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팩트체크] 진실은 편리하지 않아요

ㅋㅌㅌ 2017. 11. 11. 02:59

 

자랑스런 배재인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한글학자 주시경,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 개화기 지식인 서재필, 윤치호, 김지호, 의학자이자 사회사업가 오긍선, 민족 시인 김소월 소설가 나도향, 여윤형(자퇴)

 

 

1885. 08. 03 배재학당 (Pai Chai Academy, 培材學堂) 창립 (설립자 아펜젤러 H. G. Appenzeller) 
1887. 09  배재학당 신학 교육 실시 (감리교신학대)
1895. 09. 01 배재대학부 (Pai Chai College) (영문학과, 국한문학과, 신학과)
... 이걸 계기로 배재학당내 기독교연합대학 설립(연희전문 전신)... 연세대학교
....연세대학교에 아펜젤러관, 이승만 연구원이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연세대.. 1912 기독교연합대학 vs 1885 광혜원???
연세대학교 의료원은 1885년 미국 선교의사 호러스 뉴턴 알렌에 의해 세워진 한국 최초의 현대적 의료기관으로서 광혜원으로 출발하여 제중원, 세브란스병원을 거쳐 현재의 의료원으로 성장하였다. 1957년에 세브란스의과대학이 배재학당내 기독교연합대학 설립(연희전문 전신) 연희대학교와 통합하면서 연세대학교가 출범하였다.

 

[체크포인트] 씨스뿜바...씨스뿜바..씨스뿜바..

아카라카쵸쵸쵸 ~

아카라카칭(아라칭) 아카라카쵸(아라쵸)
아카라카 칭칭 쵸쵸쵸 (아라칭칭쵸쵸쵸)
랄랄라 시스붐바 연세선수 라플라 헤이 연세 야
....
우리 배재학당 배재학당 노래합시다 
노래하고 노래하고 다시 합시다 
우리 배재학당 배재학당 노래합시다 
영원 무궁하도록~~ 
라라라라 씨스뿜바 배재학당 씨스뿜바
라라라라 씨스뿜바 배재학당 씨스뿜바

 

 

 

 

 

 

 

 

 

 

 

<독립정신>은 이승만 대통령이 1899년 1월 9일 박영효 일파의 고종 폐위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한성감옥에 수감되었을 때 옥중에서 집필한 역사서이며 한국인 최초의 외교사 저술서이다. 이 책은 우리 대한 독립에 관계된 중요한 내용을 쓴 것이므로 이를 읽음으로써 독립이 무엇이며, 우리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그리고 당시 우리나라에 왜 독립정신이 필요했는지, 또 이후의 정세가 어떻게 변화될지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독립정신>은 20대 청년 우남 이승만이 옥중에서 집필한 그의 대표 저서로서, 5천년 동안 지속되어온 우리나라 왕정의 역사를 민주 공화정으로 탈바꿈시키고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을 제시한 책이다. 대한제국 시절 협성회 회보와 독립신문 주필, 교육계몽운동으로는 독립협회 활동 등을 하면서, 왕정 폐지와 공화국 수립을 도모하였다는 반역의 죄목으로 옥살이를 하였으며, 독립정신을 저술하였다.

 

"폴란드는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에 분할되어 망하였지만, 그 국민들이 마음속에 항상 조국을 잊지 않고 이를 회복하려 노력한다면 전과 같은 독립국이 될 수 있다." 을사조약 직전에 쓴 이 책에서 이승만은 폴란드의 사례를 들어 다가올 일본의 주권침략에 대한 우리 민족의 대응자세를 주문한다. 이 책의 핵심은 '독립정신 실천 6대 강령'에 요약되어 있다.

 

이승만 독립정신 실천 6대 강령

첫째, 우리는 세계에 대해 개방해야 한다.

둘째, 새로운 문물(文物)을 자신과 집안과 나라를 보전하는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셋째, 외교를 잘해야 한다.

넷째, 나라의 주권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다섯 째, 도덕적 의무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여섯 째, 자유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첫째, 우리는 세계에 개방하고 통상해야 한다

① 우리는 세계와 반드시 교류해야 한다. 서양의 새로운 문물을 우리 혼자 막아선 안된다.

② 통상은 서로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한다. 증기선, 열차, 전보, 우편 등 각종 교통 및 통신 수단을 발명한 서양의 기술들을 하루 속히 배워 우리도 시시각각으로 전국이 고르게 발전해야 한다. 이로써 모든 나라들을 이웃처럼 사귀면 공통의 이익을 누리게 된다.

③ 오늘날 통상은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기본이다. 일찍이 산업화에 눈을 떠 새 물건을 만들어 각국에 수출한 영국처럼 해야 한다. 오늘날 전쟁은 상권 쟁탈전이다. 국제 상업을 부국의 근본으로 삼아야한다.

④ 외국인들이 들어오는 것은 우리를 해치려는 게 아니라 서로에게 이익이 된다. 물품의 수입과 수출을 균형있게 해야 외국과 똑 같은 이익을 얻을 수 있다.

⑤ 외국인들을 무조건 원수 같이 여기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동학란이 청일전쟁을 일으켰듯이 백성이 어리석은 것은 나라를 멸망시키는 지름길이다.

 

둘째, 새로운 문물을 자신과 집안과 나라를 보전하는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① 외국인들과 함께 살면서 우리 것을 보전하면서 우리도 균등한 이익을 볼 수 있게 하자.

   우리가 얕보던 일본인들에게 경제권을 모두 내주면 안된다. 경쟁해서 이겨야 한다. 외국인으로부터 무식하다는 말을 듣지 않으려면 우리도 문명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② 세계의 새로운 학문을 공부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이 국제법, 통상조약, 우리나라 역사와 자리에 대해 공부하고 실천해야 한다. 일본이 그동안 성공한 것은 지도층부터 개화하고 국민을 가르치고 인도한 덕분이다. 우리나라 지도층엔 기대할 수 없으니 백성이 공부하자.

③ 신학문을 익혀 외국인들에게 경제적 이익을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 농업을 연구하여 외국인들에게 황무지를 빼앗기지 말고 우리가 개간하고, 농사를 기계화하고, 상업과 광산학, 항해술, 전신과 우편, 어업, 산림벌채와 조림 등을 우리가 외국인들보다 잘해야 한다. 물품을 외국보다 값  싸게 잘 만들어 수출하고, 국민이 한마음으로 국산품을 산다면 부강해질 것이다.

④ 신학문의 혜택을 누려야 한다. 빨리 외국어를 공부하여 번역서만 읽지 말고 우리 글로 책을 많이 내야 한다. 그러려면 외국 유학을 많이 가야한다. 공부가 잘살기 위한 투자이다. 우리 나라가 자립하려는 의지를 자꾸 키워야 한다.

 

셋째, 외교가 나라를 유지하는데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① 외교가 없다면 나라는 고립되며 다른 나라의 침략을 받기 쉽다. 국제법을 잘 지켜야 다른 나라로부터 대접도 잘 받는다. 특히 강대국 사이에서 약한 나라가 국가보존을 위해서는 외교가 너무나 중요하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이런 사실을 몰라서 큰 불행을 당하였다.

② 다른 나라와 친밀한 관계를 가지려면 모든 나라를 공평하에 대해야 한다.오직 원칙과 법을 기준으로 공평한 외교를 해야하며, 문명국가의 도덕적 원칙이 중요하다. 

③ 외국과 우방이 되려면 그 나라들과 공통된 특성을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 진정한 친구, 진정한 우방이 되려면 문화를 공유하고 법과 정치, 학문과 도덕이 무엇인지 본받을 것은 본받아 실행하면 자연스레 긴밀해지고 우리를 도와주러 올 것이다.

④ 진실을 외교의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외국과 협상함에 있어 권모술수를 부리면 당장은 이긴 것 같지만 큰 손해가 된다. 국가망신은 물론이고 망국의 원인까지 될 것이다.

⑤ 국내 외국인들의 잘못은 시시비비를 분명하게 가려야 한다. 나 혼자 살기 위해 외국인의 잘못된 일에 굴복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침략당하는 문을 열어주는 것이 된다.

 

넷째, 나라의 주권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① 외국인에 치외법권 허용은 수치로 알고 회복해야 한다. 그러려면 우리나라도 비인도적인 형벌등을 폐지, 법치주의를 도입하여 외국법과 같도록 빨리 고쳐야 한다.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려면 인도적 사업을 많이 하고 우리의 수준높은 문화를 널리 알려야 한다.

② 자신의 직분을 다한 후에야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수 있다. 

③ 외국인의 조롱거리가 되는 일은 모두 고쳐 업신여김을 받지 않도록 해야한다.

④ 국기를 존중하는 것을 배워야한다. 국기도 모르고 나라의 주권도 모르고 침해하는 사람이 있으면 원수로 여겨야 한다.

⑤ 어떤 일이 있어도 외국 국적을 갖지 말아야 한다.

⑥ 우리나라는 외국 빚을 빌리는 것을 삼가야 한다. 강한 나라는 항상 돈을 빌려주고 그것을 빙자하여 내정간섭을 하므로, 주권을 잃게 되는 지름길이다.

 

다섯째, 도덕적 의무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① 뜻이 같은 사람끼리 감정을 표현해서 뭉쳐야 한다. 기회주의자나 중상모략자, 나라를 팔아먹는 자는 어떤 이유로든 용납해선 안된다. 선악을 분명이 구분하여 정의사회를 만들자.

② 우리는 공적(公的) 의무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나라를 위한 일을 할때는 부모형제 간의 천륜이라도 내던질 줄 알아야 하며, 임금이 백성을 해치고 영토를 팔아넘기고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데도 임금이라 하여 그에 따르는 것은 나라를 위한 것이 아니다.

③ 나라에 충성함에는 용기를 가지고 행동해야 한다. 나라가 곤경에 처했을 때가 큰 공로를 세울 수 있는 기회이다. 역사상 유명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이 그렇다. 지금 우리나라도 그런 때이므로 어찌 일신이나 가족을 걱정하고 있을 수 있겠는가.

 

여섯째, 자유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① 자유를 자기 목숨처럼 여기며 남에게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② 다른 사람의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 지금까지 내려온 온작 억압하는 폐습을 버리고 아랫사람과 천민들을 자유롭게 하여 법 앞에서 평등하게 하여 자유롭게 공부하여 성공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놔야 한다. 그렇게 되면 나라 전체에 활력이 생기고 부유해지고 강력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야말로 독립된 나라를 세우는 근본이 되는 것이다.

 
 

 

 

대한제국 시절 이승만 

 

대한제국 시절 협성회 회보와 독립신문 주필, 교육계몽운동으로는 독립협회 활동 등을 하면서, 왕정 폐지와 공화국 수립을 도모하였다는 반역의 죄목으로 옥살이를 하였으며, 독립정신을 저술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한성 임시정부와 각지에서 수립된 임시정부의 수반을 거쳐 1919년 9월 11일부터 1925년 3월 23일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역임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 국무위원회 외교위원 등을 역임했다. 주로 미국에서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을 벌였다.

 

일제 강점기 중반에는 미국 및 스위스 등을 무대로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한편 일본내막기를 저술하는 등 일본의 미국 침략을 경고하였으며 태평양 전쟁 이후 미군 OSS와 임시정부 간의 연결을 주선하였다. 대한민국의 독립을 공약한 1943. 11. 27. 카이로 선언의 배경에는 이승만의 집요한 외교노력이 있었고 그 결실이었다.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미국 체신청에서 발행한 태극기 모양 우표 발행에 크게 기여했으며, 항일 단파 라디오 방송 연설 등에도 참여하였다. 1945년 해방 후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에 추대되었으나, 귀국 후 거절하였다.

 

초등학교 의무교육 도입으로 문맹률을 획기적으로 낮춘 점. 국민 학교 의무 교육제도 실시. 전국 만 7세 아동의 95.3%가 초등학교에 입학. 전문적 인재 육성을 위해 한국외국어대학교, 인하대학교, 배재대학교 등 많은 대학교를 세움. 그 결과 문맹률은 22%로 떨어짐.

 

지주가 독식하고 있었던 서민은 소작농에 불과했던 한국의 토지개혁. 1950년 3월에 농지개혁법을 단행하여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있던 지주제를 혁파하고 농민들의 불만을 해소하는데 성공한다. 이 농민 불만 해소야말로 6.25전쟁 초반의 패전을 극복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원인

 

이승만은 재임기간 12년동안 미국으로부터 일본과 수교를 맺으라는 수 많은 협박과 회유가 있었지만, 일본과의 수교조건으로 대마도 반환,  식민지보상 36억불 청구 등 사실상 일본이 받아 들일 수 없는 요구를 함으로써 그는 끝끝내 일본과의 수교를 거부했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후 행적은 논란이 될만한 건 부정할수 없지만, 대한제국 시절의 행위는 이게 팩트이다. 이승만은 두개의 얼굴을 가진 야누스를 닮은 거인으로 비쳐지고 있다. 한민족의 독립과 번영의 기초를 다진 국부로 추앙 받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 지나친 친미, 종미주의 경향과 한번도의 통일을 저해하고 민주주의를 압살시킨 시대착오적 독재자로 매도당하고 있다.

UTC+9'를 표준시로 삼은 건 1912년 1월부터인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나라는 해방 뒤인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이 일제 잔재 청산을 명분으로 동경 127도30분으로 바꿨다. 그러나 1961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 쿠데타 뒤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국제관례를 이유로 시간대를 돌이켰다. 실제 6·25 전쟁 직후 이승만 정부에선 30분 차이가 나는 표준시를 썼다. 동경 127도 30분 표준자오선에 따른 결정으로, 현재 북한의 것과 같다. 

한국의 서울 및 수도권을 기준으로 볼 때 경도는 동경 `126도 5분~127도 5분` 사이에 위치하는데 중간값 127도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경도 1도당 4분 정도의 시차가 있으므로 토쿄 시간과는 약 32분의 차이가 있다. 그러다 1961년 박정희가 다시 동경 135도를 기준으로 삼는 법안을 만들어 오늘에까지 이르렀다. 왜 일본 식민 사상에 젖어 살아가고 있는건가? 말로는 친일청산 이라고 할뿐. 생활과 표준은 일본 기준에 맞춰 살고 있는것인가. 

1952년 1월 18일 독도를 포함한 '이승만 라인' 설치하였다. 1954년 1월18일 이승만은 독도 한국령 표지석을 건립 하었다. 1954년 8월10일 무인도 독도에 등대불이 켜졌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4년 8월10일 '깜짝 이벤트‘를 벌였다. 미리 독도에 등대를 세워놓고 미국 방문 일정에 맞춰 전세계를 향해 등대 점등식을 열었던 것이다. 일본과 미국이 깜짝 놀란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대한민국 국토의 동쪽 끝 땅임을 알리는 독도 등대불! 일본에 남의 땅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 등불이었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후 행적은 논란이 될만한 건 부정할수 없지만, 대한제국 시절의 행위는 이게 팩트이다. 이승만은 두개의 얼굴을 가진 야누스를 닮은 거인으로 비쳐지고 있다. 한민족의 독립과 번영의 기초를 다진 국부로 추앙 받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 지나친 친미, 종미주의 경향과 한번도의 통일을 저해하고 민주주의를 압살시킨 시대착오적 독재자로 매도당하고 있다.

 

미국등 서양인들에게 동양은 단지 그들의 이용 도구로 인식될뿐이다.

 

일본에서 독립한 한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에게 재임기간 12년동안 미국으로부터 일본과 수교를 맺으라는 수 많은 협박과 회유가 있었다. 

 

미국은 한국을 해방시키는데 중요한 역활을 했지만 친일파란 '악의 씨'를 보호하고 육섬함으로써 대한민국 근대사에 뼈아픈 역사를 남겼다. 1945년 9월 상륙한 미 점령군은 한국인들은 적으로, 재한 일본인들은 친구로 비쳐졌다. 

조선 총독부 기구는 미군정 기구가 되었다. 일제에 부역한 친일 민족반역자들은 유임되었고 곧 승진했다. 특히 해방지 되자 두려워 피신했었던 경찰을 다시 불러 불러들인 것은 한국인을 분노케 했다. 해방은 해방이 아니었다. 


미국이 한국인 의사와는 반대로 친일파를 관리자로 유임시킨 것은 친일파에 대한 한국인의 감정과 한국의 현실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미 군정이 조직적으로 잘 훈련된 친일 경찰을 중시한 이유는 경찰 책임자 마글린 대려의 다음과 같은 발언에 드러나 있다. "그들이 일본인을 위해서 훌륭한 업무를 수행했다면 우리를 위해서도 그럴 수 있으리라고 생각 합니다."


남조선 과도 입법의원에서 미군정과 극우 세력의 반대를 무릅쓰고 1947년 7월 '민족반역자 부일 협력자 간상배에 대한 특별법'이 통과 되자 미군정은 이것을 공포할 것을 거부했다. 미국은 제헌 국회에서 친일파를 처단하려는 것에 대해서도 곱지 않은 시선으로 지켜봤다. 미국은 이승만에게 친일파를 관리로 등용할 것은 꾸준히 요구하였다. 

 

또한 이승만은 일본과의 수교조건으로 대마도 반환,  식민지보상 36억불 청구 등 사실상 일본이 받아 들일 수 없는 요구를 함으로써그는 끝끝내 일본과의 수교를 거부했다

 

[앵커]

YTN은 앞서 여러 차례 대표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 민영휘의 무덤을 관리하는 가옥이 지방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는 것을 보도했습니다.

문화재로 지정돼 수억 원 세금이 들어가고 있지만, 친일 관련 역사는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했는데요.

계속된 문제 제기에 춘천시가 문화재 안내판을 슬그머니 교체했는데, 과연 어떻게 기록돼 있을까요?

 

YTN [단독] 친일파라 부르지도 못하고..슬그머니 교체한 안내판 

https://news.v.daum.net/v/20220331022809392

 

[단독] 친일파라 부르지도 못하고..슬그머니 교체한 안내판

[앵커] YTN은 앞서 여러 차례 대표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 민영휘의 무덤을 관리하는 가옥이 지방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는 것을 보도했습니다. 문화재로 지정돼 수억 원 세금이 들어가고 있지만,

news.v.daum.net

 

 

 

 

 

 

https://www.youtube.com/watch?v=h0MnvPDtt5c&t=155s

외국인들은 욱일기를 알까?/ Do foreigners know the Rising Sun flag? [Loving korea]

 

https://www.youtube.com/watch?v=zZOSRyKcbg8&t=309s

미국인들은 왜 '욱일기'를 좋아할까?

 

https://www.youtube.com/watch?v=j3v3EplO-LM

서양애들이 욱일기 문제에 무심한 이유 #욱일기 #역사

 

 

미국등 서양인들에게 동양은 단지 그들의 이용 도구로 인식될뿐이다.

이승만은 1차-북한, 2차-일본을 이용해 미국을 효율적 도구로 삼을줄 알았다. 

 

일본에서 독립한 한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에게 재임기간 12년동안 미국으로부터 일본과 수교를 맺으라는 수 많은 협박과 회유가 있었다. 

 

미국은 한국을 해방시키는데 중요한 역활을 했지만 친일파란 '악의 씨'를 보호하고 육섬함으로써 대한민국 근대사에 뼈아픈 역사를 남겼다. 1945년 9월 상륙한 미 점령군은 한국인들은 적으로, 재한 일본인들은 친구로 비쳐졌다. 

조선 총독부 기구는 미군정 기구가 되었다. 일제에 부역한 친일 민족반역자들은 유임되었고 곧 승진했다. 특히 해방지 되자 두려워 피신했었던 경찰을 다시 불러 불러들인 것은 한국인을 분노케 했다. 해방은 해방이 아니었다. 


미국이 한국인 의사와는 반대로 친일파를 관리자로 유임시킨 것은 친일파에 대한 한국인의 감정과 한국의 현실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미 군정이 조직적으로 잘 훈련된 친일 경찰을 중시한 이유는 경찰 책임자 마글린 대령의 다음과 같은 발언에 드러나 있다. "그들이 일본인을 위해서 훌륭한 업무를 수행했다면 우리를 위해서도 그럴 수 있으리라고 생각 합니다."


남조선 과도 입법의원에서 미군정과 극우 세력의 반대를 무릅쓰고 1947년 7월 '민족반역자 부일 협력자 간상배에 대한 특별법'이 통과 되자 미군정은 이것을 공포할 것을 거부했다. 미국은 제헌 국회에서 친일파를 처단하려는 것에 대해서도 곱지 않은 시선으로 지켜봤다. 미국은 이승만에게 친일파를 관리로 등용할 것은 꾸준히 요구하였다. 

 

또한 이승만은 일본과의 수교조건으로 대마도 반환,  식민지보상 36억불 청구 등 사실상 일본이 받아 들일 수 없는 요구를 함으로써그는 끝끝내 일본과의 수교를 거부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집권기는 워싱턴과의 갈등으로 채워졌으며 심지어 6ㆍ25 전쟁 중엔 미국이 이승만 제거계획-‘플랜 에버레디(Plan Everready)’를 검토했다는 것을 지난 기사(‘‘이승만 제거작전’까지 세웠던 美…주한미군 탄생 비화’ 참조)에서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수십 년 전 우리는 미국에게 일본에 대해 경고했지만, 그 경고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미국은 진주만을 공격당했다. 오늘날 우리는 동일한 경고를 반복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은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일본을 이전보다 더 강력한 국가로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

 

... 격앙된 대통령은 일본에 대한 비판과 경고와 동시에 미국에 대한 실망을 쏟아냈습니다. 1957년 6월 26일 한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발언 내용입니다.


갈등을 협상의 지렛대로 삼았던 이승만 대통령은 ‘남한 단독 북진’이라는 카드를 적절히 활용해 1954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얻어내는 데 성공합니다. 6ㆍ25 전쟁을 끝내고 싶었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남한의 북진을 막기 위해 이승만 대통령의 요구를 대부분 들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승만식 ’벼랑 끝 외교‘의 승리로 평가하는 이유입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면서 이승만-아이젠하워의 갈등은 종식될 줄 알았지만, 역사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1954년까지가 미국과의 갈등 국면의 1차전이라면 1955년부터는 2차전이 벌어집니다. 1차전에서 갈등의 매개체가 북한이었다면 2차전은 일본이었습니다.
미국의 ‘뉴룩(New Look)’ 전략이 나왔다. 일본=경제개발, 한국=군사 강화’라는 등식으로 일본과 한국의 수교를 요구했습니다. 뉴룩정책은 한국보다 일본이 더 수혜를 입는 구조였습니다. 한국이 미국에서 받은 돈으로 일본 제품을 사들이면 일본의 공업화와 경제는 발전하겠지만 한국의 경제부흥은 느려지고, 일본 경제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으니까요. 그래서 일본 물자를 구매하는 것이나 일본과의 국교 개선 등에 대해 격렬하게 저항했습니다. 
“나는 (미국 국무장관) 덜레스씨에게 미국이 일본과의 협조를 강요하여 일본의 주도 아래 놓인다고 믿게 되면 대부분의 아시아인들은 미국에게 등을 돌리고 공산주의자와 협력해 미국과 싸우게 될 수도 있다고 이야기했다.” (1957년 12월 20일 이승만이 정치고문 로버트 올리버 박사에게 보낸 편지)

이승만은 사실 그의 일생 대부분은 일본에 대한 저항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이승만은 1941년 7월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 야욕을 경고한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라는 책을 냈는데, 5개월 뒤 일본의 진주만 습격이 벌어지면서 비로소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런 이승만의 반일 기조는 미국의 동아시아 구상에 짐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미국의 한 관료는 한ㆍ일 관계개선 및 뉴룩 전략은 “이승만이 현장에서 사라진 후에야(only after Rhee's departure from the scene) 해결될 수 있는 주요한 정치적 문제”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6ㆍ25 전쟁 중엔 미국이 이승만 제거계획-‘플랜 에버레디(Plan Everready)’를 검토했다는 것을 지난 기사(‘‘이승만 제거작전’까지 세웠던 美…주한미군 탄생 비화’ 참조)에서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미국은 이를 중국 견제를 염두에 둔 한·미·일 안보협력의 틀을 흔드는 위협으로 받아들였다. 지난 8월22일 정부의 지소미아(GSOMIA) 종료 결정 직후 “문재인 정부의 결정은 동북아에서 우리가 직면한 안보적 도전에 대한 심각한 오해를 나타낸다”는 미 국무부의 논평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들이 일본인을 위해서 훌륭한 업무를 수행했다면 우리를 위해서도 그럴 수 있으리라고 생각 합니다." 라고 말한 미국 경찰 책임자 마글린 대령의 말.

.... 보다시피 미국은 한국은 동아시아 진출을 위한 작은 도구로 인식할뿐이다. 일본 식민지때 당한 아픔과 고통에 대해서는 그 어떤 관심과 아픔이 없다. 언제까지 미국의이용도구로 전락할 것인가. 정확한 사실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말했다. 

"역사는 어느 집단의 힘으로 변화되는 게 아니다. 그 집단을 이끄는 창조적 천재의 능력만이 새로운 역사의 발전을 창조해왔다" 역사는 분노를 자극하고 분풀이를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중요한 갈림길에서 과거에 저지른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는 차가운 이성을 찾을 때 의미가 있습니다.

 

김일영 『이승만 정부에서의 외교정책과 국내정치-북진·반일정책과 국내 정치경제와의 연계성』, 홍석률 『이승만 정권의 북진통일론과 냉전외교정책』, 신욱희 『이승만의 역할 인식과 1950년대 후반의 한미관계』, [유성운의 역사정치] 이승만 제거 4번 검토한 美..'반일 한국'에 원조 깎아버렸다 뉴스를 참고했습니다.

 

나라가 바로 설려면 우선 국민의 뜻이 바로 서야한다.

 

#대학생활 #퀴즈 #대전
[슬기로운 배재생활 EP.93]-[PCU-LOG] 배재아띠 배재학당 가다!?
https://www.youtube.com/watch?v=JocUoP7UTe4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뒤로 배재대학교, 배재중고등학교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서울 하월곡동 배재대학교 기공식 (1959년 11월)
배재대학교가 인서울 하지 못하게 된 이유
일제 감정기 일제 감정기 당시 배재학당 출신 학생들이 독립운동을 너무 열심히 했기 때문에 총독부에서 배재학당을 강력히 규제하며 대학설립을 방해했다고 한다. 다른 사립학교인 연희전문학교 (현 연세대학교)나 이화여자 전문학교(전 이화학당, 현 이화여자대학교)는 총장인 윤치호와 김활란이 친일 행위로 인해 일제에 의한 학교규제가 비교적 느슨했던 편이었다. 

고려대, 동아일보 설립자 김성수는 전국 일간지에 내선일체 찬양글, 학도병 권유, 징병, 학병을 찬양하며 선전·선동하는 글을 기고하는 등 친일 반민족 행위가 인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등록되어 건국훈장이 박탈 되었다. 후손에게 전한 보물 '서울미래유산' 10선... 7. 김성수 가옥 (종로구 계동 132-1) 이것도 해지 되어야 하는거 아닌가요?

 

이승만 시절 서울 하월곡동에 의대까지 포함된 배재대 건축 기공식을 갖고 작업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승만 하야 사건으로 인해 배재대학교 서울 건립을 잠정으로 정지되게 된다. 지역적으로 1%에 불과한 서울에 대한민국 인구의 20%가 몰려있고 서울 경기에 한국 인구의 절반이 몰려있다. 서울지역 39곳과 경기·인천지역 27곳 등 총 66개 대학교가 있다. 많은 지방 대학들이 서울, 경기 지역에 캠퍼스를 지을려고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지역주민과 대학간 잡음이 엄청나다. 하지만 배재대학교는 인서울 대신 대전의 명품사학으로 태어나는 길을 선택했다.
박정희 정권 시절 강력한 수도권 팽창 억제정책이 시행되면서 서울지역에는 신규 대학의 설립은 물론 기존대학의 정원증가도 허가하지 않았다. 배재대학교는 서울에 대학 설립 논의가 꽤 오랫동안 오고 갔으나 시기를 놓쳐서 결국 인서울이 아닌 대전에 대학을 설립하게 되었다.

1885. 08. 03 배재학당 (Pai Chai Academy培材學堂) 창립 (설립자 아펜젤러 H. G. Appenzeller) 

1886. 04 .01 초대학당장 아펜젤러 취임

1886. 06. 08 고종황제로부터 '배재학당' 현판 하사 

1895. 09. 01 배재대학부 (Pai Chai College) (영문학과, 국한문학과, 신학과)

1896. 04. 07     배재학당내에서 「독립신문」발간(서재필)

1896. 11. 30     배재협성회(학생회) 조직(지도 서재필)

1925. 09. 17 조선총독부에 의해 배재학당 교명 폐지

1937. 03. 03 배재중학교(5년)로 개칭  

1951. 08. 21 배재중학교(3년) 및 배재고등학교(3년)로 개편

1955. 04. 26 대전보육학원 설립 (설립자 허길래, Clara Howard)

1981. 03. 01 개교 배재대학

1992. 03. 13 배재대학교 (Pai Chai University)

 

... College에서 University 되는데 97년의 시간이 필요

 

 

1885년 배재학당 (Pai Chai Academy, 培材學堂)

 

1885년 8월 3일, 미국의 감리교 선교사인 헨리 아펜젤러가 서울에 세운 한국 최초의 근대식 중등교육기관이며 배재중학교, 배재고등학교, 배재대학교의 전신이다. PAICHAI ACADEMY 번역이 배재학당 이고 대학이라는 제도가 우리나라에 만들어지지 않았을 때라 학당이라고 한 것이다.

 

1895년 배재대학부 (Pai Chai College)

 

1885년 헨리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을 모체로 하여 1895년 배재대학부(Pai Chai College)를 설립하였다. 배재학당은 예비과정(preparatory dept.), 교양과정(academic dept.), 대학과정(college dept.)으로 나뉘어진 각 과정마다 교과과정에도 반영되어 기본 교과목으로 영어, 한문, 언문, 문법 등이 개설되었다. 1895년 영문과 106명, 국한문과 60명, 신학과 6명의 입학으로 정규 대학과정이 시작되었다.

 

아펜젤러는 “통역관을 양성하거나 우리 학교의 일꾼을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 교육을 받은 사람을 내보내려는 것이다”라고 설립목적을 밝혔고, ‘욕위대자 당위인역(欲爲大者當爲人役)’이라는 학당훈(訓)을 내걸었다. 그리스도교인과 국가 인재양성을 위하여 일반 학과를 가르치는 외에, 연설회·토론회 등을 열고 사상과 체육 훈련에 힘을 쏟았다. 당시 배재학당에 설치되었던 인쇄부는 한국의 현대식 인쇄 시설의 효시이다. 
대한제국에서 배재학당을 지원한 이유는 독립협회와 신진 세력양성기관으로 고종이 지원하였으며 고종페위사건당시 이승만은 배배학당 학생을 동원하여 이를 저지하고 왕실과 자주독립을 위해 노력한바 커 

학교운영자금을 지원해 주었다

 

그리고 1992년 배재대학교 (Pai Chai University)

 

조선총독부 해체 (이승만 ~ 김영삼)

조선 총독부 기구는 미군정 기구가 되었다. 일제에 부역한 친일 민족반역자들은 유임되었고 곧 승진했다. 특히 해방지 되자 두려워 피신했었던 경찰을 다시 불러 불러들인 것은 한국인을 분노케 했다. 해방은 해방이 아니었다. 

 

미군정은 38도선 이남의 일본군은 무장해제 시켰지만 일경으로 복무했던 조선인 경찰들은 거의 그대로 기용했으며 조선총독부 산하 관리들도 변함이 없었다,  군정 경찰은 경무국이라는 이름으로 1945년 10월 21일에 창설됐다. 1946년 11월 기준으로 상위 계급의 간부가 된 군정 경찰의 82%에 달하는 사람들이 친일 경력이 있었다.

 

미국이 한국인 의사와는 반대로 친일파를 관리자로 유임시킨 것은 친일파에 대한 한국인의 감정과 한국의 현실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미 군정이 조직저긍로 잘 훈련된 친일 경찰을 중시한 이유는 경찰 책임자 마글린 대려의 다음과 같은 발언에 드러나 있다. "그들이 일본인을 위해서 훌륭한 업무를 수행했다면 우리를 위해서도 그럴 수 있으리라고 생각 합니다."

 

남조선 과도 입법의원에서 미군정과 극우 세력의 반대를 무릅쓰고 1947년 7월 '민족반역자 부일 협력자 간상배에 대한 특별법'이 통과 되자 미군정은 이것을 공포할 것을 거부했다. 미국은 제헌 국회에서 친일파를 처단하려는 것에 대해서도 곱지 않은 시선으로 지켜봤다. 미국은 이승만에게 친일파를 관리로 등용할 것은 꾸준히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일본과의 수교조건으로 대마도 반환, 식민지보상 36억불 청구 등 사실상 일본이 받아 들일 수 없는 요구를 함으로써그는 끝끝내 일본과의 수교를 거부했다.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었다가 1995년에 일제 잔재의 청산과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우자는 일환으로 철거되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역사 바로세우기를 위해 조선총독부 건물을 해체하라고 지시하였고,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1995년 8월 15일 광복절에 중앙돔 해체를 시작으로 1996년 11월 13일에 모든 철거작업을 완료했다.

사실 6.25 전쟁이 끝나고 이승만 초대 대통령부터 노태우 대통령 시절까지 매번 대통령들이 조선총독부를 철거하려는 움직임은 있었다. 

35년간의 식민시대가 지나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부터 곧바로 치욕의 과거사를 대표하는 총독부 건물 철거를 둘러싼 찬반 논쟁이 시작되었다. 

이승만 전 대통령도 지나가면서 저 건물을 놔두어서 되느냐고 여러 차례 되내었다고 한다. 맨 처음에 해체가 논의된 것은 6.25 전쟁 중이었던 1.4 후퇴 이후에 막 서울을 수복한 직후. 이승만 대통령이 일제의 상징을 서울의 심장부에 둔다는 것이 말이 되냐면서 철거를 지시하면서였다.

당시 이 계획을 검토한 사람은 육군 공병감 엄홍섭과 육군 참모총장친일파 매국노 버저리 개색히 백선엽이었는데, 당시 공병대에서는 "이렇게 막대한 석재를 나를 장비를 도무지 못 구하겠다." 하고 난색을 표했고 백선엽도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미군에게 불도저 4대를 빌려오긴 했는데 중장비는 그게 고작이었고 기껏해야 지게꾼들이나 동원할 수 있었다. 해체할 능력은 아예 없고 폭파라도 시켜서 억지로 없앤다 해도 무거운 석재를 나를 능력은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핵심적 원인은 당시 대한민국의 국력으로는 철거할 능력이 없었다는 것. 당시는 모든 정부 재정과 수입 물자를 미국 원조에 의존할 때였다. 

백선엽은 1943년 2월 간도특설대의 일원으로서 압록강, 두만강 상류 일대에서 중국 항일 게릴라 토벌에 종사했다. 당시 중국 공산당이 주도한 항일 게릴라에는 중국인, 만주인과 함께 조선인도 포함돼 있었다.

 

...문재인 친일 매국노 버러지 개색히 백선엽 현충원 안장
...백선엽 장군 빈소에 조화 보냈던 문재인 대통령

 

 

 

 

 

 

 

 

https://www.youtube.com/watch?v=UyQ3xR0un-0

 

[어썸 코리아] 한국이라는 나라가 본질적으로 다른 이유

한국은 지난 몇 십년만에 큰 경제성장을 이루어냈죠

외국인들이 느끼기에 한국의 경제성장.

왜 이루어졌다고 생각할까요?

 

불가리아 '토도르', 카자흐스탄 '오네게'

1. 여러가지 제도의 개혁

... '토도르'가 약간 혼동하고 있는게 초등학교 무상교육 도입과 토지 지주제 폐지는 박정희가 아닌 이승만 업적.

2. 인간자원 활용

3. 한국만의 정서

4. 집단주의

 

헐.. 고국천왕 진대법을 아는 '오네게'..ㅎㅎ

 

#일본어 카타카나는 신라 시대 구결문자

#신라 #일본 #구결문자 #각필 #가타카나 #일본 가타카나 기원은 신라 구결

한글 창제 이전시기 고대국어 #서기체 #차명 #향찰 #이두 #구결

구결(口訣)은 한문을 쓸 때 단어나 구절 사이에 붙이는 한국어 토씨 표시용으로 사용되던 문자로, 반대 어순인 한문을 쉽게 읽고자 또는 올바른 풀이, 문법 구조를 나타내고자 각 구절마다 한국어 토를 다는 데 쓰였다. 기록할 때 한자나 한자를 줄임꼴로 만들어 사용하였고, 향찰과 서로 상승 작용을 하여 함께 발달하였다. 

 

구결은 한글로 쓴 것이 아니고 한자의 획을 일부 줄여서 쓰기도 하고, 간단한 한자는 그대로 쓰기도 하였으며, 주로 한국어의 관계사나 동사 등 한문 구절의 단락을 짓는 데 사용되었다. 구결문자는 한문을 읽을 때 한자 사이에 쓰는 일종의 발음기호 같은 문자로 신라에서 불교 경전을 읽을때 한자를 읽기 편하도록 자체적인 문자를 경전 옆에 자국을 내어 빛을 비스듬히 반사하면 보이도록 새겨 놓았던 것입니다. 

 

구결 문자는 한자의 일부분을 따온 약체자로 신라인들이 한자를 줄여쓰는 방법이었는데 일본 문화재에서 발견된 각필이 일본의 카나카나와 똑같다는 것이 증명됐습니다. 구결은 훈민정음 창제 후 국문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자연 국문으로 대체, 사용되었다.

 

구결 문자들은 일단 유니코드 내의 한자를 사용하여 표기할 수 있다. 유니코드의 한자에는 구결에만 사용된 특수한 약자들도 상당수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사용에 별 무리가 없다. 유니코드 UTF-8 인코딩 방식을 적용하면 한자도 구결문자 통해 입력이 쉬워진다. 

중국어 발음대로 영어 알파벳 입력해 한자 입력하는 중국........보고있나?

 

#불매운동 #일본아베 #가타카나 #구결문자 #히로시마대학 명예교수 고바야시 요시노리 #일본어는 신라 구결문자+한자어

日 가타카나 한국이 발명했다 밝혀지자 일본 네티즌 '그럴리가 없다' 잡아떼는 웃긴 상황

https://www.youtube.com/watch?v=lm5f49owVaw 

#구결 #일본어  #가타카나 #히라가나 #한자 #동아시아 역사언어학자 알렉산더 보빈

일본의 가타카나는 한국의 구결에서 왔다 

https://www.youtube.com/watch?v=bt1Q1KbUOKw 

#구결문자 #고려대장경 

KBS 역사스페셜 – 천 년 전 이 땅에 또 다른 문자가 있었다 / KBS 2002.10.12 방송 

https://www.youtube.com/watch?v=rEcOR-Sc2Ac 

 

 

 

 

 

 

 

 

 

 

 

 

 

배재대 '명품 건축문화 기행 장소'로 각광

 

전통적으로 학교 건물의 전형으로 여겨지던 네모 반듯한 획일적인 모습에서 벗어나고 있다. 단순히 아름다움을 넘어 설계 패턴을 완전히 바꾼 획기적 건축물들도 속속 등장하면서 대학의 자랑이 되고있다. 대표적인 곳이 배재대학교 교정이다.

 

2002년 배재대는 ‘G-배재 2015’라는 마스터플랜으로 ‘미래 캠퍼스, 열린 캠퍼스, 공원 캠퍼스’를 추진한다. 이 때부터 세워진 건물이 2005년 한국건축문화대상에서 본상과 특선을 수상한 배재대 예술관과 국제교류관 올해 대상을 수상한 국제언어생활관이다. 한 대학 캠퍼스의 건축물이 모두 한국건축문화대상을 수상하는 진기록을 보유하게 된 셈이다. 배재대 21세기관이 1995년 대전시건축문화대상을 수상한 것을 시작으로 예술관과 국제교류관이 한국건축문화대상에서 본상과 특선을 받았다. 기숙사인 국제언어생활관은 대전·충청지역 건물 가운데 최초로 한국건축문화대상 대통령상을 받는 등 교내에는 명품 건축물이 즐비하다.

 

가히 배재대 캠퍼스는 현대 건축물의 향연장이라고 할 만 하다. 

 

 

21세기관은 대전지역 공공건물 중 처음으로 1층에서 5층까지 통으로 뚫린 중앙홀을 도입해 자연광이 자연스럽게 건물 내부로 들어오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예술관은 별도의 토목공사를 하지 않고 자연지형을 그대로 살려서, 국제교류관은 기존 지형을 복원한 뒤 경사지를 그대로 활용해서 지었다. 

 

배재대학교 21세기관은 대전시건축문화대상, 예술관과 국제교류관은 한국건축문화대상 본상과 특선을 받고 ‘아름다운 건축물’로도 잇달아 선정됐다. 국제언어생활관은 대전충청지역 건물 가운데 최초로 한국건축문화대상인 대통령상을 수상한 바 있다. 6월에 완공되는 신학관과 유아교육센터도 독특한 건축기법과 설계로 벌써부터 각종 건축상 수상을 예고하고 있다.

 

배재대는 전국 건축학도들의 필수 견학 코스로 자리 잡고 있다. 학교 측은 지난해와 올해 전국 32개 대학 건축학과 학생 1000여 명이 공식 방문했다고 밝혔다. 그동안 화제가 됐던 건축물은 1995년 완공된 21세기관, 2005년 세워진 예술관과 국제교류관, 2007년 문을 연 국제언어생활관 등이다.

 

.2012 녹색건축대전 대상 '국제교류관'.2011 한국건축문화대상 우수상 '하워드기념관' .2007 한국건축문화대상 대통령상 '국제언어생활관'.2006 한국건축가 협회상 '국제언어생활관'.2006 대한민국 토목건축대상 우수상 '국제언어생활관'.2005 한국건축문화대상 대상, 세계 건축을 선도할 11대 건축물 '예술관'.2005 한국건축가 협회상 '국제교류관'.2005 한국건축문화대상 비주거부문 특선 '국제교류관'

.1999 대전시건축대전 준공건축물 대상 '21세기관' 

 

.1999 대전광역시 좋은 건축물 40선 '21세기관'

... 파리의 랜드마크가 에펠탑이라면 대전의 랜드마크는 배재대 건물들이 아닐까 싶다.

 

 

충분한 인재교육

 

1. 전교 꼴찌→23살 배재대 입학→세계1위 기업간 비결 TOP5

http://1boon.kakao.com/jobsN/58bfa615ed94d2000195ab5f

 

2. 배재대 출신으로는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정해명 교수(84학번), 캐나다 맥길대 생물자원공학과 최영준 교수(87학번), 

미국 북조지아(North Georgia) 주립대 김성신 교수(중국학과 90학번), 

운현 종합법률사무소 이효석 변호사(92학번), 미국 텍사스대 인간과학과와 센트럴미시건대 의류학과의 고성봉·안수경(97학번) 동문 교수 부부,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주립대 클렘슨대학교 권인선 교수(37)등이 있다. 

 

3. 대상, 우수상, 장려상, 아이디어상, 최우수지도자상까지 싹슬이 (feat 배재대)

 

4. 체육 특기생도 대학 교수로 만들어 버리는 강력한 배재대 교육환경

 

 

대학 명성보다 전공이 더 중요한 시대가 왔다. 

 

소위 명문대를 졸업해도 전공을 잘못 선택해 취업을 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많이 본다. 

 

대학 명성보다 전공이 더 중요한 시대가 왔다. 소위 명문대를 졸업해도 전공을 잘못 선택해 취업을 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많이 본다. 재수 하느라 뒤쳐지고 늦게 다다르고 싶은 녀석들은 알아서 빨리 떨어져 나가야지. 배재대가 아무리 학생 동반성장 이끄는 '안항(雁行)교육' 과 학생들 발전을 위해 "융합전공"도 준비하는 캠퍼스라지만, 대학 명성이나 대학 네임밸류가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고방식의 1차원적인 단순한 녀석들은 사라져야한다.
2018학년도 서울대 정시 최초 합격자 수능 성적을 분석한 결과 서울대의 경우 등급 간 점수 차가 극히 적어 영어 4등급(원점수 60점)을 받았지만 수학 만점을 받아 공대에 합격한 사례도 있었다. 고려대도 최초 합격자 중 영어 2등급 이하가 37%로 추정됐다.

수시, 정시... 그리고 논술 전형, 학생부(내신) 전형, 적성검사 전형, 면접 전형, 입학사정관제 전형... 돌리고.. 돌리고~~~ 돌려막기로 개나소나 다 적당한거 걸리면 들어갈수 있는 무한경쟁 시대에 아직도 대학 서열화 타령 해대고 있는가. 수능 만점자도 서울대 떨어지는 세상에.. SKY

가 서울경기인천 잡대가 된 현실에 대학 서열, 순위 짓거리는 아무 의미없는 짓이 된지 오래다. 

무슨 대학 서열화 짓거리 해대는 건지..

 

21세기 접어들면서 문명과 통신의 발달로 변화가 일상화 되어 버려 이제는 적응성 'adaptability' 이 핵심 키워드가 되었다. 결국 강해지려 하지 말고 유연성과 적응성을 길러 끝까지 살아남자는 얘기다. 변화를 즐기며 살아남는 대학이 자본주의 4.0시대 진정한 승자이다.

 

시대에 맞게 변화하고 적응력을 키워 나갈줄 아는 배재대 화이팅~!!!

 

[팩트체크] 진실은 편리하지 않아요.

... 해보지 않고 책상 위에 앉아서 고민만 하는 것은 청춘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