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배재대학교 (feat 배재학당)

ㅋㅌㅌ 2017. 12. 22. 23:18

"우리 배재학당 배재학당 노래합시다
노래하고 노래하고 다시 합시다
우리 배재학당 배재학당 노래합시다
영원무궁하도록
라라라라 시스뿜바 배재학당 시스뿜바

라라라라 시스뿜바 배재학당 시스뿜바"

 
서울에는 감리교 학교로서 배화(培花)와 광성(光星)도 있지만 배화는 사직동에 있고 광성은 서강에 있을뿐만 아니라 배재나 이화만큼 연륜과 연혁이 두드러지지 못하다는 것도 사실이다. 배화는 미국 남감리교단이 1898년 설립했고 광성은 원래 평양에서 1894년 설립되었다가 사변후 서울로 옮긴 학교이다. 장로교 학교로는 정신(貞信)과 경신(儆新)이 있다. 하지만 배재와 이화처럼 바로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붙어 있는 것은 아니다. 황실에 의해 세워진 학교로는 양정, 휘문, 진명, 숙명이 있다. 하지만 같은 가문이지만 역시 서로 떨어져 있어서 내왕이 자주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배재와 이화는 달랐다. 운동장에서 노래부르는 소리까지 잘 들릴 정도로 옆집에 위치하고 있었다. 정동교회에서 배재-이화 연합예배를 드리는 경우고 많았고 두 학교가 협동하여 행사를 진행하는 일도 더러 있었다. 더구나 배재학당을 설립하신 아펜젤러 목사님의 따님이 이화학당 교장 선생님을 맡아 한 일도 있고 이화학당 역사상 유일한 남성 교장 선생님인 신봉조 선생님은 배재 출신이었다.

배재학당의 교훈도 별나다. 다른 학교들 같으면 예를 들어 '정직하자, 참되거라, 진리를 추구하자...'등등의 거룩한 단어가 들어가는 것이 통상이다. 배재학당의 경우는 한문지식이 있어야 읽을수 있는 한자성어로 되어 있다. 욕위대자 당위인역(慾爲大者 當爲人役)이다.

- 신약성경 마태복음 20장 26-28절.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남을 섬기라'(Whoever would be great among you must be your servant)는 구절을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사족이지만, 한 집안인 이화학당의 교훈은 '자유 사랑 평화'의 세 글자이다. 그래서 이화 교복의 하얀 칼라에 선이 세개 들어가 있었다.  

배재학당은 고종황제께서 교명을 내리신 1886년 6월 8일을, 이화학당은 명성황후께서 교명을 내리신 1887년 5월 30일을 개교기념일로 삼고 있다.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은 일제 식민 시대에 항거하는 대한독립운동의 요람이었으며 애국지사들을 배양한 교육기관이다. 배재공원은 작은 공원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신문화, 신교육의 발상지 답게 몇개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눈길을 끄는 것은 배재학당 터가 동시에 남궁억 선생의 집터였다는 기념비이다. 남궁억 선생은 찬송가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의 가사를 만드신 독립운동가이시다. 남궁억 선생은 일제시대에 무궁화 보급운동을 벌여 일제로부터 탄압을 받았다. 무궁화를 우리나라 국화처럼 존중하는 것은 남궁억 선생의 공로이다.

배재대학은 대전에 있다. 배재대학이 세워지게 된 것은 1956년 이승만 대통령께서 배재학당 개교기념식에 참석하시어 '배재대학을 세우라'라고 말씀하신데 따른 것이다. 처음에는 수유리 방면에 배재대학을 세우려 했으나 4.19와 5.16등의 변화 때문에 지지부진하였으며 결국 대전으로 터전을 확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현재 옛 배재학당이 있던 자리 옆의 부지를 배재재단이 매입하여 이곳에 배재대학교가 사용하는 큰 빌딩을 건축하였으니 배재빌딩이다.
출처
http://m.blog.daum.net/johnkchung/6619202 

 

#배재대학교 #배재대 #배재학당

[배재대학교 X 맛상무] 상무야 학당가자

https://www.youtube.com/watch?v=hmxmCHVQU-4

 

 

 

 

 

배재학당

 

1885년 8월 3일, 미국의 감리교 선교사인 헨리 아펜젤러가 배재학당을 설립했다. 배재학당은 한국 최조의 근대신 중등교육기관으로 배재중학교, 배재고등학교, 배재대학교의 전신이다.

 

1885년 8월 3일, 미국의 감리교 선교사인 헨리 아펜젤러가 배재학당을 설립했다. 고종황제는 1887년 ‘유용한 인재를 기르고 배우는 집’이라는 뜻으로 배재학당(培材學堂)이란 이름을 하사하였다. 1885년 헨리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을 모체로 하여 1895년 배재대학부(Pai Chai College)를 설립하였다. 같은 해 영문과 106명, 국한문과 60명, 신학과 6명의 입학으로 정규 대학과정이 시작되었다.

 

고종황제는 1887년 ‘유용한 인재를 기르고 배우는 집’이라는 뜻으로 배재학당(培材學堂)이란 이름을 하사하였다. 배재학당이 있는 정동은 한국 근대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대한제국의 정궁이라고 할 수 있는 덕수궁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외교, 정치, 종교, 교육, 문화 등 역동적인 역사를 고스란히 머금고 있는 공간이다. 특히 배재학당 동관 건물은 서울시 기념물 제 16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건물은 현재 다양한 근대 유물들과 함께 배재학당역사박물관으로 이용하면서 시대를 넘어 현재의 학생들을 위한 교육의 장이 되고 있다.

 

 

아펜젤러(Henry Gerhart Appenzeller)

 

아버지는 배재학당 설립, 아들은 배재대 학장, 딸은 이화여대 학장

 

1884년 미국 감리회 해외선교부의 한국선교 결정에 따라 1885년 4월 2일 한국에 입국하여 한국선교회 및 배재학당을 설립했다. 1887년 한국선교부 감리사로 있으면서 학교와 병원 등에 복음전도의 여러 사업을 맡았다. 같은 해 10월 29일 서울에 벧엘 예배당(지금의 정동제일교회)을 설립했으며 1888년에는 H. G. 언더우드, G. H. 존스 등과 함께 지방을 순회하면서 전도활동을 벌였다. 1890년 한국성교서회(韓國聖敎書會)를 창설하여 1892년 회장직을 맡는 등 성서번역사업에 큰 기여를 했다.

 

1895년에 월간지 〈한국휘보 The Korean Repository〉의 편집일을 맡았으며, 1897년에는 한국말로 된 최초의 종교신문인 〈죠션 크리스토인회〉를 창간하여 선교사업 외에 민족계몽운동에도 조력했다. 1902년(광무 6) 목포에서 열리는 성서번역자회의에 참석하러 가던 중 군산 앞바다에서 그가 탄 배와 일본 상선이 충돌하여 익사했다. 큰아들은 배재학교 교장을, 큰딸은 이화전문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아버지 H. G. 아펜젤러는 배재학당 설립, 아들은 배재대 학장, 딸은 이화여대 학장. 딸 Alice R. 아펜젤러는 1939년 김활란 부교장에게 교장직을 넘겨주고 1940년 본국으로 돌아갔다. 김활란은 1936년 말부터 글과 강연을 통해 일제 학도병과 징용, 위안부 참여를 독려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친일인사 명단에 두 번 오른 인물이다.

 

이화학당은 미국 북 감리교회 여선교사 메리 스크랜턴(1832~1909년)이 세운 한국 최초의 근대식 여성 교육기관이다. 이화여전이 대학으로 승격된 1946년 김활란 교수가 초대 총장에 취임한 것을 두고는 친일 논란이 일었다.

 

[출처] 다음백과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b14a2656a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b14a2657a

 

 

 

 

 

 

 

 

 

배재대학교 학술지원센터

서울의 교통요지인 시청 부근의 배재정동빌딩 1층에 위치해 있습니다.

◎ 설립 목적

1. 각종 학회 및 대학, 중고교의 학술활동 지원을 통한 지적교류의 거점화 구축

2. 배재대학교 유형, 무형 자산의 사회적 기여 확대

 

배재대학교 학술지원센터

서울 중구 서소문로 103 (우)04516

지번 서소문동 55-4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뒤로 배재대학교, 배재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서울 하월곡동 배재대학교 기공식 (1959년 11월)

 

배재대학교가 인서울 하지 못하게 된 이유

 

일제 감정기 일제 감정기 당시 배재학당 출신 학생들이 독립운동을 너무 열심히 했기 때문에 총독부에서 배재학당을 강력히 규제하며 대학설립을 방해했다고 한다. 다른 사립학교인 연희전문학교 (현 연세대학교)나 이화여자 전문학교(전 이화학당, 현 이화여자대학교)는 총장인 윤치호와 김활란이 친일 행위로 인해 일제에 의한 학교규제가 비교적 느슨했던 편이었다. 고려대, 동아일보 설립자 김성수는 전국 일간지에 내선일체 찬양글, 학도병 권유, 징병, 학병을 찬양하며 선전·선동하는 글을 기고하는 등 친일 반민족 행위가 인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등록되어 건국훈장이 박탈 되었다. 후손에게 전한 보물 '서울미래유산' 10선... 7. 김성수 가옥 (종로구 계동 132-1) 이것도 해지 되어야 하는거 아닌가요?

 

이승만 시절 서울 하월곡동에 의대까지 포함된 배재대 건축 기공식을 갖고 작업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승만 하야 사건으로 인해 배재대학교 서울 건립을 잠정으로 정지되게 된다. 지역적으로 1%에 불과한 서울에 대한민국 인구의 20%가 몰려있고 서울 경기에 한국 인구의 절반이 몰려있다. 서울지역 39곳과 경기·인천지역 27곳 등 총 66개 대학교가 있다. 많은 지방 대학들이 서울, 경기 지역에 캠퍼스를 지을려고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지역주민과 대학간 잡음이 엄청나다. 하지만 배재대학교는 인서울 대신 대전의 명품사학으로 태어나는 길을 선택했다.

 

박정희 정권 시절 강력한 수도권 팽창 억제정책이 시행되면서 서울지역에는 신규 대학의 설립은 물론 기존대학의 정원증가도 허가하지 않았다. 인서울 막차는 찬 한성대는 

한성여고 교사로 사용하고 있는 7층 건물이 개교당시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대학 건물로 사용했던 유일한 건물이었다. 오히려 그 시절은 지금의 한성대 부지에 한성여중, 한성여고가 있었다. 

배재대학교는 서울에 대학 설립 논의가 꽤 오랫동안 오고 갔으나 시기를 놓쳐서 결국 인서울이 아닌 대전에 대학을 설립하게 되었다.

 
배재대학교는 대전에 있다. 배재대학이 세워지게 된 것은 1956년 이승만 대통령께서 배재학당 개교기념식에 참석하시어 '배재대학을 세우라'라고 말씀하신데 따른 것이다. 처음에는 수유리 방면에 배재대학을 세우려 했으나 4.19와 5.16등의 변화 때문에 지지부진하였으며 결국 대전으로 터전을 확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현재 옛 배재학당이 있던 자리 옆의 부지를 배재재단이 매입하여 이곳에 배재대학교가 사용하는 큰 빌딩을 건축하였으니 배재빌딩이다.

 

 

 

 

 

 

 

 

 

 

 

 

 

 

 

배재대학교 학술지원센터

서울 중구 서소문로 103 (우)04516

서울의 교통요지인 시청 부근의 배재정동빌딩 1층에 위치해 있습니다.

◎ 설립 목적

1. 각종 학회 및 대학, 중고교의 학술활동 지원을 통한 지적교류의 거점화 구축

2. 배재대학교 유형, 무형 자산의 사회적 기여 확대

 

배재대학부(Pai Chai College) → 배재중학교 → 배재고등학교 → 배재대학교(Pai Chai University)

아버지는 배재학당 설립, 아들은 배재대 학장, 딸은 이화여대 학장

 

1885년 8월 3일, 미국의 감리교 선교사인 헨리 아펜젤러가 배재학당을 설립했다. 배재학당은 한국 최조의 근대신 중등교육기관으로 배재중학교, 배재고등학교, 배재대학교의 전신이다.

1885년 헨리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을 모체로 하여 1895년 배재대학부(Pai Chai College)를 설립하였다. 같은 해 영문과 106명, 국한문과 60명, 신학과 6명의 입학으로 정규 대학과정이 시작되었다.

 

1909년 배재고등학당으로 인가되었다. 이후 일제 탄압으로 YMCA 안에서 잠시 명맥만 유지하다가 1925년 일제에 의하여 대학과정은 폐지되었고 1937년 배재중학교(6년)로 개칭하였다. 해방 이후에 1951년 배재중학교(3년) 및 배재고등학교(3년)로 개편하였고, 1958년 학교법인 배재학당의 인가를 받았다.

 

아버지 H. G. 아펜젤러는 배재학당 설립, 아들은 배재대 학장, 딸은 이화여대 학장. 딸 Alice R. 

아버지 

H. G. 아펜젤러는 배재학당 설립, 아들은 배재대 학장, 딸은 이화여대 학장. 딸 Alice R. 아펜젤러는 1939년 김활란 부교장에게 교장직을 넘겨주고 1940년 본국으로 돌아갔다. 김활란은 1936년 말부터 글과 강연을 통해 일제 학도병과 징용, 위안부 참여를 독려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친일인사 명단에 두 번 오른 인물이다.

 

... 대학부 그리고 대학교. 어차피 돌고돌아 배재대학교.

 

1885년 8월 3일, 미국의 감리교 선교사인 헨리 아펜젤러가 배재학당을 설립했다. 배재학당은 한국 최조의 근대신 중등교육기관으로 배재중학교, 배재고등학교, 배재대학교의 전신이다.

 

 

 

 

 

 

 

 

 

 

 

 

 

 

배재학당 배재대학교 학술지원센터 (서울 정동)

 

1885년 8월 3일 설립된 배재학당(培材學堂)은 미국의 감리교 선교사인 헨리 아펜젤러가 서울에 세운 한국 최초의 근대식 중등교육기관이다.

배재중학교, 배재고등학교, 배재대학교의 전신이기도 하다.

고종 22년(1885년) 7월 아펜젤러 목사가 서울에 들어와, 1개월 먼저 와 있던 스크랜턴 의사의 집 한 채를 빌려 두 칸짜리 방의 벽을 헐고 조그마한 교실을 만들었다. 같은해 8월 3일 이겸라(李謙羅)·고영필(高永弼)이라는 두 학생을 얻어 수업을 시작함으로써, 한국 근대학교의 역사가 시작됐다. 

1886년 6월 8일 고종은 배양영재의 줄임말인 배재학당이라는 교명과 액(額)을 내렸다.

아펜젤러 목사는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우리의 선교학교는 1886년 6월 8일에 시작되어 7월 2일까지 수업이 계속되었는데 학생은 6명이었다. 오래지 않아 한 학생은 시골에 일이 있다고 떠나버리고, 또 한 명은 6월이 외국어 배우기에 부적당한 달이라는 이유로 떠나버리고, 또 다른 가족의 상사(喪事)가 있다고 오지 않았다. 10월 6일인 지금 재학생 20명이요, 실제 출석하고 있는 학생수는 18명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배재학당의 설립목적에 대해선 "우리는 통역관(通譯官)을 양성하거나 학교의 일군을 양성하려는 것이 아니요, 자유의 교육을 받은 사람을 내보내려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학당훈(學堂訓)은 '큰 인물이 되려는 사람은 남을 위해 봉사할 줄 알아야 된다(欲爲大者 當爲人役)'고 해 기독교적 교훈(마태복음 20장 26-28절)으로 봉사적 인물을 양성하려 했다.

교과목으로는 한문·영어·천문·지리·생리·수학·수공·성경 등이 있었고, 그 외의 과외활동으로 연설회·토론회와 같은 의견발표의 훈련을 시켰으며, 정구·야구·축구 등 운동을 과목도 있었다.

1887년 9월부터는 한국학생들에게 신학교육을 실시하였고, 1893년부터는 정규적인 신학교육이 함께 이뤄졌다.

1893년 8월에 열린 미국 감리회 한국 선교회 19차 연회에서는 아펜젤러를 '배재대학 학장 겸 신학부 부장'으로 임명했으며, 배재학당은 지금의 배재중•고등학교, 배재대학교의 , 신학부는 지금의 감리교신학대학교의 모체가 된다.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 온라인커뮤니티

 

 

 

 

 

 

'정동, 깊이 보기' 인문학 강연

- 배재학당역사박물관

- 7월13일 ~ 11월 2일 (총 12회)

- 조선시대 '근대화 1번지'로 손꼽히는 서울 정동을 구체적으로 탐색

 

이번 인문학 강연은 서울시 정동 역사재생활성화지역 2019 주민공모사업의 지원으로, 배재학당역사박물관(서울시 기념물 제16호)이 주최·주관한다.

 

이 프로그램은 조선시대 '근대화 1번지'로 손꼽히는 서울 정동을 구체적으로 탐색하기 위해 마련됐다.

 

나선화 前 문화재청장, 이태진 前 국사편찬위원장 등 석학 12명이 배재학당역사박물관에서 11월까지 매주 인문학 산책 ‘정동, 깊이 보기’ 강연을 개최한다. 이번 인문학 산책은 서울시 정동 역사재생활성화지역 2019 주민공모사업 지원으로 배재학당역사박물관(서울시 기념물 제16호)가 주최‧주관한다.

 

‘정동, 깊이 보기’ 인문학 산책은 조선시대 ‘근대화 1번지’로 꼽히는 서울 정동의 속살을 들여다보기 위해 마련됐다. 오는 13일부터 11월 2일까지 총 12회에 걸쳐 역사‧문화‧종교‧교육‧건축 등 정동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에피소드 형식으로 풀어낸다. 앞서 배재학당역사박물관은 지난해 개최된 ‘정동 야행’ 주요 코스에 자리잡아 많은 시민이 근대화의 숨결을 느끼도록 했다.

 

인문학 산책을 주최하는 최종희 배재학당역사박물관 관장은 “‘정동, 깊이 보기’는 조선시대부터 현대까지 이르는 역사의 물결을 되짚는 소중한 시간이 될 것”이라며 “특히 인문학 산책이 열리는 배재학당역사박물관은 아펜젤러 선교사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고등교육기관 ‘배재학당’을 세운 곳이어서 특별함이 가득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