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인하대 한국어국어대학 서울대 배재대 그리고 이승만

ㅋㅌㅌ 2018. 2. 21. 01:24

 

 

 

자랑스러운 배재인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한글학자 주시경,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 개화기 지식인 서재필, 윤치호, 김지호, 의학자이자 사회사업가 오긍선, 민족 시인 김소월 소설가 나도향, 여윤형(자퇴)


일제 감정기 일제 감정기 당시 배재학당 출신 학생들이 독립운동을 너무 열심히 했기 때문에 총독부에서 배재학당을 강력히 규제하며 대학설립을 방해했다고 한다. 다른 사립학교인 연희전문학교 (현 연세대학교)나 이화여자 전문학교(전 이화학당, 현 이화여자대학교)는 총장인 윤치호와 김활란이 친일 행위로 인해 일제에 의한 학교규제가 비교적 느슨했던 편이었다. 

고려대, 동아일보 설립자 김성수는 전국 일간지에 내선일체 찬양글, 학도병 권유, 징병, 학병을 찬양하며 선전·선동하는 글을 기고하는 등 친일 반민족 행위가 인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등록되어 건국훈장이 박탈 되었다. 

서울대 (경성제국대학

) 출신과 서울대 교수를 역임했던 친일인물 12명의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초등학교 의무교육 도입
...지주가 독식하고 있었던 서민은 소작농에 불과했던 한국의 토지개혁.
...‘한국의 MIT’를 목표로 '인하공과대학' 설립. 국제관계 전문가를 양성하기 위해 '한국외국어대학' 설립
...한국 표준시는 이승만 대통령이 일제 잔재 청산을 명분으로 동경 127도30분으로 바꿨다.
...1952년 1월 18일 독도를 포함한 '이승만 라인' 설치, 독도 표지석, 독도 등대
...국익을 위한 복수환율제를 운용. 외화를 최대한 끌어오는데 중요한 기여.
...이승만은 일본과의 수교를 거부했다.

이승만은 지주 철폐, 교육 진흥, 제도 신설 등 지금 우리가 디디고 서 있는 바탕이 이승만의 손에서 나왔다. 원자력발전조차 그에 의해 첫발을 내디뎠다. 또한 1948년, 노동자의 권리 등에 대한 별다른 법령이 없던 우리나라에 노동관계 법률이 제정되었다. 헌법 제17조는 “모든 국민은 근로의 권리와 의무를 가진다.”, “여자와 소년의 근로는 특별한 보호를 받는다.”는 조항이 규정되었고 제18조에는 “근로자의 단결, 단체교섭과 단체행동의 자유는 법률의 범위 내에서 보장된다.”고 규정되어 노동자의 사측에 대한 단체 행동이 법률 내에서 허가되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이 노동관계법은 곧 발발하는 한국전쟁 때문에 시행되지는 못하였다. 현재 노동법의 근본이 이승만의 손에서 나왔다.

 

대한제국 시절 우남 이승만 박사

이승만은 일찌감치 개화사상을 받아들여 아펜젤러의 배재학당에 입학하였다. 

 

대한제국 시절 협성회 회보와 독립신문 주필, 교육계몽운동으로는 독립협회 활동 등을 하면서, 왕정 폐지와 공화국 수립을 도모하였다는 반역의 죄목으로 옥살이를 하였으며, 독립정신을 저술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한성 임시정부와 각지에서 수립된 임시정부의 수반을 거쳐 1919년 9월 11일부터 1925년 3월 23일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역임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 국무위원회 외교위원 등을 역임했다. 주로 미국에서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을 벌였다.

 

일제 강점기 중반에는 미국 및 스위스 등을 무대로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한편 일본내막기를 저술하는 등 일본의 미국 침략을 경고하였으며 태평양 전쟁 이후 미군 OSS와 임시정부 간의 연결을 주선하였다. 대한민국의 독립을 공약한 1943. 11. 27. 카이로 선언의 배경에는 이승만의 집요한 외교노력이 있었고 그 결실이었다.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미국 체신청에서 발행한 태극기 모양 우표 발행에 크게 기여했으며, 항일 단파 라디오 방송 연설 등에도 참여하였다. 1945년 해방 후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에 추대되었으나, 귀국 후 거절하였다.

 

초등학교 의무교육 도입으로 문맹률을 획기적으로 낮춘 점. 국민 학교 의무 교육제도 실시. 전국 만 7세 아동의 95.3%가 초등학교에 입학. 전문적 인재 육성을 위해 한국외국어대학교, 인하대학교, 배재대학교 등 많은 대학교를 세움. 그 결과 문맹률은 22%로 떨어짐.

 

지주가 독식하고 있었던 서민은 소작농에 불과했던 한국의 토지개혁. 1950년 3월에 농지개혁법을 단행하여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있던 지주제를 혁파하고 농민들의 불만을 해소하는데 성공한다. 이 농민 불만 해소야말로 6.25전쟁 초반의 패전을 극복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원인

 

이승만은 재임기간 12년동안 미국으로부터 일본과 수교를 맺으라는 수 많은 협박과 회유가 있었지만, 일본과의 수교조건으로 대마도 반환,  식민지보상 36억불 청구 등 사실상 일본이 받아 들일 수 없는 요구를 함으로써 그는 끝끝내 일본과의 수교를 거부했다.

 

1949년 1월 7일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 정부에게 대마도 섬의 반환을 공식적으로 요청했다. 

"대마도는 오래전부터 우리나라에 조공을 바친 우리 땅이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이 그 땅을 무력 강점했지만 결사 항전한 의병들이 이를 격퇴했고 의병 전적비가 대마도 도처에 있다. 1870년대에 대마도를 불법적으로 삼킨 일본은 포츠담 선언에서 불법으로 소유한 영토를 반환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돌려줘야 한다." 당시 한국 정부는 1948년부터 반복적으로 대마도의 반환을 요구했고, 1951년 4월 27일 미 국무부에도 문서로 통보하여 미일 강화 회의 당사자인 미국에게 이 점을 분명히 했다. 

 

대마도 거주 일본인들은 지리적으로 조선에 더 가까운 이유로 조선 정부의 관리를 희망했다. 실제로 대마도주는 15~16세기에 조선에 조공을 바쳤고 조선정부에  정기적으로 사신을 보냈으며 관직도 하사받곤 했다. 임진왜란 직전 대마도주는 조선 통신사 부사 김성일에게 공식적인 조선 영토로서의 명칭을 정해주고, 공식 인장(도장)을 하사하여 주면 신하의 도리에 따라 받들겠다고 했으며, 그 즈음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출정 계획을 파악한 후 조선 조정에 그 사실을 전달하고 전쟁을 대비할 것으로 알리는 우국 충정을 보이기도 한다.

 

UTC+9'를 표준시로 삼은 건 1912년 1월부터인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나라는 해방 뒤인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이 일제 잔재 청산을 명분으로 동경 127도30분으로 바꿨다. 그러나 1961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 쿠데타 뒤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국제관례를 이유로 시간대를 돌이켰다. 실제 6·25 전쟁 직후 이승만 정부에선 30분 차이가 나는 표준시를 썼다. 동경 127도 30분 표준자오선에 따른 결정으로, 현재 북한의 것과 같다.

 

한국의 서울 및 수도권을 기준으로 볼 때 경도는 동경 `126도 5분~127도 5분` 사이에 위치하는데 중간값 127도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경도 1도당 4분 정도의 시차가 있으므로 토쿄 시간과는 약 32분의 차이가 있다. 그러다 1961년 박정희가 다시 동경 135도를 기준으로 삼는 법안을 만들어 오늘에까지 이르렀다. 왜 일본 식민 사상에 젖어 살아가고 있는건가? 말로는 친일청산 이라고 할뿐. 생활과 표준은 일본 기준에 맞춰 살고 있는것인가.

 

이승만 정부의 농지 개혁은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형태의 토지 개혁으로 이 과정에서 토지 가격은 폭락하고, 지주들에게 땅을 매입하고 나중에 토지의 값을 지불하겠다는 유가증권을 주었는데, 이 유가증권은 6.25 전쟁 등을 거쳐서 완전히 휴지조각이 되어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지주들의 몰락과 농민층 분해, 근대적 자본가의 성장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한편 6년 의무교육제 도입과 더불어 각 급 학교를 증설하는 것과 아울러, 일제의 식민지정책에 따라 제한되어 있던 고등교육 기회를 부활시켜 전 국민의 교육수준을 향상시켰다. 국민 학교 의무 교육제도를 실시하였고, 전쟁으로 잠깐 계획에 차질이 있었지만 1954년부터 본격적으로 재개하여 1959년에는 전국 만 7세 아동의 95.3%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문적 인재 육성을 위해 한국외국어대학교, 인하대학교, 배재대학교 등 많은 대학교를 세우는 데 투자했다. 그 결과 문맹률은 22%로 떨어졌고, 학교 수와 학생 수는 3~11배 이상으로 크게 늘었다. 특히 1956년부터 시행된 미네소타 계획은 서울대학교의 많은 교수들에게 미국 유학 기회를 주었다. 그들은 나중에  한국 과학기술계를 이끌 중심 세력으로 떠올랐다. 

 

대한민국이 출범하던 1948년에 문맹률은 80%에 이르렀다. 이승만은 1949년에 모든 어린이가 6년제 초등교육을 무상으로 받도록 하는 의무교육제를 도입했다. 결과 문맹자 수는 1959년에 와서 22.1%로 낮아졌다. 

 

1952년 1월 18일 독도를 포함한 '이승만 라인' 설치하였다. 1954년 1월18일 이승만은 독도 한국령 표지석을 건립 하었다. 

1954년 8월10일 

무인도 독도에 등대불이 켜졌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4년 8월10일 '깜짝 이벤트‘를 벌였다. 미리 독도에 등대를 세워놓고 미국 방문 일정에 맞춰 전세계를 향해 등대 점등식을 열었던 것이다. 일본과 미국이 깜짝 놀란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대한민국 국토의 동쪽 끝 땅임을 알리는 독도 등대불! 일본에 남의 땅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 등불이었다. 


이승만 동상은 지난 1987년 2월 당시 배재대 졸업 동문들이 기증해 세웠다. 많은 철거 논란이 있었지만 배재대학교 측은 대학총동창회, 총학생회와 함께 지난 2008년 6월 5일 우남관 앞에 다시 동상을 세웠다.

 

 

 

‘한국의 MIT’를 목표로 '인하공과대학' 설립. 

 

이승만은 미국의 MIT를 모방한 최고수준의 공과대학을 세우려고 했다. 그것은 한국인들이 전통적으로  문과를 강조해오던 전통을 바꾸어 공업을 발전시켜 보려는 야심찬 의지에서 나온 것이었다. 
6 · 25 전쟁 중인 1952년에 하와이 교민들은 하와이 ‘한인기독학원’ 부지를 판 돈의 일부를 이승만에게 보내왔다. 그 학교는 독립운동 시기에 이승만이 세운 것이었다. 

학교 이름을 인하(仁荷)로 한 것은 1903년 최초의 하와이 이민을 떠난 인천과 그들이 정착해서 돈을 보낸 하와이에서 한 글자씩 고른 것이었다. 

 

국제관계 전문가를 양성하기 위해 '한국외국어대학' 설립

이승만 대통령은 해외로 진출할 국제관계 전문가를 양성하기 위해 

정부 보조로 외국어대학을 세울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정부의 자금 부족으로 실업가 김흥배에 의해

 한국외국어대학이 설립되었다. 

그 과정에서 이승만은 백두진 총리와 영어학자인 박술음 사회부장관을 통해 

행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도록 지시했다.

 

한국 지방자치 시작 이승만
우리나라 대부분의 일반인들은 1950년 대 그것도 전쟁 중인 1952년에 지방자치가 처음으로 실시 된지 잘 모른다. 1948년 첫 헌법을 제정할 때부터 지방자치를 규정 하였고, 이를 구체화한 『지방자치법』을 1949년 7월 4일 제정하였다. 해방 후 미군정에서도 명목상 지방자치와 비슷핫 제도를 시행하려 했지만 미군정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부를 원했기에 제대로 실시하지 않았다. 이승만 정권 시대에 와서야 지방자치가 실시된다. 이승만은 1949년 12월 한 번도 시행되지 않은 지방자치법을 개정, 국내적 불안정을 이유로 지방자치의 실시보류로 인한 지방행정의 공백에 대응하였다.

이승만은 지방자치제를 도입하여 한국의 풀뿌리 민주주의를 성장시켰다. 이승만이 도입한 지방자치제는 박정희의 쿠데타 이후 폐지되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당시 단식투쟁을 불사하며 "지방자치제는 민주주의를 위해 꼭 필요했다"고 호소했다. 거의 30년이나 지나서야 노태우 정권에서 다시 부활했다.
 

 

......

이승만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후 행적은 논란이 될만한 건 부정할수 없지만, 대한제국 시절의 행위는 이게 팩트이다. 이승만은 두개의 얼굴을 가진 야누스를 닮은 거인으로 비쳐지고 있다. 한민족의 독립과 번영의 기초를 다진 국부로 추앙 받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 지나친 친미, 종미주의 경향과 한번도의 통일을 저해하고 민주주의를 압살시킨 시대착오적 독재자로 매도당하고 있다.

 
이승만 동상은 지난 1987년 2월 당시 배재대 졸업 동문들이 기증해 세웠다. 많은 철거 논란이 있었지만 배재대학교 측은 대학총동창회, 총학생회와 함께 지난 2008년 6월 5일 우남관 앞에 다시 동상을 세웠다.
 

 

 배재대 이승만 동상 철거 소동
배재대 이승만 동상은 1987년 2월 배재대 졸업 동문들이 기증해 세웠다. 하지만 같은 해 6월 항쟁 과정에서 재학생들에 의해 철거됐다. 이후 1990년 2월 학교 측이 동상을 재건립 했으나 학생들이 달걀과 페인트를 끼얹으며 철거운동을 계속하자 1997년 자진 철거했다.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2008년 6월 5일 학교 측은 건국 60년을 기념한다며 우남관 앞에 다시 동상을 세웠다. 대학총동창회와 총학생회가 함께 재건립을 추진했다.
일부 시민단체들이 끊임없이 동상 철거를 요구해 오고 있다. 하지만 학교 측은 “이 동상은 총동창회에서 건립한 것으로 학교가 철거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이어 “동상 철거 건은 학교가 협상할 문제가 아니다”라고 못 박았다.

 
이승만 동상은 지난 1987년 2월 당시 배재대 졸업 동문들이 기증해 세웠다. 많은 철거 논란이 있었지만 배재대학교 측은 대학총동창회, 총학생회와 함께 지난 2008년 6월 5일 우남관 앞에 다시 동상을 세웠다. 이승만이 조지워싱턴대를 3학년에 편입한 것은 ‘배재대학’ 2년 학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 학교측에서 세운것도 아니고 배재대 졸업생 동문들이 세운 이승만 동상을 니들이 왈가불가 왜 시비거는 거냐고. 배재대 학생들끼리 훼손하고 철거하고 다시 세우고 하는건 다양한 의견을 가진 재학생들의 의견 개진 과정이니 이해 하겠는데.. 일부 시민단체등 왜 다른 집안의 사람들이 간섭질인거지. 남의 집에 걸려있는 초상화 걸어라 마라 지적질 해대는 모습이 한심해 보인다.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뒤로 배재대학교, 배재중고등학교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서울 하월곡동 배재대학교 기공식 (1959년 11월)

배재대학교가 인서울 하지 못하게 된 이유

 

일제 감정기 일제 감정기 당시 배재학당 출신 학생들이 독립운동을 너무 열심히 했기 때문에 총독부에서 배재학당을 강력히 규제하며 대학설립을 방해했다고 한다. 다른 사립학교인 연희전문학교 (현 연세대학교)나 이화여자 전문학교(전 이화학당, 현 이화여자대학교)는 총장인 윤치호와 김활란이 친일 행위로 인해 일제에 의한 학교규제가 비교적 느슨했던 편이었다. 고려대, 동아일보 설립자 김성수는 전국 일간지에 내선일체 찬양글, 학도병 권유, 징병, 학병을 찬양하며 선전·선동하는 글을 기고하는 등 친일 반민족 행위가 인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등록되어 건국훈장이 박탈 되었다. 후손에게 전한 보물 '서울미래유산' 10선... 7. 김성수 가옥 (종로구 계동 132-1) 이것도 해지 되어야 하는거 아닌가요?

 

이승만 시절 서울 하월곡동에 의대까지 포함된 배재대 건축 기공식을 갖고 작업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승만 하야 사건으로 인해 배재대학교 서울 건립을 잠정으로 정지되게 된다. 지역적으로 1%에 불과한 서울에 대한민국 인구의 20%가 몰려있고 서울 경기에 한국 인구의 절반이 몰려있다. 서울지역 39곳과 경기·인천지역 27곳 등 총 66개 대학교가 있다. 많은 지방 대학들이 서울, 경기 지역에 캠퍼스를 지을려고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지역주민과 대학간 잡음이 엄청나다. 하지만 배재대학교는 인서울 대신 대전의 명품사학으로 태어나는 길을 선택했다.

 

박정희 정권 시절 강력한 수도권 팽창 억제정책이 시행되면서 서울지역에는 신규 대학의 설립은 물론 기존대학의 정원증가도 허가하지 않았다. 배재대학교는 서울에 대학 설립 논의가 꽤 오랫동안 오고 갔으나 시기를 놓쳐서 결국 인서울이 아닌 대전에 대학을 설립하게 되었다.

 
배재대학교는 대전에 있다. 배재대학이 세워지게 된 것은 1956년 이승만 대통령께서 배재학당 개교기념식에 참석하시어 '배재대학을 세우라'라고 말씀하신데 따른 것이다. 처음에는 수유리 방면에 배재대학을 세우려 했으나 4.19와 5.16등의 변화 때문에 지지부진하였으며 결국 대전으로 터전을 확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현재 옛 배재학당이 있던 자리 옆의 부지를 배재재단이 매입하여 이곳에 배재대학교가 사용하는 큰 빌딩을 건축하였으니 배재빌딩이다.
 

 

 

 

 

 

 

 

 

 

 

 

1885. 08. 03 배재학당 (Pai Chai Academy培材學堂) 창립 (설립자 아펜젤러 H. G. Appenzeller) 

1886. 04 .01 초대학당장 아펜젤러 취임

1886. 06. 08 고종황제로부터 '배재학당' 현판 하사 

1895. 09. 01 배재대학부 (Pai Chai College) (영문학과, 국한문학과, 신학과)

1896. 04. 07     배재학당내에서 「독립신문」발간(서재필)

1896. 11. 30     배재협성회(학생회) 조직(지도 서재필)

1898.             아펜젤러 '서울대학교(Seoul University)' 설립 계획 - 법과 400명, 문리과대학 1180명, 사범대학 1320명, 공과대학 1320명, 의과대학 400명.

1925. 09. 17 조선총독부에 의해 배재학당 교명 폐지

1937. 03. 03 배재중학교(5년)로 개칭  

1951. 08. 21 배재중학교(3년) 및 배재고등학교(3년)로 개편

1955. 04. 26 대전보육학원 설립 (설립자 허길래, Clara Howard)

1959. 11.        배재대학교 기공식 (의대 포함. 서울 성북구 하월곡동) - 4.19로 잠정중단

1992. 03. 13 배재대학교 (Pai Chai University)

 

 

배재대는 교육부의 '잘 가르치는 대학' 대학자율역량강화지원사업(ACE+), 대전 유일 사회맞춤형 산학협력선도대학(LINC+) 육성사업 학과중점형, 고용노동부의 IPP형 일학습병행제 및 듀얼공동훈련센터, 대학일자리본부(국내취업거점대학), 청해진대학 운영기관(해외취업거점대학)에 잇달아 선정돼 양질의 교육과 취·창업 인프라를 확충했다.

 

"의심할 나위도 없이 조선에서 가장 교육적, 도덕적, 지적 영향력을 행사해 왔고 지금도 행사하고 있는 학교는 배재대학이다." 

-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388쪽. 이사벨라 비숍(Isabella Bird Bishop)

 

Let me inside make me stay right beside you, PAI CHAI Univ. 

 

 

 

 

https://www.youtube.com/watch?v=UyQ3xR0un-0

 

[어썸 코리아] 한국이라는 나라가 본질적으로 다른 이유

한국은 지난 몇 십년만에 큰 경제성장을 이루어냈죠

외국인들이 느끼기에 한국의 경제성장.

왜 이루어졌다고 생각할까요?

 

불가리아 '토도르', 카자흐스탄 '오네게'

1. 여러가지 제도의 개혁

... '토도르'가 약간 혼동하고 있는게 초등학교 무상교육 도입과 토지 지주제 폐지는 박정희가 아닌 이승만 업적.

2. 인간자원 활용

3. 한국만의 정서

4. 집단주의

 

헐.. 고국천왕 진대법을 아는 '오네게'..ㅎㅎ

 

프런체스카 도너 (ft 이부란, 이금순)

한국 호적상 기재된 이름은 '푸랜시스카 또나'이고, 스스로 '푸랜시스카'라는 한글 표기를 썼으며, 한국명은 이부란이다. 귀화 후에는 남편이 지어준 '이부란(李富蘭)'이라는 이름도 썼다. 다른 하나는 이금순이다. 우연히 만난 오스트리아인이 "당신은 오스트리아 사람인가요?"라고 묻자 "난 한국 사람입니다. 우연히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났을 뿐"이라고 대답한 일화가 있다고 하며 다른 일화로는 서양인이면서도 한복을 무척 사랑했다고 한다. 문서에 있는 사진도 한복을 입고 찍은 것이다. 

 

프란체스카 여사가 한복을 처음 입어 본 것은 신혼시절인 1935년이었다. 독립운동을 하던 이승만 박사와 25년의 나이차를 극복하고 결혼한 이듬해, 미국 순회도중 윤치영(훗날 초대 내무부장관)부인으로부터 한복을 선물로 받았다. 그대 한복의 아름다음에 매료된뒤 거의 평생 '한복패션'을 즐겼다.

 

이승만 대통령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
그녀는 12년 동안 남편의 독립 운동을 돕고, 12년 동안 영부인으로 살았으며, 22년 동안 남편 없는 땅에서 살다간 파란 눈의 이방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쪽을 찌고, 한복을 입고, 한국 음식만 먹고, 조금이라도 낭비하는 것이 보이면 국민들이 낸 세금이라며 절약하고 또 절약하라고 당부한 한국인보다 더 한국적인 사람이었다.

프란체스카 vs 김정숙, 대한민국 영부인의 패션, 극과 극 

https://www.youtube.com/watch?v=L11y4q6ng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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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어준 “김정숙 브로치 2억? 가짜뉴스”…신평 “반환하라”

https://www.youtube.com/watch?v=v78u0boGGm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