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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러운 배재인

ㅋㅌㅌ 2017. 11. 10. 14:26

 

 

 

 

 

 

 

 

 

 

 

 

이승만. 여운형 . 주시경. 김소월. 서재필

 

 

자랑스러운 배재인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한글학자 주시경,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 개화기 지식인 서재필, 윤치호, 김지호, 의학자이자 사회사업가 오긍선, 민족 시인 김소월 소설가 나도향, 여윤형(자퇴)

 

이같은 선배들의 명성을 이어받아 '2003 UNICA 세계영화제'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동상을 수상한 손봉수군과 세계 요리올림픽대회(IKA Culinary Olympic 2004)에서 동상을 수상한 문보해, 이건희 군 등과 같은 인재가 속속 배출되고 있습니다.

 

 

 

 

 

 

 

 

 

 

 

 

<독립정신>은 이승만 대통령이 1899년 1월 9일 박영효 일파의 고종 폐위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한성감옥에 수감되었을 때 옥중에서 집필한 역사서이며 한국인 최초의 외교사 저술서이다. 이 책은 우리 대한 독립에 관계된 중요한 내용을 쓴 것이므로 이를 읽음으로써 독립이 무엇이며, 우리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그리고 당시 우리나라에 왜 독립정신이 필요했는지, 또 이후의 정세가 어떻게 변화될지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독립정신>은 20대 청년 우남 이승만이 옥중에서 집필한 그의 대표 저서로서, 5천년 동안 지속되어온 우리나라 왕정의 역사를 민주 공화정으로 탈바꿈시키고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을 제시한 책이다. 대한제국 시절 협성회 회보와 독립신문 주필, 교육계몽운동으로는 독립협회 활동 등을 하면서, 왕정 폐지와 공화국 수립을 도모하였다는 반역의 죄목으로 옥살이를 하였으며, 독립정신을 저술하였다.

 

"폴란드는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에 분할되어 망하였지만, 그 국민들이 마음속에 항상 조국을 잊지 않고 이를 회복하려 노력한다면 전과 같은 독립국이 될 수 있다."

 

을사조약 직전에 쓴 이 책에서 이승만은 폴란드의 사례를 들어 다가올 일본의 주권침략에 대한 우리 민족의 대응자세를 주문한다. 이 책의 핵심은 '독립정신 실천 6대 강령'에 요약되어 있다.

 

이승만 독립정신 실천 6대 강령

 

첫째, 우리는 세계에 대해 개방해야 한다.

둘째, 새로운 문물(文物)을 자신과 집안과 나라를 보전하는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셋째, 외교를 잘해야 한다.

넷째, 나라의 주권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다섯 째, 도덕적 의무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여섯 째, 자유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첫째, 우리는 세계에 개방하고 통상해야 한다

① 우리는 세계와 반드시 교류해야 한다. 서양의 새로운 문물을 우리 혼자 막아선 안된다.

② 통상은 서로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한다. 증기선, 열차, 전보, 우편 등 각종 교통 및 통신 수단을 발명한 서양의 기술들을 하루 속히 배워 우리도 시시각각으로 전국이 고르게 발전해야 한다. 이로써 모든 나라들을 이웃처럼 사귀면 공통의 이익을 누리게 된다.

③ 오늘날 통상은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기본이다. 일찍이 산업화에 눈을 떠 새 물건을 만들어 각국에 수출한 영국처럼 해야 한다. 오늘날 전쟁은 상권 쟁탈전이다. 국제 상업을 부국의 근본으로 삼아야한다.

④ 외국인들이 들어오는 것은 우리를 해치려는 게 아니라 서로에게 이익이 된다. 물품의 수입과 수출을 균형있게 해야 외국과 똑 같은 이익을 얻을 수 있다.

⑤ 외국인들을 무조건 원수 같이 여기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동학란이 청일전쟁을 일으켰듯이 백성이 어리석은 것은 나라를 멸망시키는 지름길이다.

 

둘째, 새로운 문물을 자신과 집안과 나라를 보전하는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① 외국인들과 함께 살면서 우리 것을 보전하면서 우리도 균등한 이익을 볼 수 있게 하자.

   우리가 얕보던 일본인들에게 경제권을 모두 내주면 안된다. 경쟁해서 이겨야 한다. 외국인으로부터 무식하다는 말을 듣지 않으려면 우리도 문명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② 세계의 새로운 학문을 공부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이 국제법, 통상조약, 우리나라 역사와 자리에 대해 공부하고 실천해야 한다. 일본이 그동안 성공한 것은 지도층부터 개화하고 국민을 가르치고 인도한 덕분이다. 우리나라 지도층엔 기대할 수 없으니 백성이 공부하자.

③ 신학문을 익혀 외국인들에게 경제적 이익을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 농업을 연구하여 외국인들에게 황무지를 빼앗기지 말고 우리가 개간하고, 농사를 기계화하고, 상업과 광산학, 항해술, 전신과 우편, 어업, 산림벌채와 조림 등을 우리가 외국인들보다 잘해야 한다. 물품을 외국보다 값  싸게 잘 만들어 수출하고, 국민이 한마음으로 국산품을 산다면 부강해질 것이다.

④ 신학문의 혜택을 누려야 한다. 빨리 외국어를 공부하여 번역서만 읽지 말고 우리 글로 책을 많이 내야 한다. 그러려면 외국 유학을 많이 가야한다. 공부가 잘살기 위한 투자이다. 우리 나라가 자립하려는 의지를 자꾸 키워야 한다.

 

셋째, 외교가 나라를 유지하는데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① 외교가 없다면 나라는 고립되며 다른 나라의 침략을 받기 쉽다. 국제법을 잘 지켜야 다른 나라로부터 대접도 잘 받는다. 특히 강대국 사이에서 약한 나라가 국가보존을 위해서는 외교가 너무나 중요하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이런 사실을 몰라서 큰 불행을 당하였다.

② 다른 나라와 친밀한 관계를 가지려면 모든 나라를 공평하에 대해야 한다.오직 원칙과 법을 기준으로 공평한 외교를 해야하며, 문명국가의 도덕적 원칙이 중요하다. 

③ 외국과 우방이 되려면 그 나라들과 공통된 특성을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 진정한 친구, 진정한 우방이 되려면 문화를 공유하고 법과 정치, 학문과 도덕이 무엇인지 본받을 것은 본받아 실행하면 자연스레 긴밀해지고 우리를 도와주러 올 것이다.

④ 진실을 외교의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외국과 협상함에 있어 권모술수를 부리면 당장은 이긴 것 같지만 큰 손해가 된다. 국가망신은 물론이고 망국의 원인까지 될 것이다.

⑤ 국내 외국인들의 잘못은 시시비비를 분명하게 가려야 한다. 나 혼자 살기 위해 외국인의 잘못된 일에 굴복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침략당하는 문을 열어주는 것이 된다.

 

넷째, 나라의 주권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① 외국인에 치외법권 허용은 수치로 알고 회복해야 한다. 그러려면 우리나라도 비인도적인 형벌등을 폐지, 법치주의를 도입하여 외국법과 같도록 빨리 고쳐야 한다.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려면 인도적 사업을 많이 하고 우리의 수준높은 문화를 널리 알려야 한다.

② 자신의 직분을 다한 후에야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수 있다. 

③ 외국인의 조롱거리가 되는 일은 모두 고쳐 업신여김을 받지 않도록 해야한다.

④ 국기를 존중하는 것을 배워야한다. 국기도 모르고 나라의 주권도 모르고 침해하는 사람이 있으면 원수로 여겨야 한다.

⑤ 어떤 일이 있어도 외국 국적을 갖지 말아야 한다.

⑥ 우리나라는 외국 빚을 빌리는 것을 삼가야 한다. 강한 나라는 항상 돈을 빌려주고 그것을 빙자하여 내정간섭을 하므로, 주권을 잃게 되는 지름길이다.

 

다섯째, 도덕적 의무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① 뜻이 같은 사람끼리 감정을 표현해서 뭉쳐야 한다. 기회주의자나 중상모략자, 나라를 팔아먹는 자는 어떤 이유로든 용납해선 안된다. 선악을 분명이 구분하여 정의사회를 만들자.

② 우리는 공적(公的) 의무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나라를 위한 일을 할때는 부모형제 간의 천륜이라도 내던질 줄 알아야 하며, 임금이 백성을 해치고 영토를 팔아넘기고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데도 임금이라 하여 그에 따르는 것은 나라를 위한 것이 아니다.

③ 나라에 충성함에는 용기를 가지고 행동해야 한다. 나라가 곤경에 처했을 때가 큰 공로를 세울 수 있는 기회이다. 역사상 유명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이 그렇다. 지금 우리나라도 그런 때이므로 어찌 일신이나 가족을 걱정하고 있을 수 있겠는가.

 

여섯째, 자유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① 자유를 자기 목숨처럼 여기며 남에게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② 다른 사람의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 지금까지 내려온 온작 억압하는 폐습을 버리고 아랫사람과 천민들을 자유롭게 하여 법 앞에서 평등하게 하여 자유롭게 공부하여 성공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놔야 한다. 그렇게 되면 나라 전체에 활력이 생기고 부유해지고 강력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야말로 독립된 나라를 세우는 근본이 되는 것이다.

 

 

 

 

대한제국 시절 이승만 

 

대한제국 시절 협성회 회보와 독립신문 주필, 교육계몽운동으로는 독립협회 활동 등을 하면서, 왕정 폐지와 공화국 수립을 도모하였다는 반역의 죄목으로 옥살이를 하였으며, 독립정신을 저술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한성 임시정부와 각지에서 수립된 임시정부의 수반을 거쳐 1919년 9월 11일부터 1925년 3월 23일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역임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 국무위원회 외교위원 등을 역임했다. 주로 미국에서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을 벌였다.

 

일제 강점기 중반에는 미국 및 스위스 등을 무대로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한편 일본내막기를 저술하는 등 일본의 미국 침략을 경고하였으며 태평양 전쟁 이후 미군 OSS와 임시정부 간의 연결을 주선하였다. 대한민국의 독립을 공약한 1943. 11. 27. 카이로 선언의 배경에는 이승만의 집요한 외교노력이 있었고 그 결실이었다.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미국 체신청에서 발행한 태극기 모양 우표 발행에 크게 기여했으며, 항일 단파 라디오 방송 연설 등에도 참여하였다. 1945년 해방 후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에 추대되었으나, 귀국 후 거절하였다.

 

초등학교 의무교육 도입으로 문맹률을 획기적으로 낮춘 점. 국민 학교 의무 교육제도 실시. 전국 만 7세 아동의 95.3%가 초등학교에 입학. 전문적 인재 육성을 위해 한국외국어대학교, 인하대학교, 배재대학교 등 많은 대학교를 세움. 그 결과 문맹률은 22%로 떨어짐.

 

지주가 독식하고 있었던 서민은 소작농에 불과했던 한국의 토지개혁. 1950년 3월에 농지개혁법을 단행하여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있던 지주제를 혁파하고 농민들의 불만을 해소하는데 성공한다. 이 농민 불만 해소야말로 6.25전쟁 초반의 패전을 극복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원인

 

이승만은 재임기간 12년동안 미국으로부터 일본과 수교를 맺으라는 수 많은 협박과 회유가 있었지만, 일본과의 수교조건으로 대마도 반환,  식민지보상 36억불 청구 등 사실상 일본이 받아 들일 수 없는 요구를 함으로써 그는 끝끝내 일본과의 수교를 거부했다.

 

'UTC+9'를 표준시로 삼은 건 1912년 1월부터인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나라는 해방 뒤인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이 일제 잔재 청산을 명분으로 동경 127도30분으로 바꿨다. 그러나 1961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 쿠데타 뒤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국제관례를 이유로 시간대를 돌이켰다. 실제 6·25 전쟁 직후 이승만 정부에선 30분 차이가 나는 표준시를 썼다. 동경 127도 30분 표준자오선에 따른 결정으로, 현재 북한의 것과 같다.

 

한국의 서울 및 수도권을 기준으로 볼 때 경도는 동경 `126도 5분~127도 5분` 사이에 위치하는데 중간값 127도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경도 1도당 4분 정도의 시차가 있으므로 토쿄 시간과는 약 32분의 차이가 있다. 그러다 1961년 박정희가 다시 동경 135도를 기준으로 삼는 법안을 만들어 오늘에까지 이르렀다. 왜 일본 식민 사상에 젖어 살아가고 있는건가? 말로는 친일청산 이라고 할뿐. 생활과 표준은 일본 기준에 맞춰 살고 있는것인가.

 

1952년 1월 18일 독도를 포함한 '이승만 라인' 설치하였다. 1954년 1월18일 이승만은 독도 한국령 표지석을 건립 하었다. 

1954년 8월10일 

무인도 독도에 등대불이 켜졌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4년 8월10일 '깜짝 이벤트‘를 벌였다. 미리 독도에 등대를 세워놓고 미국 방문 일정에 맞춰 전세계를 향해 등대 점등식을 열었던 것이다. 일본과 미국이 깜짝 놀란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대한민국 국토의 동쪽 끝 땅임을 알리는 독도 등대불! 일본에 남의 땅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 등불이었다. 

 

한국 지방자치 시작 이승만
우리나라 대부분의 일반인들은 1950년 대 그것도 전쟁 중인 1952년에 지방자치가 처음으로 실시 된지 잘 모른다. 1948년 첫 헌법을 제정할 때부터 지방자치를 규정 하였고, 이를 구체화한 『지방자치법』을 1949년 7월 4일 제정하였다. 해방 후 미군정에서도 명목상 지방자치와 비슷핫 제도를 시행하려 했지만 미군정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부를 원했기에 제대로 실시하지 않았다. 이승만 정권 시대에 와서야 지방자치가 실시된다. 이승만은 1949년 12월 한 번도 시행되지 않은 지방자치법을 개정, 국내적 불안정을 이유로 지방자치의 실시보류로 인한 지방행정의 공백에 대응하였다.

이승만은 지방자치제를 도입하여 한국의 풀뿌리 민주주의를 성장시켰다. 이승만이 도입한 지방자치제는 박정희의 쿠데타 이후 폐지되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당시 단식투쟁을 불사하며 "지방자치제는 민주주의를 위해 꼭 필요했다"고 호소했다. 거의 30년이나 지나서야 노태우 정권에서 다시 부활했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후 행적은 논란이 될만한 건 부정할수 없지만, 대한제국 시절의 행위는 이게 팩트이다. 이승만은 두개의 얼굴을 가진 야누스를 닮은 거인으로 비쳐지고 있다. 한민족의 독립과 번영의 기초를 다진 국부로 추앙 받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 지나친 친미, 종미주의 경향과 한번도의 통일을 저해하고 민주주의를 압살시킨 시대착오적 독재자로 매도당하고 있다.

 

이승만 동상은 지난 1987년 2월 당시 배재대 졸업 동문들이 기증해 세웠다. 많은 철거 논란이 있었지만 배재대학교 측은 대학총동창회, 총학생회와 함께 지난 2008년 6월 5일 우남관 앞에 다시 동상을 세웠다.

 

 

 

배재학당

 

고종황제는 1887년 ‘유용한 인재를 기르고 배우는 집’이라는 뜻으로 배재학당(培材學堂)이란 이름을 하사하였다. 배재학당이 있는 정동은 한국 근대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대한제국의 정궁이라고 할 수 있는 덕수궁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외교, 정치, 종교, 교육, 문화 등 역동적인 역사를 고스란히 머금고 있는 공간이다. 특히 배재학당 동관 건물은 서울시 기념물 제 16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건물은 현재 다양한 근대 유물들과 함께 배재학당역사박물관으로 이용하면서 시대를 넘어 현재의 학생들을 위한 교육의 장이 되고 있다.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뒤로 배재대학교, 배재중고등학교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서울 하월곡동 배재대학교 기공식 (1959년 11월)
배재대학교가 인서울 하지 못하게 된 이유
일제 감정기 일제 감정기 당시 배재학당 출신 학생들이 독립운동을 너무 열심히 했기 때문에 총독부에서 배재학당을 강력히 규제하며 대학설립을 방해했다고 한다. 다른 사립학교인 연희전문학교 (현 연세대학교)나 이화여자 전문학교(전 이화학당, 현 이화여자대학교)는 총장인 윤치호와 김활란이 친일 행위로 인해 일제에 의한 학교규제가 비교적 느슨했던 편이었다. 

고려대, 동아일보 설립자 김성수는 전국 일간지에 내선일체 찬양글, 학도병 권유, 징병, 학병을 찬양하며 선전·선동하는 글을 기고하는 등 친일 반민족 행위가 인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등록되어 건국훈장이 박탈 되었다. 후손에게 전한 보물 '서울미래유산' 10선... 7. 김성수 가옥 (종로구 계동 132-1) 이것도 해지 되어야 하는거 아닌가요?

 

이승만 시절 서울 하월곡동에 의대까지 포함된 배재대 건축 기공식을 갖고 작업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승만 하야 사건으로 인해 배재대학교 서울 건립을 잠정으로 정지되게 된다. 지역적으로 1%에 불과한 서울에 대한민국 인구의 20%가 몰려있고 서울 경기에 한국 인구의 절반이 몰려있다. 서울지역 39곳과 경기·인천지역 27곳 등 총 66개 대학교가 있다. 많은 지방 대학들이 서울, 경기 지역에 캠퍼스를 지을려고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지역주민과 대학간 잡음이 엄청나다. 하지만 배재대학교는 인서울 대신 대전의 명품사학으로 태어나는 길을 선택했다.
박정희 정권 시절 강력한 수도권 팽창 억제정책이 시행되면서 서울지역에는 신규 대학의 설립은 물론 기존대학의 정원증가도 허가하지 않았다. 배재대학교는 서울에 대학 설립 논의가 꽤 오랫동안 오고 갔으나 시기를 놓쳐서 결국 인서울이 아닌 대전에 대학을 설립하게 되었다.

 

 

 

 

 

 

1885. 08. 03 배재학당 (Pai Chai Academy培材學堂) 창립 (설립자 아펜젤러 H. G. Appenzeller) 

1886. 04 .01 초대학당장 아펜젤러 취임

1886. 06. 08 고종황제로부터 '배재학당' 현판 하사 

1895. 09. 01 배재대학부 (Pai Chai College) (영문학과, 국한문학과, 신학과)

1896. 04. 07     배재학당내에서 「독립신문」발간(서재필)

1896. 11. 30     배재협성회(학생회) 조직(지도 서재필)

1925. 09. 17 조선총독부에 의해 배재학당 교명 폐지

1937. 03. 03 배재중학교(5년)로 개칭  

1951. 08. 21 배재중학교(3년) 및 배재고등학교(3년)로 개편

1955. 04. 26 대전보육학원 설립 (설립자 허길래, Clara Howard)

1981. 03. 01 개교 배재대학

1992. 03. 13 배재대학교 (Pai Chai University)

 

... College에서 University 되는데 97년의 시간이 필요

 

 

1885년 배재학당 (Pai Chai Academy, 培材學堂)

 

1885년 8월 3일, 미국의 감리교 선교사인 헨리 아펜젤러가 서울에 세운 한국 최초의 근대식 중등교육기관이며 배재중학교, 배재고등학교, 배재대학교의 전신이다. PAICHAI ACADEMY 번역이 배재학당 이고 대학이라는 제도가 우리나라에 만들어지지 않았을 때라 학당이라고 한 것이다.

 

1895년 배재대학부 (Pai Chai College)

 

1885년 헨리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을 모체로 하여 1895년 배재대학부(Pai Chai College)를 설립하였다. 배재학당은 예비과정(preparatory dept.), 교양과정(academic dept.), 대학과정(college dept.)으로 나뉘어진 각 과정마다 교과과정에도 반영되어 기본 교과목으로 영어, 한문, 언문, 문법 등이 개설되었다. 1895년 영문과 106명, 국한문과 60명, 신학과 6명의 입학으로 정규 대학과정이 시작되었다.

 

아펜젤러는 “통역관을 양성하거나 우리 학교의 일꾼을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 교육을 받은 사람을 내보내려는 것이다”라고 설립목적을 밝혔고, ‘욕위대자 당위인역(欲爲大者當爲人役)’이라는 학당훈(訓)을 내걸었다. 그리스도교인과 국가 인재양성을 위하여 일반 학과를 가르치는 외에, 연설회·토론회 등을 열고 사상과 체육 훈련에 힘을 쏟았다. 당시 배재학당에 설치되었던 인쇄부는 한국의 현대식 인쇄 시설의 효시이다. 
대한제국에서 배재학당을 지원한 이유는 독립협회와 신진 세력양성기관으로 고종이 지원하였으며 고종페위사건당시 이승만은 배배학당 학생을 동원하여 이를 저지하고 왕실과 자주독립을 위해 노력한바 커 

학교운영자금을 지원해 주었다

 

그리고 1992년 배재대학교 (Pai Chai University)

 

 

양자 역학의 역설 '슈뢰딩거의 고양이'의 역설과 배재대학교 기원 

 

양자 역학에서는 관찰 대상의 본질을 규정할 수 없다고 한다. 관찰자의 생각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관찰자가 어떤 생각에 의해, 어떤 관찰 프레임으로 관찰하느냐에 따라 대상의 본질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