)농장에서 독립군사관을 양성할 목적으로 만든 군사교육단체. 국민군단은 박용만이 1909년 6월 네브라스카 헤스팅스에서 시작한 한인소년병학교의 군사운동정신을 계승한 것으로 미주한인사회에 항일독립전쟁론을 구현하고자 만든 단체였다.



광화문의 외형을 모델로 설계된 한인기독교회

1937년 10월 3일 개천절에 맞춰 착공한 교회는 서울 광화문(光化門)의 외형을 모델로 설계됐다. 설계자는 이승만이 세운 한인중앙학원의 첫 졸업생이자 한국인 최초의 건축사인 김찬재였다.


하와이에는 해외에서 처음으로 독립선언서 낭독과 만세삼창을 하며 삼일운동 경축 모임을 했던 한인기독여학원 자리인 카이무키의 알리이올라니 초등학교 등 하와이에는 24곳의 독립운동 유적지가 있다. 



http://www.newdaily.co.kr/site/data/html/2014/08/29/2014082900012.html


교과서는 말하지 않는 하와이 독립 운동


하와이 독립운동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있지 않고 잘 모르는 데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교육에 있다. 대부분의 역사 교과서들은 항일 무장 독립투쟁,상하이 임시정부 그리고 광복군 등 만을 항일 독립운동 서술의 주축으로 삼고 있다


이승만은 1899년 1월 한성감옥에 투옥되었다. 감옥에서 『청일전기(淸日戰紀)』를 편역하고, 『독립정신』을 저술하였다. 또한 『신영한사전』을 편찬하였으며, 『제국신문』에 논설을 투고하였다. 『독립정신』은 그가 출옥한 이후인 1910년 LA에서 처음으로 출판되었다. 『청일전기(淸日戰紀)』는 1917년 하와이에서 출간되었다.


1904년 8월 9일 특별 사면령을 받고 감옥에서 석방되었다. 같은 해 11월 민영환(閔泳煥)과 한규설(韓圭卨)의 주선으로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기 위해 미국으로 갔다. 배재대학부 영문학과 학력을 인정받아 1905년 2월 워싱턴 DC의 조지워싱턴 대학(George Washington University)에 2학년 장학생으로 편입하였다. 


이승만은 워싱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전권 대사로서 한국의 독립 문제를 군축회의 의제로 상정시키고자 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 하였고, 1922년 9월 하와이로 돌아갔다. 교육과 종교 활동에 전념하던 그는 1924년 11월 호놀루루에서 조직된 대한인동지회 종신 총재에 취임하였다. 


1925년 3월 이승만은 자본금 7만 달러의 동지식산회사를 설립하고 하와이섬 올라(Olaa) 지방에 임야 3.86km²(약 117만 평)를 매입했다. 그는 곧바로 이 땅에 ‘동지촌(同志村)’이란 이름을 붙이고 개간사업을 시작했다. 사탕수수 농장에서 더 이상 일할 수 없는 노령(老齡)의 한인 동포들을 모아 농사를 함께 지으며 살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최근 《하와이 대한인국민회 100년사》란 책을 펴낸 이덕희 미주한인재단 이사장은 하와이 독립운동사의 최고 전문가로 손꼽힌다. 그는 “이승만이 하와이에 25년 살면서 가장 주력한 사업은 결국 ‘교육’”이라며 “언젠가 나라를 다시 세우려면 지도자 양성이 가장 시급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국내를 비롯해 만주와 상하이 등 여러 곳에서 독립운동가들이 숭고한 활동을 했지만, 이승만만큼 장기적인 비전을 보고 독립과 건국을 준비한 인물은 없었습니다. 최근 그를 향한 악의적 역사 왜곡은 정말 문제가 크다.한국에서 주류시각은 이승만을 독재자로 규정하고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만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데, 한 사람에 대한 평가는 공과가 구분돼야 한다. 이승만의 ‘과’는 많은 이가 잘 알지만, 독립운동에 대한 업적과 행보는 지나치게 무시된 듯하다.


하와이 이민사 전문가들에 따르면 1909년부터 1920년까지 하와이 국민회가 모은 독립자금은 300만 달러가 넘었다. 대부분은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송금됐다. 동포들의 국권회복 운동에는 부녀들의 활약도 컸다.


1919년 3월15일 창립된 대한부인구제회도 ‘독립운동하다 다친 사람과 죽은 사람(가족)에게 구제비를 송금한다’, ‘조국 독립을 위해 일한 사람에게 송금한다’는 내용의 헌장을 정하고 중국 중경 한인 독립군단과 독립운동 중  부상당한 이들을 위해 1,500달러를 보냈는데 이는 지금돈으로 쳐도 7만~8만 달러 정도로 큰돈이었습니다. 조국 광복을 위해 먼 이국땅 하와이 사탕수수밭 중노동 속에서도 오로지 조국 광복을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며 독립자금을 마련한 이민자들의 헌신적인 나라사랑 정신 역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올해는 대한민국이 1919년 3월 1일 일본의 식민통치에 항거하여, 독립선언서를 발표한지 벌써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러나 현재 하와이에서 그나마 몇 남지 않은 독립 유적들은 심각할 정도로 방치돼 있다. 24곳의 하와이 독립운동 유적지 상황은 대체로 비슷했다. 대부분 평범한 주택가가 된 역사의 현장은 팻말이나 표지석 하나 없었다. 독립운동의 주요 자금원이었던 하와이는 지금까지 상하이나 만주 지역 등 중국의 독립유적에 비해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어느덧 3주년 '한끼줍쇼', 소리 없이 강한 이유[SS예능]


JTBC ‘한끼줍쇼’가 소리 없이 강하게 전진 중이다.


요즘의 예능 프로그램 생명력은 그리 길지 못하다. 모바일 플랫폼 확대로 웹 예능이 엄청난 인기를 끌며 기존 예능 자리를 넘보는가 하면, 최근에는 드라마 침체로 드라마 편성이 일시 폐지되고 빈자리를 예능이 채우면서 경쟁이 더욱 치열해졌다. 소수의 예능을 제외하고는 최대 1년도 버티지 못하고 스러진다.


이 같은 현실 속 JTBC ‘한끼줍쇼’는 2016년 10월 19일 시작해 3년 동안 매주 수요일 오후 11시대를 꽉 잡고 있어 눈길을 끈다. 3주년을 맞아 재외동포 특집을 꾸며 이달중 미국 하와이 편 방송도 앞두고 있다.


‘한끼줍쇼’는 평범한 가정에서 저녁 한 끼를 나누며 우리들의 모습을 엿본다는 취지를 품은 예능이다. MC 이경규, 강호동과 게스트들은 매주 특정 지역 동네를 찾아가 초인종을 누르고 “한 끼 식구가 되어주시겠습니까”라며 한 끼를 대접해줄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성공할 경우 주민과 식사하며 그들이 사는 이야기를 나누고, 실패하면 편의점에서 끼니를 해결해야 한다. 3년째 이 구성은 똑같고 MC 조합도, 두 팀 이상의 게스트가 참여한다는 것에도 변화가 없다. 어찌 보면 너무 그대로라 단조로운 ‘한끼줍쇼’인데 어떻게 롱런을 이어갈 수 있는걸까.


‘규동 MC’로 불리는 이경규와 강호동의 유려한 진행 실력, 재치 있는 입담, 티격태격 케미, 주민들과 친근감 있게 소통하는 면모는 ‘한끼줍쇼’ 순항의 근간임을 부정할 수 없다. 이처럼 노련한 두 MC가 주는 안정감과 유머도 분명 인기 요인으로 꼽히지만 주민들이 스스럼없이 꺼내놓는 삶 이야기에서 형성되는 공감대가 여전히 호응을 잇게 한다는 평이다. 때론 내 이야기 같아 고개를 끄덕이게 되고 다른 사람은 이렇게 산다는 걸 눈여겨보게 하는, 흥미로운 요소가 ‘한끼줍쇼’만의 긍정적인 색깔로 굳어졌다.




또한 포맷은 한결같지만 매 회 소개되는 지역과 주민이 달라 늘 새로운 분위기와 이야기가 전달된다는 점이 장수 요인으로 꼽힌다. 무턱대고 초인종을 눌러 ‘민폐 논란’도 있었지만 위 요소들이 이를 잠재웠다.


‘한끼줍쇼’ 관계자 역시 프로그램의 인기 요인을 주민들이 주인공이라는 점으로 꼽았다. 이 관계자는 “이경규, 강호동 믿고 보는 두 MC가 이끌어가지만 이들이 주인공이라기보다는 매번 문을 열어주시는 우리 이웃이 주인공이다. 보통의 예능은 ‘어떤 연예인이 웃기고 재미있다’라는 반응이 주가 된다. 하지만 ‘한끼줍쇼’는 ‘어느 지역 편에 나온 어떤 주민이 재미있었다’라는 반응이 중심을 이룬다. 라이프스타일이나 성향 등이 비슷한 이웃의 출연에는 공감대를, 그렇지 않은 이웃에게는 신기한 감정도 느끼시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또한 포맷의 단조로운 구성, 그 한계를 뛰어넘은 것도 주민들이 전달하는 이야기의 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주민들은 자신들이 사는 이야기를 더 진솔하게 전달하는 등 연예인들에게서 듣기 힘든 말들을 꺼낸다. 여기에서 또 한번 공감의 힘이 발휘되는 것 같다. 내가 아닌 남들은 과연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하시는 분들도 많은데 이걸 해소할 수 있다는 것도 인기 요인이라고 본다. 게스트와 주민의 궁합이 잘 맞아 케미가 형성되는 것도 재미 시너지가 더욱 커지는 부분이다”라고 말했다.


한편 논란 없이 순항 중인 ‘한끼줍쇼’이지만 제작진이 방문할 집을 미리 섭외하는 게 아니냐는 조작 논란은 방송 초반부터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그동안 이휘재, 셰프 이연복, 배우 문소리 부모님 집, 강릉 MBC 출신 배수빈 전 아나운서 등 유명인들의 집이 수차례 전파를 탔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한끼줍쇼’가 무조건 밥 먹기에 성공하는 것이나 화제성에 초점을 맞췄다면 가능성이 있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실패하는 것도 나름의 재미를 안기는 프로그램의 중요한 부분이라 즉흥적으로 이뤄진다. 미리 섭외한다는 건 프로그램 성격과 맞지 않다”며 선을 그었다.


어느덧 3주년 '한끼줍쇼', 소리 없이 강한 이유[SS예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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