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우남 이승만 동경 127도 30분 표준자오선 시계

ㅋㅌㅌ 2018. 4. 29. 22:12

 

 

 

 

 

 

 

.1895. 09. 01 배재대학부 (Pai Chai College) (영문학과, 국한문학과, 신학과)

.이승만이 조지워싱턴대를 3학년에 편입한 것은 ‘배재대학’ 2년 학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이후 하버드대 석사 1년, 프린스턴대 박사 2년 과정을 일사천리로 마쳤다. 

 

우남 이승만 동경 127도 30분 표준자오선 시계

현재 대한민국 표준시 UTC+9, 127도는 일제 잔재로 인식되고 있다. 'UTC+9'를 표준시로 삼은 건 1912년 1월부터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의 서울 및 수도권을 기준으로 볼 때 경도는 동경 `126도 5분~127도 5분` 사이에 위치하는데 중간값 127도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경도 1도당 4분 정도의 시차가 있으므로 토쿄 시간과는 약 32분의 차이가 있다. 동경 135도선은 우리 영토가 아닌 일본을 지나기 때문에, 한반도 위치를 고려해 변경해야 한다. 독도에서도 약 278㎞ 떨어져 있다. 우리 기준에 맞게 국토 중심부를 지나는 127도 30분 표준자오선에 맞춰 표준시를 설정해야 한다는 주장은 여기에서 출발했다. 

 

우리나라는 해방 뒤인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이 일제 잔재 청산을 명분으로 동경 127도30분으로 바꿨다. 그러나 1961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 쿠데타 뒤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국제관례를 이유로 시간대를 돌이켰다. 실제 6·25 전쟁 직후 이승만 정부에선 30분 차이가 나는 표준시를 썼다. 동경 127도 30분 표준자오선에 따른 결정으로, 현재 북한의 것과 같다. 한국의 서울 및 수도권을 기준으로 볼 때 경도는 동경 `126도 5분~127도 5분` 사이에 위치하는데 중간값 127도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경도 1도당 4분 정도의 시차가 있으므로 토쿄 시간과는 약 32분의 차이가 있다. 

 

그러다 1961년 박정희가 다시 동경 135도를 기준으로 삼는 법안을 만들어 오늘에까지 이르렀다. 문재인은 정상적 한국 기준 시간대인 북한 시계까지 일본 기준으로 바꾸어 버렸다. 왜 일본 식민 사상에 젖어 살아가고 있는건가? 말로는 친일청산 이라고 할뿐. 생활과 표준은 일본 기준에 맞춰 살고 있는것인가. 

 

대표적 친일파 박정희가 원복한걸 계속 따라하는것도 모잘라 문재인은 북한 시계까지 강제로 맞추는 실수를 범하였다.

 

 

 

... 30분 단위 규정이 불편하다고?

이란(동경 52.5도, UTC+3:30),

아프가니스탄(동경 67.5도, UTC+4:30),

인도·스리랑카(동경 82.5도, UTC+5:30),

네팔(동경 86.25도, UTC+5:45),

- 네팔은 UTC+5:45라는 독특한 시간대를 사용.

미얀마(동경 97.5도, UTC+6:30),

오스트레일리아 중부(동경 142.5도, UTC+9:30),

캐나다 뉴펀들랜드(서경 52.5도, UTC-3:30).

 

.세종대왕이 만드신 해시계도 현재 127도 30분과 불과 2분 차이날 정도임. UTC+8:30은 조선시대때 세종대왕과 장영실 그리고 세종이 등용한 젊은 과학자들이 과학기구를 제작하고, 역법을 써서 산출해낸 시각이다. 이미 우리 고유의 시간이 UTC+8:30인데 일본과 박정희가 지정한 UTC+9:00이 우리 표준시라고 우기다니.. 혼란, 소모비용? 그럼 다른 나라들의 UTC+30분 시간들은 뭔가.

 

... 일본과 다까기 마사오 박정희가 바꾼 일본 기준시계. 세종대왕과 배재학당 이승만 초대 대통령 동경 127도 30분 표준자오선 기준이 더 합리적이다.

 

 

 

 

 

 

[팩트체크] 국토 중심부를 지나는 127도 30분 표준자오선1. 'UTC+9'를 표준시로 삼은 건 1912년 1월부터2.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이 일제 잔재 청산을 명분으로 동경 127도30분으로 바꿨다. 3. 1961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 쿠데타 뒤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국제관례를 이유로 시간대를 돌이켰다. 4. 문재인은 북한 시계까지 일본 기준으로 바꾸어 버림.

 

... 왜 일본 식민 사상에 젖어 살아가고 있는건가? 말로는 친일청산 이라고 할뿐. 생활과 표준은 일본 기준에 맞춰 살고 있는것인가.

 

 

시간주권 회복! 국민청원!

 

https://www1.president.go.kr/petitions/214935

 

 

일제 잔재 청산일제시대부터 일본에 의해 정해졌으며, 오늘 지금 이 시간까지 속절없이 이어져 온 것들에 대한 청산이 먼저이다.

 

1. 도로명 주소

기존의 지번주소가 일본 강점기의 잔재 입니다. 조선 시대에는 지금의 세종대로가 육조거리이고 통·반이라는 것이 사실상 도로명 주소입니다. 이를 일본 강점기 때 토지 수탈들의 목적으로 지번주소를 만든 것입니다. 

 

2. 지적도 측량 원점토지 소재, 경계... 등을 통해 소유관계를 나타내는 지적도와 한국에서 제작되는 각종 지도는 모두 일본을 기준으로 만들어졌다. 그 기준이 되는 지점이 토쿄 미나토구 토쿄 타워 부근에 있는 소위 "일본 경위도 원점(토쿄 원점)" 이다.
일본은 1892년 경도와 위도의 기준점으로 정했고, 1910 년부터 조선에도 적용했다.  각종 지도는 물론, 소재와 소유관계를 나타내는 국가 공식적인 토지대장이나 지적도의 측량 기준이 일본이다.
다행히 2006년국제표준 세계측지계를 적용한 새로운 원점인 "동해 원점"이 울릉도에 설치되었고, 독도에 세계측지대를 적용한 "지적위성기준점"이 설치되었다. 하지만 그러나 

토지 소유권과 경계 등과 관련된 지적도는 분쟁의 소지가 있어 여전히 기존 "일본 경위도 원점(토쿄 원점)" 방식을 유지하고 있다. 


3. 서울 표준시 (Seoul Standard Time) 표준시간 문제

지금 한국의 표준 시간은 일제 시대부터동경 135도의 토쿄 시간(TST : Tokyo Standard Time)으로 정하였습니다.


1954년 3월 21일 이승만 대통령령에 의해 동경 127.5도 표준시로 환원되었는데, 1961년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뒤 국가 재건 최고 회의에서 그 해 8월 10일 다시 동경 135도로 변경된 이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북한 시계까지 일본 식민 시절 동경기준으로 표준자오선 시계로 바꾸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울릉도와 독도 남측에 위치한 수심 약 2천m의 해저분지인 울릉분지.

최근 이 해역에서 다량의 퇴적물이 해저의 경사면을 따라 일시에 이동하는 해저 사면 사태가 발생해 주목받고 있습니다. 해저 사면 사태는 해저 지진이나 가스하이드레이트 등으로 해저 자원들이 떨어져 나오면서 퇴적물이 약화된 게 원인으로 추정됩니다. 지진 전문가들은 이 같은 해저 활동의 연구가 자연재해 원인 규명뿐만 해저 자원 확보에도 매우 중요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김병엽/한국지질자원연구원 해저지질탐사연구센터장 : "산업 발전에 필요한 어떤 광물 자원이나 석유 가스 자원에 대한 가능성이 있는 지역이기 때문에 꾸준한 연구가 필요한 지역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해역에 대한 국제공동 해양시추 연구가 추진됩니다. 국제공동 해양시추 연구는 미국·일본·유럽 등 26개 국가가 참여하는 사업입니다.

 

news.v.daum.net/v/20210227215254105

 

동해 밑에서 어떤 일이?..울릉분지 해역 국제 공동시추 추진

[KBS 대전] [앵커] 울릉도와 독도 부근의 울릉분지 해역은 지리적으로나 해양자원 확보 면에서 매우 중요한 곳인데요. 오는 2024년부터 해양 과학 시추를 위한 국제공동 연구에 울릉분지 해역을 시

news.v.daum.net

현재 대한민국 표준시 UTC+9, 127도는 일제 잔재로 인식되고 있다. 'UTC+9'를 표준시로 삼은 건 1912년 1월부터인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나라는 해방 뒤인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이 일제 잔재 청산을 명분으로 동경 127도30분으로 바꿨다. 그러나 1961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 쿠데타 뒤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국제관례를 이유로 시간대를 돌이켰다. 대표적 친일파 박정희가 원복한걸 계속 따라하는것도 모잘라 문재인은 북한 시계까지 일본 동경 기준 시계로 강제로 맞추는 실수를 범하였다. 독도 해양시추 연구에 일본도??

 

 

 

대한제국 시절 우남 이승만 박사

이승만은 일찌감치 개화사상을 받아들여 아펜젤러의 배재학당에 입학하였다. 

 

대한제국 시절 협성회 회보와 독립신문 주필, 교육계몽운동으로는 독립협회 활동 등을 하면서, 왕정 폐지와 공화국 수립을 도모하였다는 반역의 죄목으로 옥살이를 하였으며, 독립정신을 저술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한성 임시정부와 각지에서 수립된 임시정부의 수반을 거쳐 1919년 9월 11일부터 1925년 3월 23일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역임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 국무위원회 외교위원 등을 역임했다. 주로 미국에서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을 벌였다.

 

일제 강점기 중반에는 미국 및 스위스 등을 무대로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한편 일본내막기를 저술하는 등 일본의 미국 침략을 경고하였으며 태평양 전쟁 이후 미군 OSS와 임시정부 간의 연결을 주선하였다. 대한민국의 독립을 공약한 1943. 11. 27. 카이로 선언의 배경에는 이승만의 집요한 외교노력이 있었고 그 결실이었다.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미국 체신청에서 발행한 태극기 모양 우표 발행에 크게 기여했으며, 항일 단파 라디오 방송 연설 등에도 참여하였다. 1945년 해방 후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에 추대되었으나, 귀국 후 거절하였다.

 

우리나라의 국기 제정은 1882년(고종 19년) 5월 22일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 조인식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이승만 정부가 수립되면서 태극기의 제작법을 통일할 필요성이 커짐에 따라, 정부는 1949년 1월「국기시정위원회」를 구성하여 그 해 10월 15일에「국기제작법 고시」를 확정·발표하였다.

 

초등학교 의무교육 도입으로 문맹률을 획기적으로 낮춘 점. 국민 학교 의무 교육제도 실시. 전국 만 7세 아동의 95.3%가 초등학교에 입학. 전문적 인재 육성을 위해 한국외국어대학교, 인하대학교, 배재대학교 등 많은 대학교를 세움. 그 결과 문맹률은 22%로 떨어짐.

 

지주가 독식하고 있었던 서민은 소작농에 불과했던 한국의 토지개혁. 1950년 3월에 농지개혁법을 단행하여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있던 지주제를 혁파하고 농민들의 불만을 해소하는데 성공한다. 이 농민 불만 해소야말로 6.25전쟁 초반의 패전을 극복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원인

 

이승만은 재임기간 12년동안 미국으로부터 일본과 수교를 맺으라는 수 많은 협박과 회유가 있었지만, 일본과의 수교조건으로 대마도 반환,  식민지보상 36억불 청구 등 사실상 일본이 받아 들일 수 없는 요구를 함으로써 그는 끝끝내 일본과의 수교를 거부했다.

 

1949년 1월 7일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 정부에게 대마도 섬의 반환을 공식적으로 요청했다. 

"대마도는 오래전부터 우리나라에 조공을 바친 우리 땅이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이 그 땅을 무력 강점했지만 결사 항전한 의병들이 이를 격퇴했고 의병 전적비가 대마도 도처에 있다. 1870년대에 대마도를 불법적으로 삼킨 일본은 포츠담 선언에서 불법으로 소유한 영토를 반환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돌려줘야 한다." 당시 한국 정부는 1948년부터 반복적으로 대마도의 반환을 요구했고, 1951년 4월 27일 미 국무부에도 문서로 통보하여 미일 강화 회의 당사자인 미국에게 이 점을 분명히 했다. 

 

대마도 거주 일본인들은 지리적으로 조선에 더 가까운 이유로 조선 정부의 관리를 희망했다. 실제로 대마도주는 15~16세기에 조선에 조공을 바쳤고 조선정부에  정기적으로 사신을 보냈으며 관직도 하사받곤 했다. 임진왜란 직전 대마도주는 조선 통신사 부사 김성일에게 공식적인 조선 영토로서의 명칭을 정해주고, 공식 인장(도장)을 하사하여 주면 신하의 도리에 따라 받들겠다고 했으며, 그 즈음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출정 계획을 파악한 후 조선 조정에 그 사실을 전달하고 전쟁을 대비할 것으로 알리는 우국 충정을 보이기도 한다.

 

UTC+9'를 표준시로 삼은 건 1912년 1월부터인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나라는 해방 뒤인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이 일제 잔재 청산을 명분으로 동경 127도30분으로 바꿨다. 그러나 1961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 쿠데타 뒤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국제관례를 이유로 시간대를 돌이켰다. 실제 6·25 전쟁 직후 이승만 정부에선 30분 차이가 나는 표준시를 썼다. 동경 127도 30분 표준자오선에 따른 결정으로, 현재 북한의 것과 같다.

 

한국의 서울 및 수도권을 기준으로 볼 때 경도는 동경 `126도 5분~127도 5분` 사이에 위치하는데 중간값 127도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경도 1도당 4분 정도의 시차가 있으므로 토쿄 시간과는 약 32분의 차이가 있다. 그러다 1961년 박정희가 다시 동경 135도를 기준으로 삼는 법안을 만들어 오늘에까지 이르렀다. 왜 일본 식민 사상에 젖어 살아가고 있는건가? 말로는 친일청산 이라고 할뿐. 생활과 표준은 일본 기준에 맞춰 살고 있는것인가.

 

이승만 정부의 농지 개혁은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형태의 토지 개혁으로 이 과정에서 토지 가격은 폭락하고, 지주들에게 땅을 매입하고 나중에 토지의 값을 지불하겠다는 유가증권을 주었는데, 이 유가증권은 6.25 전쟁 등을 거쳐서 완전히 휴지조각이 되어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지주들의 몰락과 농민층 분해, 근대적 자본가의 성장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한편 6년 의무교육제 도입과 더불어 각 급 학교를 증설하는 것과 아울러, 일제의 식민지정책에 따라 제한되어 있던 고등교육 기회를 부활시켜 전 국민의 교육수준을 향상시켰다. 국민 학교 의무 교육제도를 실시하였고, 전쟁으로 잠깐 계획에 차질이 있었지만 1954년부터 본격적으로 재개하여 1959년에는 전국 만 7세 아동의 95.3%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문적 인재 육성을 위해 한국외국어대학교, 인하대학교, 배재대학교 등 많은 대학교를 세우는 데 투자했다. 그 결과 문맹률은 22%로 떨어졌고, 학교 수와 학생 수는 3~11배 이상으로 크게 늘었다. 특히 1956년부터 시행된 미네소타 계획은 서울대학교의 많은 교수들에게 미국 유학 기회를 주었다. 그들은 나중에  한국 과학기술계를 이끌 중심 세력으로 떠올랐다. 

 

대한민국이 출범하던 1948년에 문맹률은 80%에 이르렀다. 이승만은 1949년에 모든 어린이가 6년제 초등교육을 무상으로 받도록 하는 의무교육제를 도입했다. 결과 문맹자 수는 1959년에 와서 22.1%로 낮아졌다. 

 

1952년 1월 18일 독도를 포함한 '이승만 라인' 설치하였다. 1954년 1월18일 이승만은 독도 한국령 표지석을 건립 하었다. 

1954년 8월10일 

무인도 독도에 등대불이 켜졌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4년 8월10일 '깜짝 이벤트‘를 벌였다. 미리 독도에 등대를 세워놓고 미국 방문 일정에 맞춰 전세계를 향해 등대 점등식을 열었던 것이다. 일본과 미국이 깜짝 놀란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대한민국 국토의 동쪽 끝 땅임을 알리는 독도 등대불! 일본에 남의 땅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 등불이었다. 


이승만 동상은 지난 1987년 2월 당시 배재대 졸업 동문들이 기증해 세웠다. 많은 철거 논란이 있었지만 배재대학교 측은 대학총동창회, 총학생회와 함께 지난 2008년 6월 5일 우남관 앞에 다시 동상을 세웠다.

 

 

국익을 위한 환율 정책

1950년대 한국은 전쟁의 파괴로부터 경제를 복구를 하고 국민의 의식주 기초 생활을 위한 물자 수입을 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였다. 하지만 한국은 외환 부족 상태에 있었고 부족한 외환을 주로 원조 자금, 유엔군 지출 경비 등으로 충당하였다. 


이승만 정부는 복수환율제를 운용하였는데 외화를 최대한 끌어오는데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협정 환율은 미국으로부터 받는 무상 원조 물자 판매 가격을 가급적 낮게 책정해 민간기업의 재건 활동을 지원했다. 그리고 수출 시장에서는 협정 환율보다 높은 시장 환율의 영향을 받게 했는데, 민간 부문의 수출 활동을 억제하지 않기 위한 일종의 수출지원정책이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미국에서 받은 원조는 최대한 값싸게 민간 부문에 판매하고 수출은 상대적으로 고환율의 영향을 받도록 해서 수출로 벌어 들이는 외화를 극대화하려는 조치였다. 미국이 이에 대해서 끊임 없이 이 복수환율제, 저환율정책에 대한 시정을 요구했지만 이승만은 이를 거부하고 이 때문에 1950년대 후반 한미관계가 갈등에 놓이기도 했다.
다만 이승만 정부의 공정 환율과 시장 환율 등, 복잡한 환율 제도와 관련해 외환프리미엄이라는 경제적 지대가 창출됐는데, 이 때문에 많은 자본가들은 국가가 보유한 외환을 배정 받기 위해 애썼다. (1951년 11월 공정 환율과 시장 환율의 비율은 3.03에 이르렀다.)

‘한국의 MIT’를 목표로 '인하공과대학' 설립. 

 

이승만은 미국의 MIT를 모방한 최고수준의 공과대학을 세우려고 했다. 그것은 한국인들이 전통적으로  문과를 강조해오던 전통을 바꾸어 공업을 발전시켜 보려는 야심찬 의지에서 나온 것이었다. 
6 · 25 전쟁 중인 1952년에 하와이 교민들은 하와이 ‘한인기독학원’ 부지를 판 돈의 일부를 이승만에게 보내왔다. 그 학교는 독립운동 시기에 이승만이 세운 것이었다. 

학교 이름을 인하(仁荷)로 한 것은 1903년 최초의 하와이 이민을 떠난 인천과 그들이 정착해서 돈을 보낸 하와이에서 한 글자씩 고른 것이었다. 

 

국제관계 전문가를 양성하기 위해 '한국외국어대학' 설립

이승만 대통령은 해외로 진출할 국제관계 전문가를 양성하기 위해 

정부 보조로 외국어대학을 세울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정부의 자금 부족으로 실업가 김흥배에 의해

 한국외국어대학이 설립되었다. 

그 과정에서 이승만은 백두진 총리와 영어학자인 박술음 사회부장관을 통해 

행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도록 지시했다.

 

한국 지방자치 시작 이승만
우리나라 대부분의 일반인들은 1950년 대 그것도 전쟁 중인 1952년에 지방자치가 처음으로 실시 된지 잘 모른다. 1948년 첫 헌법을 제정할 때부터 지방자치를 규정 하였고, 이를 구체화한 『지방자치법』을 1949년 7월 4일 제정하였다. 해방 후 미군정에서도 명목상 지방자치와 비슷핫 제도를 시행하려 했지만 미군정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부를 원했기에 제대로 실시하지 않았다. 이승만 정권 시대에 와서야 지방자치가 실시된다. 이승만은 1949년 12월 한 번도 시행되지 않은 지방자치법을 개정, 국내적 불안정을 이유로 지방자치의 실시보류로 인한 지방행정의 공백에 대응하였다.

이승만은 지방자치제를 도입하여 한국의 풀뿌리 민주주의를 성장시켰다. 이승만이 도입한 지방자치제는 박정희의 쿠데타 이후 폐지되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당시 단식투쟁을 불사하며 "지방자치제는 민주주의를 위해 꼭 필요했다"고 호소했다. 거의 30년이나 지나서야 노태우 정권에서 다시 부활했다. 

 

......

이승만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후 행적은 논란이 될만한 건 부정할수 없지만, 대한제국 시절의 행위는 이게 팩트이다. 이승만은 두개의 얼굴을 가진 야누스를 닮은 거인으로 비쳐지고 있다. 한민족의 독립과 번영의 기초를 다진 국부로 추앙 받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 지나친 친미, 종미주의 경향과 한번도의 통일을 저해하고 민주주의를 압살시킨 시대착오적 독재자로 매도당하고 있다.

 
이승만 동상은 지난 1987년 2월 당시 배재대 졸업 동문들이 기증해 세웠다. 많은 철거 논란이 있었지만 배재대학교 측은 대학총동창회, 총학생회와 함께 지난 2008년 6월 5일 우남관 앞에 다시 동상을 세웠다.
 
배재대 이승만 동상 철거 소동
배재대 이승만 동상은 1987년 2월 배재대 졸업 동문들이 기증해 세웠다. 하지만 같은 해 6월 항쟁 과정에서 재학생들에 의해 철거됐다. 이후 1990년 2월 학교 측이 동상을 재건립 했으나 학생들이 달걀과 페인트를 끼얹으며 철거운동을 계속하자 1997년 자진 철거했다.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2008년 6월 5일 학교 측은 건국 60년을 기념한다며 우남관 앞에 다시 동상을 세웠다. 대학총동창회와 총학생회가 함께 재건립을 추진했다.
일부 시민단체들이 끊임없이 동상 철거를 요구해 오고 있다. 하지만 학교 측은 “이 동상은 총동창회에서 건립한 것으로 학교가 철거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이어 “동상 철거 건은 학교가 협상할 문제가 아니다”라고 못 박았다.
 
 

역사학자 E.H. Carr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 라고 했다.

Carr는 역사란 단순히 과거 사실의 기술이 아니라 현재의 상황에 위치지어져있는 현재의 역사가가 과거를 평가하고 서술하는 것이 역사라고 말한다. 그리고 역사란 하나의 과학이고, 과거의 인물들의 평가를 하는 도덕가는 아니라고 말한다. 역사는 Carr가 말한데로 현재와의 대화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역사가의 시각에 따라 변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역사적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역사는 사실이고 그러한 사건의 열거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역사가 그렇게 사건의 나열로서만 끝날것은 아닐 것이다. 사건을 보고 그것에서 배우며 그를 해석하는 방안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이 바로 歷史다.

Carr가 <역사란 무엇인가>의 첫 장에서 비판의 도마 위에 올린 역사가들을 지배하고 있던 ‘실증’과 ‘주관’에 관한 오도된 인식. 즉 ‘실증주의’와 주관주의’의 문제는 결국 인간의 이성과 합리를 기준으로 역사적 ‘사실’과 ‘판단‘에 관한 자세를 가다듬어야 비로소 역사에 대한 제대로 된 조망이 가능하리라 봅니다

... 학교측에서 세운것도 아니고 배재대 졸업생 동문들이 세운 이승만 동상을 니들이 왈가불가 왜 시비거는 거냐고. 배재대 학생들끼리 훼손하고 철거하고 다시 세우고 하는건 다양한 의견을 가진 재학생들의 의견 개진 과정이니 이해 하겠는데.. 일부 시민단체등 왜 다른 집안의 사람들이 간섭질인거지. 남의 집에 걸려있는 초상화 걸어라 마라 지적질 해대는 모습이 한심해 보인다.
 
 

 

 

 

 

 

 

배재대 우남관

배재대 우남관은 1982년 지상 5층, 지하 1층, 총건평 2,499평으로 건립되었다. 우남은 1895년 배재학당 1회 졸업생으로서, 대한민국 초대대통령을 역임한 이승만 박사의 호이다. 배재대 우남관에는 학생지원센터 및 취업정보실(1층), 인문대학 교학과 및 교수연구실(2층), 외국어교육센터(3층) 및 강의실, 어학실(4층) 등이 자리하고 있다.
[출처] [배재대 캠퍼스 투어] 배재대학교 우남관|작성자 배재대학교

 

 

 

 

 

 

 

 

 

 

 

 

 

 

 

 

 

 

 

미국등 서양인들에게 동양은 단지 그들의 이용 도구로 인식될뿐이다.

 

일본에서 독립한 한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에게 재임기간 12년동안 미국으로부터 일본과 수교를 맺으라는 수 많은 협박과 회유가 있었다. 

 

미국은 한국을 해방시키는데 중요한 역활을 했지만 친일파란 '악의 씨'를 보호하고 육섬함으로써 대한민국 근대사에 뼈아픈 역사를 남겼다. 1945년 9월 상륙한 미 점령군은 한국인들은 적으로, 재한 일본인들은 친구로 비쳐졌다. 

조선 총독부 기구는 미군정 기구가 되었다. 일제에 부역한 친일 민족반역자들은 유임되었고 곧 승진했다. 특히 해방지 되자 두려워 피신했었던 경찰을 다시 불러 불러들인 것은 한국인을 분노케 했다. 해방은 해방이 아니었다. 


미국이 한국인 의사와는 반대로 친일파를 관리자로 유임시킨 것은 친일파에 대한 한국인의 감정과 한국의 현실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미 군정이 조직저긍로 잘 훈련된 친일 경찰을 중시한 이유는 경찰 책임자 마글린 대려의 다음과 같은 발언에 드러나 있다. "그들이 일본인을 위해서 훌륭한 업무를 수행했다면 우리를 위해서도 그럴 수 있으리라고 생각 합니다."


남조선 과도 입법의원에서 미군정과 극우 세력의 반대를 무릅쓰고 1947년 7월 '민족반역자 부일 협력자 간상배에 대한 특별법'이 통과 되자 미군정은 이것을 공포할 것을 거부했다. 미국은 제헌 국회에서 친일파를 처단하려는 것에 대해서도 곱지 않은 시선으로 지켜봤다. 미국은 이승만에게 친일파를 관리로 등용할 것은 꾸준히 요구하였다. 

 

또한 이승만은 일본과의 수교조건으로 대마도 반환,  식민지보상 36억불 청구 등 사실상 일본이 받아 들일 수 없는 요구를 함으로써그는 끝끝내 일본과의 수교를 거부했다

 

.... 보다시피 미국은 한국은 동아시아 진출을 위한 작은 도구로 인식할뿐이다. 일본 식민지때 당한 아픔과 고통에 대해서는 그 어떤 관심과 아픔이 없다. 언제까지 미국의이용도구로 전락할 것인가. 정확한 사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세상에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백 사람이 있다면 
그중에 한 사람은 나입니다

이 세상에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열 사람이 있다면 
그중에 한 사람은 나입니다

​이 세상에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한 사람밖에 없다면 
그 한 사람은 나입니다

​이 세상에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면 
그건 내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입니다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대통령의 부인인 프란체스카 여사 글
#프란체스카 도너(Francesca Donnere, 1900∼1992)인데 오스트리아 출생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젊은 시절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만나 결혼하게 되고 조국광복 이후, 귀국하여 이승만을 도와 대통령이 되게 했으며 평생 한국인으로 살았던 분입니다.
#한복을 즐겨 입었으며 평소 근검절약하는 생활로 올이 터진 스타킹을 신고 몽당연필을 깎아서 사용한 일화는 눈물겹기까지 합니다.

프런체스카 도너 (ft 이부란, 이금순)

한국 호적상 기재된 이름은 '푸랜시스카 또나'이고, 스스로 '푸랜시스카'라는 한글 표기를 썼으며, 한국명은 이부란이다. 귀화 후에는 남편이 지어준 '이부란(李富蘭)'이라는 이름도 썼다. 다른 하나는 이금순이다. 우연히 만난 오스트리아인이 "당신은 오스트리아 사람인가요?"라고 묻자 "난 한국 사람입니다. 우연히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났을 뿐"이라고 대답한 일화가 있다고 하며 다른 일화로는 서양인이면서도 한복을 무척 사랑했다고 한다. 문서에 있는 사진도 한복을 입고 찍은 것이다. 

 

프란체스카 여사가 한복을 처음 입어 본 것은 신혼시절인 1935년이었다. 독립운동을 하던 이승만 박사와 25년의 나이차를 극복하고 결혼한 이듬해, 미국 순회도중 윤치영(훗날 초대 내무부장관)부인으로부터 한복을 선물로 받았다. 그대 한복의 아름다음에 매료된뒤 거의 평생 '한복패션'을 즐겼다.

 

이승만 대통령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
그녀는 12년 동안 남편의 독립 운동을 돕고, 12년 동안 영부인으로 살았으며, 22년 동안 남편 없는 땅에서 살다간 파란 눈의 이방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쪽을 찌고, 한복을 입고, 한국 음식만 먹고, 조금이라도 낭비하는 것이 보이면 국민들이 낸 세금이라며 절약하고 또 절약하라고 당부한 한국인보다 더 한국적인 사람이었다.

프란체스카 vs 김정숙, 대한민국 영부인의 패션, 극과 극 

https://www.youtube.com/watch?v=L11y4q6ng9c 

 

#채널A뉴스 #뉴스A라이브 #뉴스alive
김어준 “김정숙 브로치 2억? 가짜뉴스”…신평 “반환하라”

https://www.youtube.com/watch?v=v78u0boGGmk

 

조선총독부 해체 (이승만 ~ 김영삼)

조선 총독부 기구는 미군정 기구가 되었다. 일제에 부역한 친일 민족반역자들은 유임되었고 곧 승진했다. 특히 해방지 되자 두려워 피신했었던 경찰을 다시 불러 불러들인 것은 한국인을 분노케 했다. 해방은 해방이 아니었다. 

 

미군정은 38도선 이남의 일본군은 무장해제 시켰지만 일경으로 복무했던 조선인 경찰들은 거의 그대로 기용했으며 조선총독부 산하 관리들도 변함이 없었다,  군정 경찰은 경무국이라는 이름으로 1945년 10월 21일에 창설됐다. 1946년 11월 기준으로 상위 계급의 간부가 된 군정 경찰의 82%에 달하는 사람들이 친일 경력이 있었다.

 

미국이 한국인 의사와는 반대로 친일파를 관리자로 유임시킨 것은 친일파에 대한 한국인의 감정과 한국의 현실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미 군정이 조직저긍로 잘 훈련된 친일 경찰을 중시한 이유는 경찰 책임자 마글린 대려의 다음과 같은 발언에 드러나 있다. "그들이 일본인을 위해서 훌륭한 업무를 수행했다면 우리를 위해서도 그럴 수 있으리라고 생각 합니다."

 

남조선 과도 입법의원에서 미군정과 극우 세력의 반대를 무릅쓰고 1947년 7월 '민족반역자 부일 협력자 간상배에 대한 특별법'이 통과 되자 미군정은 이것을 공포할 것을 거부했다. 미국은 제헌 국회에서 친일파를 처단하려는 것에 대해서도 곱지 않은 시선으로 지켜봤다. 미국은 이승만에게 친일파를 관리로 등용할 것은 꾸준히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일본과의 수교조건으로 대마도 반환, 식민지보상 36억불 청구 등 사실상 일본이 받아 들일 수 없는 요구를 함으로써그는 끝끝내 일본과의 수교를 거부했다.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었다가 1995년에 일제 잔재의 청산과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우자는 일환으로 철거되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역사 바로세우기를 위해 조선총독부 건물을 해체하라고 지시하였고,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1995년 8월 15일 광복절에 중앙돔 해체를 시작으로 1996년 11월 13일에 모든 철거작업을 완료했다.

사실 6.25 전쟁이 끝나고 이승만 초대 대통령부터 노태우 대통령 시절까지 매번 대통령들이 조선총독부를 철거하려는 움직임은 있었다. 

35년간의 식민시대가 지나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부터 곧바로 치욕의 과거사를 대표하는 총독부 건물 철거를 둘러싼 찬반 논쟁이 시작되었다. 

이승만 전 대통령도 지나가면서 저 건물을 놔두어서 되느냐고 여러 차례 되내었다고 한다. 맨 처음에 해체가 논의된 것은 6.25 전쟁 중이었던 1.4 후퇴 이후에 막 서울을 수복한 직후. 이승만 대통령이 일제의 상징을 서울의 심장부에 둔다는 것이 말이 되냐면서 철거를 지시하면서였다.

당시 이 계획을 검토한 사람은 육군 공병감 엄홍섭과 육군 참모총장친일파 매국노 버저리 개색히 백선엽이었는데, 당시 공병대에서는 "이렇게 막대한 석재를 나를 장비를 도무지 못 구하겠다." 하고 난색을 표했고 백선엽도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미군에게 불도저 4대를 빌려오긴 했는데 중장비는 그게 고작이었고 기껏해야 지게꾼들이나 동원할 수 있었다. 해체할 능력은 아예 없고 폭파라도 시켜서 억지로 없앤다 해도 무거운 석재를 나를 능력은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핵심적 원인은 당시 대한민국의 국력으로는 철거할 능력이 없었다는 것. 당시는 모든 정부 재정과 수입 물자를 미국 원조에 의존할 때였다. 

백선엽은 1943년 2월 간도특설대의 일원으로서 압록강, 두만강 상류 일대에서 중국 항일 게릴라 토벌에 종사했다. 당시 중국 공산당이 주도한 항일 게릴라에는 중국인, 만주인과 함께 조선인도 포함돼 있었다.

 

...문재인 친일 매국노 버러지 개색히 백선엽 현충원 안장
...백선엽 장군 빈소에 조화 보냈던 문재인 대통령

 

 

나라가 바로 설려면 우선 국민의 뜻이 바로 서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