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공간

하와이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신가요?

ㅋㅌㅌ 2019. 12. 19. 14:19

#사형수 출신 이승만 해외 독립운동 주도  

KBS 한국사전 – 이승만 제1부 / KBS 2008.8.30. 방송 

https://www.youtube.com/watch?v=SqMOfDesFXQ 

 

 

 

하와이...

당신은 하와이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신가요?

 

 

 

 

 

 

 

 

 

 

 

 

 

 

 

 

 

 

'한끼줍쇼', 가슴 뭉클한 재외동포 특집 3탄..우리가 알던 하와이가 아니다

한끼줍쇼 첫방송: 2016년 10월 19일 첫방송

한끼줍쇼 1주년:  2017년 7월 일본 요코하마와 신주쿠

한끼줍쇼 2주년:  2018년 4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와 사할린

한끼줍쇼 3주년:  2019년 12월 미국 하와이

 

매년 ‘재외동포’ 특집을 마련하는 ‘한끼줍쇼’는 2017년 일본 요코하마와 신주쿠, 2018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와 사할린 편에 이어 미국 하와이 땅을 밟았다. 하와이 한인 이주 역사의 발자취를 따라가보고 재외동포들을 만나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
한끼줍쇼는 하와이에서 3주년 특집으로 진행됐다. 2016년 방송을 시작해 올해로 3주년이 되는 것은 알겠지만 첫 방송 날짜인 10월19일과 전혀 상관없는 12월에 그것도 하와이라는 여행지는 뜬금없는 구성인 듯 보였다.

 

그러나 '한끼줍쇼'는 '우리가 알지 못했던 하와이'라는 부제를 통해 일제강점기 당시 하와이로 노역을 하기 위해 왔던 이주민들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놨다. 이어 하와이 이주민들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독립 의연금을 기부했지만 이후 인정받지 못하며 국내 재입국이 불가하게 된 이유까지 설명했다.

하와이 한인들의 독립운동사

하와이의 의연금이 없었다면 임시정부 운영이 어려웠다

하와이 애국단 7명 - 이봉창 의사, 윤봉길 의사 의거 자금 지원

고국이 그리웠지만, 영사관에선 비자를 주지 않았다.

하와이 한반도 모양의 마을인 '하와이 카이'

 

#우리가 몰랏던 하와이

#하와이 이민 역사 #한국학 연구센터 #하와이 독립운동 #이승만

 

하와이 주립대 한국학 연구센터를 들러, 사탕수수 농장에서 시작한 하와이 한인들의 독립운동 역사에 대해 들었다. 김창환 목사는 당시의 자료를 꺼내 보여주며 “하와이 이민자들이 모은 의연금이 없었다면 임시정부의 운영이 어려웠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인들은 오직 독립을 바라며,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며 모은 돈을 모두 독립자금에 보탰다는 것이다. 특히 “하와이 애국단 7명이 당시 1000달러를 모았다”는 김 목사의 말은 모두를 놀라게 했다. 하지만 7인은 영사관에서 비자를 내주지 않아 한국 땅을 밟지 못했다고 해 보는 이들을 더욱 안타깝게 만들었다.

 

1902년 12월 22일, 하와이로 떠나는 조선인들을 태운 갤릭호가 제물포항에서 121명을 태우고 출발했다. 

1903년 1월 13일 최종 102명(통역관 2명 제외)이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하와이에 도착한 후 사탕수수농장에서 일했다. 이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채찍으로 맞아가며 일해야 할 정도로 가혹한 노동 조건, 낮은 임금, 그리고 차별이었다. 주한 미국 공사 알렌이 조선인 고용을 주선했고, 그렇게 해서 1905년까지 65차례에 걸쳐 조선인 7,226명이 하와이에 도착했다. 

 

1910년 자치단체로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인국회가 설립되었고, 1914년 박용만은 미 하와이에서 대조선 국민군단을 결성하여 무장투쟁을 준비하기도 하였다. 한편 미주 교민들은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가장 큰 재정 지원을 하였으며 한국 광복군 창설에도 큰 보탬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 중의 일부는 미국 본토, 멕시코, 쿠바 등지로 이주해 갔다. 하와이 교민들은 학교와 교회 등을 세우고 자치 단체를 만들어 한인 사회를 발전 시켰다.

 

하와이는 한일합방의 굴욕 속에서 상해 임시정부의 재정을 지원한 독립운동의 거점이었으며, 민족 교육 운동의 성지였다. 1954년에 설립된 인하대는 인천과 첫 해외 이주민의 역사 하와이 첫 음을 따서 교명을 지었다. 대학 설립 자금은 우남 이승만이 1918년부터 운영한 하와이 한인기독학원 매각대금과 정부지원금, 그리고 시민 성금이 포함됐다.

 

한국학 연구센터에 간 네 사람은 사탕수수 농장에서 시작된 하와이 한인들의 독립운동사를 알게 됐다. 김창환 목사는 "하와이의 의연금이 없었다면 임시정부 운영이 어려웠다"라고 밝혔다.

 

그는 "하와이 애국단 7명이 그 당시 천 불을 모았다"라고 밝혔다. 지금으로 치면 약 12억 원 정도 되는 돈이라고. 그는 "이봉창 의사, 윤봉길 의사 의거 자금을 7분이 댔다. 그분들은 고국이 그리웠지만, 영사관에선 비자를 주지 않았다. 얼마나 원통했겠냐"라고 말해 먹먹함을 안겼다. 

 

 

 

 

하와이 제도는 여덟 개의 유인도와 부속도서로 이뤄졌다. 1898년 미국에 병합됐으며, 사탕수수 농장 개발 이후 한국, 중국, 일본, 필리핀 등 다국적 노동자가 이민사회를 개척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loORyi6vKlk

하와이 독립운동 기록 97년 만에 최초 국내 공개 / KBS뉴스(News)

 

 

 

 

 

미국 하와이의 독립운동 거점인 '대한인국민회' 한국독립문화원, 무명애국지사 추모비

호놀룰루시 루크 애비뉴 2756번지에 있는 하와이 한국독립문화원 전경과 뒤뜰에 세워진 무명애국지사 추모비. 이 건물은 1947년부터 대한인 국민회관으로 사용됐었다.

 

 

 

 

 

이승만이 세운 한인기독교회

 

호놀룰루 릴리하 스트리트 139번지. 하와이와 빼놓을 수 없는 인연인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1918년 세운 한인기독교회이다.

 

 

 

대조선국민군단

 

1914년 6월 10일하와이 오아후(Oahu)섬 코올아우(Koolau)지방 카할루우(Kahaluu)의 아후이마누(Ahuimanu)농장에서 독립군사관을 양성할 목적으로 만든 군사교육단체. 국민군단은 박용만이 1909년 6월 네브라스카 헤스팅스에서 시작한 한인소년병학교의 군사운동정신을 계승한 것으로 미주한인사회에 항일독립전쟁론을 구현하고자 만든 단체였다.

 

 

 

광화문의 외형을 모델로 설계된 한인기독교회

1937년 10월 3일 개천절에 맞춰 착공한 교회는 서울 광화문(光化門)의 외형을 모델로 설계됐다. 설계자는 이승만이 세운 한인중앙학원의 첫 졸업생이자 한국인 최초의 건축사인 김찬재였다.

 

하와이에는 해외에서 처음으로 독립선언서 낭독과 만세삼창을 하며 삼일운동 경축 모임을 했던 한인기독여학원 자리인 카이무키의 알리이올라니 초등학교 등 하와이에는 

24곳의 독립운동 유적지가 있다. 

 

 

 

 

 

 

 

 

http://www.newdaily.co.kr/site/data/html/2014/08/29/2014082900012.html


교과서는 말하지 않는 하와이 독립 운동
하와이 독립운동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있지 않고 잘 모르는 데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교육에 있다. 대부분의 역사 교과서들은 항일 무장 독립투쟁,상하이 임시정부 그리고 광복군 등 만을 항일 독립운동 서술의 주축으로 삼고 있다

 

이승만은 1899년 1월 한성감옥에 투옥되었다. 감옥에서 『청일전기(淸日戰紀)』를 편역하고, 『독립정신』을 저술하였다. 또한 『신영한사전』을 편찬하였으며, 『제국신문』에 논설을 투고하였다. 『독립정신』은 그가 출옥한 이후인 1910년 LA에서 처음으로 출판되었다. 『청일전기(淸日戰紀)』는 1917년 하와이에서 출간되었다.


1904년 8월 9일 특별 사면령을 받고 감옥에서 석방되었다. 같은 해 11월 민영환(閔泳煥)과 한규설(韓圭卨)의 주선으로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기 위해 미국으로 갔다. 배재대학부 영문학과 학력을 인정받아 1905년 2월 워싱턴 DC의 조지워싱턴 대학(George Washington University)에 2학년 장학생으로 편입하였다. 
이승만은 워싱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전권 대사로서 한국의 독립 문제를 군축회의 의제로 상정시키고자 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 하였고, 1922년 9월 하와이로 돌아갔다. 교육과 종교 활동에 전념하던 그는 1924년 11월 호놀루루에서 조직된 대한인동지회 종신 총재에 취임하였다. 
1925년 3월 이승만은 자본금 7만 달러의 동지식산회사를 설립하고 하와이섬 올라(Olaa) 지방에 임야 3.86km²(약 117만 평)를 매입했다. 그는 곧바로 이 땅에 ‘동지촌(同志村)’이란 이름을 붙이고 개간사업을 시작했다. 사탕수수 농장에서 더 이상 일할 수 없는 노령(老齡)의 한인 동포들을 모아 농사를 함께 지으며 살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최근 《하와이 대한인국민회 100년사》란 책을 펴낸 이덕희 미주한인재단 이사장은 하와이 독립운동사의 최고 전문가로 손꼽힌다. 그는 “이승만이 하와이에 25년 살면서 가장 주력한 사업은 결국 ‘교육’”이라며 “언젠가 나라를 다시 세우려면 지도자 양성이 가장 시급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국내를 비롯해 만주와 상하이 등 여러 곳에서 독립운동가들이 숭고한 활동을 했지만, 이승만만큼 장기적인 비전을 보고 독립과 건국을 준비한 인물은 없었습니다. 최근 그를 향한 악의적 역사 왜곡은 정말 문제가 크다.

한국에서 주류시각은 이승만을 독재자로 규정하고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만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데, 한 사람에 대한 평가는 공과가 구분돼야 한다. 이승만의 ‘과’는 많은 이가 잘 알지만, 독립운동에 대한 업적과 행보는 지나치게 무시된 듯하다.


하와이 이민사 전문가들에 따르면 1909년부터 1920년까지 하와이 국민회가 모은 독립자금은 300만 달러가 넘었다. 대부분은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송금됐다. 동포들의 국권회복 운동에는 부녀들의 활약도 컸다.
1919년 3월15일 창립된 대한부인구제회도 ‘독립운동하다 다친 사람과 죽은 사람(가족)에게 구제비를 송금한다’, ‘조국 독립을 위해 일한 사람에게 송금한다’는 내용의 헌장을 정하고 중국 중경 한인 독립군단과 독립운동 중  부상당한 이들을 위해 1,500달러를 보냈는데 이는 지금돈으로 쳐도 7만~8만 달러 정도로 큰돈이었습니다. 조국 광복을 위해 먼 이국땅 하와이 사탕수수밭 중노동 속에서도 오로지 조국 광복을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며 독립자금을 마련한 이민자들의 헌신적인 나라사랑 정신 역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교과서는 말하지 않는 하와이 독립 운동
올해는 대한민국이 1919년 3월 1일 일본의 식민통치에 항거하여, 독립선언서를 발표한지 벌써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러나 현재 하와이에서 그나마 몇 남지 않은 독립 유적들은 심각할 정도로 방치돼 있다. 24곳의 하와이 독립운동 유적지 상황은 대체로 비슷했다. 대부분 평범한 주택가가 된 역사의 현장은 팻말이나 표지석 하나 없었다. 독립운동의 주요 자금원이었던 하와이는 지금까지 상하이나 만주 지역 등 중국의 독립유적에 비해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와이 독립운동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있지 않고 잘 모르는 데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교육에 있다. 대부분의 역사 교과서들은 항일 무장 독립투쟁,상하이 임시정부 그리고 광복군 등 만을 항일 독립운동 서술의 주축으로 삼고 있다

 

이승만은 1899년 1월 한성감옥에 투옥되었다. 감옥에서 『청일전기(淸日戰紀)』를 편역하고, 『독립정신』을 저술하였다. 또한 『신영한사전』을 편찬하였으며, 『제국신문』에 논설을 투고하였다. 『독립정신』은 그가 출옥한 이후인 1910년 LA에서 처음으로 출판되었다. 『청일전기(淸日戰紀)』는 1917년 하와이에서 출간되었다.


1904년 8월 9일 특별 사면령을 받고 감옥에서 석방되었다. 같은 해 11월 민영환(閔泳煥)과 한규설(韓圭卨)의 주선으로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기 위해 미국으로 갔다. 배재대학부 영문학과 학력을 인정받아 1905년 2월 워싱턴 DC의 조지워싱턴 대학(George Washington University)에 2학년 장학생으로 편입하였다. 
이승만은 워싱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전권 대사로서 한국의 독립 문제를 군축회의 의제로 상정시키고자 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 하였고, 1922년 9월 하와이로 돌아갔다. 교육과 종교 활동에 전념하던 그는 1924년 11월 호놀루루에서 조직된 대한인동지회 종신 총재에 취임하였다. 
1925년 3월 이승만은 자본금 7만 달러의 동지식산회사를 설립하고 하와이섬 올라(Olaa) 지방에 임야 3.86km²(약 117만 평)를 매입했다. 그는 곧바로 이 땅에 ‘동지촌(同志村)’이란 이름을 붙이고 개간사업을 시작했다. 사탕수수 농장에서 더 이상 일할 수 없는 노령(老齡)의 한인 동포들을 모아 농사를 함께 지으며 살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최근 《하와이 대한인국민회 100년사》란 책을 펴낸 이덕희 미주한인재단 이사장은 하와이 독립운동사의 최고 전문가로 손꼽힌다. 그는 “이승만이 하와이에 25년 살면서 가장 주력한 사업은 결국 ‘교육’”이라며 “언젠가 나라를 다시 세우려면 지도자 양성이 가장 시급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국내를 비롯해 만주와 상하이 등 여러 곳에서 독립운동가들이 숭고한 활동을 했지만, 이승만만큼 장기적인 비전을 보고 독립과 건국을 준비한 인물은 없었습니다. 최근 그를 향한 악의적 역사 왜곡은 정말 문제가 크다.

한국에서 주류시각은 이승만을 독재자로 규정하고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만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데, 한 사람에 대한 평가는 공과가 구분돼야 한다. 이승만의 ‘과’는 많은 이가 잘 알지만, 독립운동에 대한 업적과 행보는 지나치게 무시된 듯하다.


하와이 이민사 전문가들에 따르면 1909년부터 1920년까지 하와이 국민회가 모은 독립자금은 300만 달러가 넘었다. 대부분은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송금됐다. 동포들의 국권회복 운동에는 부녀들의 활약도 컸다.
1919년 3월15일 창립된 대한부인구제회도 ‘독립운동하다 다친 사람과 죽은 사람(가족)에게 구제비를 송금한다’, ‘조국 독립을 위해 일한 사람에게 송금한다’는 내용의 헌장을 정하고 중국 중경 한인 독립군단과 독립운동 중  부상당한 이들을 위해 1,500달러를 보냈는데 이는 지금돈으로 쳐도 7만~8만 달러 정도로 큰돈이었습니다. 조국 광복을 위해 먼 이국땅 하와이 사탕수수밭 중노동 속에서도 오로지 조국 광복을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며 독립자금을 마련한 이민자들의 헌신적인 나라사랑 정신 역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