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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대마도를 불법점거 중이고 국제법상 대마도는 한국땅

ㅋㅌㅌ 2018. 10. 8. 13:21

국제재판소의 최종 판결은 일본의 심장을 꿰뚫는 치명적인 칼날과도 같았다. "대마도는 한국령이라고!" 키시다 후미오는 너무 무서워서 바지에 오줌을 쌌다.  

https://www.youtube.com/watch?v=LRLYOfarSAk 

[단독] 대마도 분쟁 국제사법재판소 간다!! 대마도, 한국땅 될 확률 70%
https://www.youtube.com/watch?v=46Z_AFEwDP8 

대마도, 한국영토 편입 임박 

https://www.youtube.com/watch?v=8mGMFg7BE5I 

일본이 대마도를 불법점거 중이고 국제법상 대마도는 한국땅!

1. 유럽 동양학자 클라프로트가 번역한 지도 <삼국접양지도> 프랑스어판

오가사와라 제도.. 미국 페리제독이 일본 강제 개항하면서 동양 진출의 섬으로 식민지로 만듬.
일본이 영토 소유 주장한  근거자료로 <삼국접양지도> 프랑스어판 제시
미국은 어쩔수 없이 삼국접양지도의 증거를 인정하고 일본에 오가사와라 제도 반환
그런데 <삼국접양지도>에 독도와 대마도가 한국 땅이라고 표시.
일본이 주장한 것과 마찬가지로 <삼국접양지도>를 근거로 대마도가 한국땅임이 명확해짐.
2. 미국 육해군 합동 정보조직 "JANIS 75'
대마도가 한국 땅이라는 지도가 발견

3. 청나라 강희제 시절 제작한 <십육성구변도>  대마도는 한국땅이라 표기

 

[팩트체크] 대마도는 한국땅, 오가사와라 제도는 미국땅, 센카쿠 제도는 중국땅, 오키나와 제도는 메이저 합병전 류큐왕국 재건

일본이 대마도를 불법점거 중이고 국제법상 대마도는 한국땅!

∙1870년대에 대마도를 불법적으로 삼킨 일본은 포츠담 선언에서 불법으로 소유한 영토는 반환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이제 우리에게 돌려줘야 한다 - 이승만 대통령 1949년 1월 7일
∙대마도는 경상도에 예속되어 있다(對馬島隷於慶尙道) 모든 보고나 문의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경상도 관찰사에게 보고하라. - 『세종실록』 1420년(세종2년) 2월15일(양력)

[증거1] 1419년(세종1년) 6월9일 : 대마도는 본래 우리나라 땅- 대마도 정벌 직전 태종의 교시
[증거 2-1] 1420년(세종2년) 윤1월 10일 : 대마도 도주, 대마도를 조선에 귀속하게 해달라 요
[증거 2-2] 1420년(세종20년)윤 1월 23일 : 대마도는 경상도에 예속돼 있으니 대마도의 모든 사정은 경상도 관찰사에 보고할 것 -대마도 도주의 대마도를 조선에 귀부 청원에 대한 승락
[증거3] 1438년(세종20년)2월 19일: 일본에서 보내온 일본 전도에 대마도가 누락
[증거4] 1447년(세종 29년)5월 6일: 대마도 경차관(3)* 조휘가 대마도주에게 명령
[증거5] 1474년(성종 5년)10월 6일: 대마도 도주, 모든 대마도는 조선의 신하
[증거6] 1494년(성종 25년) 3월 26일: 대마도는 조선에 귀부하여 대대로 충심을 다해왔음
[증거7] 1544년(중종39년)3월 21일: 대마도주는 조선에 귀순한 사람
[증거8] 1577년(명종12년)2월 9일: 예로부터 대마도에 감독관을 보냈고 대마도에 죄가 있으면 군사를 일으켜 문책
[증거9] 1705년(숙종31년)12월 5일: 대마도 도민은 조선의 변방의 백성
[증거10] 1809년(순조 9년)12월 2일: 대마도민의 세금을 조선에서 징수, 대마도의 모든 의식주 조선에서 지급.
[증거11] 1849년(철종 원년)11월 2일: 19세기 중엽 여전히 대마도는 조선에 조공을 바쳤음.
[증거12] 1876년(고종13년) 1월 20일: 일제의 강압에 의한 불평등 조약-강화도조약 체결 이전1875년 이전까지 대마도는 경상도 동래부의 관할

[강효백의 신아방강역고-35] 대마도는 1870년대까지 한국의 속령 스모킹건 12선
https://www.ajunews.com/view/20210629145846340

 

[속보] 대마도, 한국영토 편입 임박... 대마도 국제사법재판소 회부! 한국, '대마도 되찾기' 임박!
https://www.youtube.com/watch?v=o9u4lcZEfek 

 

 

[팩트체크] 대마도는 한국땅, 오가사와라 제도는 미국땅, 센카쿠 제도는 중국땅, 오키나와 제도는 메이저 합병전 류큐왕국 재건

[오키나와 류큐 제도는 삼별초 후손들이 사는 한국땅]

#삼별초 #류큐 오키나와 #한국 후예 #계유년 고려와장조 #1237 #족보문화 #절구공이 #태극무늬 #류큐 왕국 삼태극 #홍길동 #이어도 신화 #류큐만국진량 
[속보] 태평양의 어느 섬에서 태극문양을 국기로 삼는 나라 발견!! 섬 인구 대부분이 한국인의 후예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https://www.youtube.com/watch?v=sBLESHNo5PQ 

 

[일본 해체 오키나와 분리] 원래 일본이 아니었던 류큐 왕국. 오키나와 제도 류쿠왕국.. 1879년 메이지 시대 일본에 병합된 것뿐이니 다시 독립선언 해라. 일본에 지원도 못 받는데 메이지 시대때 강제 병합된거 해지하고 독립해라. 메이지 유신때 일본한테 먹히고, 2차 세계대전후 미국한테 먹히고 1972년대 일본한테 먹히고도 미국기지로 활용되고.. 그냥 류쿠왕국으로 부활해라. 일본이 재해 지원도 안해주고 건설개발도 안해주는데.. 좀 깨어나 류큐왕국 재건설 가즈아.

...조선왕조실록에 류큐국이 조선에 조공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왕조는 류큐국에 1416년(태종 16년), 이예를 사신('유구국통신관')으로 파견하였다. 

 

#류큐 자치 연방공화국 #오키나와 독립단체, 한국군 주둔검토 #류큐국 ##1879년 일본 강제병합 #한국은 독립 #류큐는 독립못함 

일본, 오키나와 독립선포! 난리난 일본상황, 오키나와 독립단체 "일본인 쫓아내고 한국인 주둔시키겠다" 

https://www.youtube.com/watch?v=PlvY5f8Gcto 

[속보] "오키나와는 지금부터 한국땅이다" 오키나와의 긴급 폭탄발표에 일본이 한국에 무릎꿇고 빌고 있는 놀라운 상황.. 한국 영토 확장, 7광구도 획득 초대박 났다
https://www.youtube.com/watch?v=qdeHILHAc64

 

 

 

세계 대세는 병합전 나라로 되돌아 가는 흐름... ???

 

[소련 해체 4개 블록으로 나뉜 15개국] 소련은 러시아 연방,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조지아, 우크라이나, 몰도바,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투르크메니스탄, 벨라루스, 카자흐스탄으로 소련은 정식으로 해체되었다.

 

[55개 소수민족 중국 해체 몽고족, 만주족, 위구르, 티베트] 55개 소수민족이 뭉친 중국이 나눠지고 분열될 날이 다가오고 있다. 소수민족 중 과거 오랜 시간 정권을 잡아 통치한 왕조들이 많다. 몽고족 원나라, 만주족 청나라, 위구르자치구, 티베트자치구. 중국 55개 소수민족 1억2500만 명. 현대판 위촉오 삼국 분열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상하이 #항저우 아시안 게임 취소 #중국 붕괴 #코로나 봉쇄  

중국 대륙을 발칵 뒤집히게 만든 '충격적인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w_LyV1D6iiY 

"이대로는 못살겠다" 한국 되겠다는 오키나와 

https://www.youtube.com/watch?v=DXd9D8Hr3qE

[류큐왕국 역사(History of the Ryukyu Kingdom)] 비극적인 오키나와 역사 10분 총정리  

https://www.youtube.com/watch?v=oovAVYpHv9w 

[단독] 위구르 독립군 창설 창단...중국 강력 반발  
https://www.youtube.com/watch?v=vnSXEiMDzYY
[속보] 티베트, 독립 공식선언..바이든 美대통령, 군사지원 
https://www.youtube.com/watch?v=nTc9iOD4_cw

 

오가사와라 제도

1. 스페인 발견 - 1543년 10월 2일, 스페인 탐험가 '베르나르도 데 라 토레.

2. 영국 소유 - 1827년 HMS Blossom 호의 선장 비체이 대위 영국 소유물 선언.

3. 미국 주민 거주 - 1830년 미국인 5명과 하와이 폴리네시아인 20명이 거주. 

4. 일본 주민 거주 - 1876년 일본 정착민 38명 파견.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미국령으로 편입되어 관리. 1968년에 다시 일본으로 반환.

...최초 주민 거주는 미국. 일본이 어떤 억지 논리 펼쳐서 미국한테 오가사와라 제도 가져오게 된걸까 궁금해 지는군. 미국은 주민 먼저 거주 했는데 왜 반박도 못하고 오가사와라 제도 뺏기게 된걸까. 

https://namu.wiki/w/%EC%98%A4%EA%B0%80%EC%82%AC%EC%99%80%EB%9D%BC%20%EC%A0%9C%EB%8F%84

 

 

 

 

 

일본이 대마도를 불법점거 중이고 국제법상 대마도는 한국땅!

..대마도는 옛날에 우리 계림에 예속되었는데 언제부터 왜인이 살게되었는지 모르겠다(동지여지승람) ..대마도주는 동번으로 청하면서 우리나라에 신하로서 섬겼으며(조선실록) ..대마도는 섬으로서 경상도의 계림에 예속 되었던바(세종실록)

조선방역지도(1557년), 대동여지도(1860년)...조선 1557년에도 1860년에도 대마도가 경상도에 속한 우리땅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국경선 일대의 섬을 비워둔다는 ‘공도(空島) 정책’으로 일본인들이 들어와 살게 되고 1868년 일본의 메이지 유신때 일본땅으로 넘어감.

대마도와 독도를 한국 영토로 선언한 이승만 대통령
이승만은 재임기간 12년동안 미국으로부터 일본과 수교를 맺으라는 수 많은 협박과 회유가 있었지만, 일본과의 수교조건으로 대마도 반환,  식민지보상 36억불 청구 등 사실상 일본이 받아 들일 수 없는 요구를 함으로써 그는 끝끝내 일본과의 수교를 거부했다.

 

 

#대마도 #독도 #대마도한국땅 

[그때 그 뉴스]"대마도·독도는 한국 땅" 일본 고지도 발견 / KBS뉴스 

https://www.youtube.com/watch?v=RBxgYxF8yg8 

 

 

조선방역지도(1557년), 대동여지도(1860년)... 고지도 두개를 비교하면 조선 1557년에도 1860년에도 대마도가 경상도에 속한 우리땅임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어리석은 정책이었던 국경선 일대의 섬을 비워둔다는 ‘공도(空島) 정책’으로 일본인들이 들어와 살게 되고 파벌정치에 빠져있던 조선이 알지 못하는 사이 우리영토가 정식적으로 일본의 영토로 일본이 선포한 것은 1868년 메이지 유신 때입니다. 1868년이전 대마도는 조청일 모두 조선의 땅으로 표시했습니다. 하지만 우린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국사 교과서에 대마도란 단어는 단 한마디도 없죠. 없는 사실도 꾸며 만드는 일본의 역사와 비교하면 정당한 사실도 일본눈치를 보며 숨기는 우리 국사는 대조적입니다.

 

 

지금까지 일본땅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대마도가 사실은 한국땅이었다는 명백한 증거가 공개 되었습니다. 책의 표지를 보면 제목 부터가 한국이라고 표기되어 있으며 제주도와 대마도가 포함되어 있다고 소활호로 선명히 표시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미국도 대마도가 일뽄땅이 아니라 한국의 소유였다는 것을 미국은 오래전부터 인지하고 있었다. 

1. 책의 표지를 보면 제목부터가 한국이라고 표기되어 있으며 제주도와 대마도가 포함되어 있다. 
-미국 육해군 합동 정보조직 "JANIS" 75권

2. 독도를 포함하여 대마도가 한국 땅이라고 표시..

삼국접양지도 프랑스어판 - 유럽 동양학자 클라프로트

(오가사와라 제도의 일본 지배를 정당화하는 일본의 공식적인 증거 자료로 활용)

3. 일본이 자꾸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대마도에 시선이 가지 못하게 하려는 일본의 연막 작전이다. 

"일본이 숨겨오고 있는 대마도 독도의 비밀" -김상훈

 

대마도는 한국땅 증거확보 ! 미정보부 극비문서 공개에 발칵 뒤집어진 일본
https://www.youtube.com/watch?v=cCi89-V0PE4

 

1. 오가사와라 제도.. 미국 페리제독이 일본 강제 개항하면서 동양 진출의 섬으로 식민지로 만듬.
일본이 영토 소유 주장한  근거자료 - 유럽 동양학자 클라프로트가 번역한 지도 <삼국접양지도> 프랑스어판
미국은 어쩔수 없이 삼국접양지도의 증거를 인정하고 일본에 오가사와라 제도 반환
그런데 <삼국접양지도>에 독도와 대마도가 한국 땅이라고 표시.
일본이 주장한 것과 마찬가지로 <삼국접양지도>를 근거로 대마도가 한국땅임이 명확해짐.
2. 미국 육해군 합동 정보조직 "JANIS 75'
대마도가 한국 땅이라는 지도가 발견

 

[단독] 대마도 분쟁 국제사법재판소 간다!! 대마도, 한국땅 될 확률 70%
https://www.youtube.com/watch?v=46Z_AFEwDP8 

[단독해외반응] "대마도는 역사적으로 한국땅" 미군의 과거 충격 기밀문서 공개되자 일본 전체가 난리 난 상황
https://www.youtube.com/watch?v=aBwhr2SVdrQ 

대한민국 최초 대마도 반환서한 발송에 충격받은 대마도의회!  

https://www.youtube.com/watch?v=iWJvLmk1WXo 

#대마도 #대마도송 #독도 

대마도는 우리땅 [잃어버린 땅 대마도 대한민국 소중한 영토]

https://www.youtube.com/watch?v=xqPuzw9ImgI 

 

1. 미국은 아랍인들에게 거부당했다.
2. 친한 아랍과 협력.
3. 미국은 합국에 협력을 요청했다.
4. 미국은 한국의 대마도 탈환을 도우면서 이 거래를 교환했다.
#사우디 #네옴시티 #마니파 유전 #대마도 #국제사법재판소 
아랍인들의 결정은 미국을 충격에 빠뜨렸다. "한국의 선도기술,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유전을 한국에 드리겠습니다. "양국의 외교 관계는 새로운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zUFVXdS_ryI

 

 

 

[앵커]

YTN은 앞서 여러 차례 대표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 민영휘의 무덤을 관리하는 가옥이 지방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는 것을 보도했습니다.

문화재로 지정돼 수억 원 세금이 들어가고 있지만, 친일 관련 역사는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했는데요.

계속된 문제 제기에 춘천시가 문화재 안내판을 슬그머니 교체했는데, 과연 어떻게 기록돼 있을까요?

 

YTN [단독] 친일파라 부르지도 못하고..슬그머니 교체한 안내판 

https://news.v.daum.net/v/20220331022809392

 

[단독] 친일파라 부르지도 못하고..슬그머니 교체한 안내판

[앵커] YTN은 앞서 여러 차례 대표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 민영휘의 무덤을 관리하는 가옥이 지방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는 것을 보도했습니다. 문화재로 지정돼 수억 원 세금이 들어가고 있지만,

news.v.daum.net

 

 

(대마도가 조선영토로 표기되어 있는 고지도)

 

1949년 1월 7일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 정부에게 대마도 섬의 반환을 공식적으로 요청했다. 

"대마도는 오래전부터 우리나라에 조공을 바친 우리 땅이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이 그 땅을 무력 강점했지만 결사 항전한 의병들이 이를 격퇴했고 의병 전적비가 대마도 도처에 있다. 1870년대에 대마도를 불법적으로 삼킨 일본은 포츠담 선언에서 불법으로 소유한 영토를 반환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돌려줘야 한다." 당시 한국 정부는 1948년부터 반복적으로 대마도의 반환을 요구했고, 1951년 4월 27일 미 국무부에도 문서로 통보하여 미일 강화 회의 당사자인 미국에게 이 점을 분명히 했다. 

 

하지만 당시 미국의 반응은 '일본의 실효 지배가 되고 있는 곳이므로 미일 평화조약으로 이 섬의 반환을 논의할 이유가 없다'였다.  즉, 역사상으로는 한국 정부 말이 맞지만 사실상 일본의 지배가 오랫동안 지속되어 뒤집기 어렵다는 얘기다. 국제법상 100년간의 실효 점유는 법적 소유권의 효력과 맞먹는다.

 

그럼 대마도가 100년간 일본에 의해 실효 지배됐는가가 중요한 판단요인이다. 먼지 쌓인 역사책을 펼쳐보자. 1274년, 1281년 고려시대때 일본 정벌을 위한 전초기지 확보차원에서 고려-몽고 연합군이 두 차례 대마도에 상륙한 것이 문서에 나오는 최초의 대마도 기록이다. 지금으로부터 736년전 일로 당시 이 일이 대마도 정벌로 기록된 점이나, 전투내용 언급을 감안하면 당시에도 대마도는 일본인들과 소수의 한반도 유이민이 점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대마도를  정벌한후 항복의례를 받고있는 이종무장군)

 

또다른 기록이 세종실록에 나온다. 지금으로부터 591년전 1419년 6월 19일 태종의 명에 의해 이종무 장군이 군사 17,000명을 함선 227척에 나눠싣고 대마도를 정벌한 기록이 나온다. 역시 그 기록에는 '대마도는 일본에서 쫒겨나 정처없이 떠돌던 자들이 소굴로 삼은 곳'이라는 말로 다수의 일본인과 한반도 유이민들이 점유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안타깝지만 일본인의 대마도 점유 기록이 7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애기다. 여기에서 문제가 비롯된다. 대마도는 역사적으로 한반도 정권의 부속 영토로 일본에서도 인정받았었다. 김정호 '대동여지도',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팔도전도', 조선 태종때 '정대마도교서', 성종때 '동국여지승람', 일본 에도 시대 막부의 명으로 제작된 일본의 '대마여지도', 1834년 제작된 '청구도 동래부 기장현', 일본 역사서'산가요약기', '조선 팔도 총도' 등 많은 역사 기록에서 대마도가 조선의 땅으로 표기되있다. 일본도 임진왜란 때까지는 대마도를 조선 영토로 간주했다는 의미다. 

 

조선의 영토면 행정구역도 관리하고 군대도 주둔시키고 세금도 거둬 영토 주권을 지키려는 노력을 했어야 하는 데 기록상으로만 '우리 영토다' 라고 주장할뿐 군사적 지배권의 강화, 거주 일본인들에 대한 관리 노력이 없었다. 한마디로 신경끄신 거다. 대마도 거주 일본인들은 지리적으로 조선에 더 가까운 이유로 조선 정부의 관리를 희망했다.

 

실제로 대마도주는 15~16세기에 조선에 조공을 바쳤고 조선정부에  정기적으로 사신을 보냈으며 관직도 하사받곤 했다. 임진왜란 직전 대마도주는 조선 통신사 부사 김성일에게 공식적인 조선 영토로서의 명칭을 정해주고, 공식 인장(도장)을 하사하여 주면 신하의 도리에 따라 받들겠다고 했으며, 그 즈음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출정 계획을 파악한 후 조선 조정에 그 사실을 전달하고 전쟁을 대비할 것으로 알리는 우국 충정을 보이기도 한다.

 

공식적으로는 조선 영토에 속하던 대마도는 양국 사이에서 양다리를 타던 중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일본으로 급선회하게 된다. 관심없는 조선 정부 대신 50만에 육박하는 대군을 출동 대기 시켜 둔 일본에 붙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일본에 급격히 기운 대마도는 1870년 일본의 임의병합을 통해 일본땅이 되버리고 만 것이다.

 

육지에서 70km 떨어진 제주도는 지켰으면서 부산에서 겨우 50km 떨어진 대마도를 방치해서 후대에 일본이 자기들 땅이라고 우기고 또 국제법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근거를 만들어준 우리 선조들의 과오가 안타까울 뿐이다. 

 

 

 

 

 

 

 

 

 

 

 

[정대마도교서] 대마도 정벌

태종 계획, 세종대왕 실행

세종원년(1419) 6월 대마도 정벌을 감행

 

 

대마도는 우리나라 남단에서 약 50㎞ 떨어져 있고 일본 구주(九州)로 부터는 147㎞ 거리에 놓여있다.


조선시대에서 해외 정벌에 나선 것은 세종 때가 유일하다고 합니다. 

왜구의 본거지, 쓰시마 섬(대마도)을 토벌한 것입니다. 

 

왜구는 고려 때부터 극성을 부려 세종대에 들어서부터는 노략질을 일삼는 등의 악명이 높은 것으로 자자했습니다. 결국 태종은 이종무 장군에게 병선 227척을 주면서 대마도 정벌을 명했습니다. 신하를 시켜서 대마도를 정벌하라는 명령서로 「정대마도교서」를 내리게 됩니다. "대마도라는 섬은 본래 우리나라 땅인데 다만 험하고 궁벽하며 협소하고 누추한 곳이므로 왜노가 웅거해 사는 것을 들어주었을 뿐이다. 그런데 이에 감히 개처럼 도둑질하고 쥐처럼 훔치는 흉계를 품어서, 경인년 이후로부터 변경에서 방자하게 날뛰기 시작하여 우리 군민을 전사하고, 우리 백성의 부형을 잡아가고, 가옥을 불태운 탓에, 고아와 과부들이 바다 섬 속에서 울고 헤매지 않는 해가 없었다. 이에 뜻있는 선비와 어진 사람들이 팔뚝을 걷어붙이며 분통이 터져서, 놈들의 살과 살가죽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 지가 몇 해가 되었다." 라는 말로 강한 카리스마가 담겨 있는 과연 태종다운 글이었습니다. 


그에 대를 이어 세종도 역시 강력한 경고를 보내게 됩니다. "만일 본국으로 돌아가지도 내게 항복하지도 않고, 여전히 도적질이나 하려는 흉계를 품고 계속 섬에 눌러 있는다면, 마땅히 크게 병선을 준비하여 군량을 가득 싣고 가서 온 섬을 에워싸고 공격할 것이니, 시일이 오래되면 반드시 그 속에서 자멸할 것이다. 그리고 만일 또 용감한 군사 10만 명을 뽑아서 곳곳에 들어가게되면, 주머니 속의 물건이 어디로 가겠는가. 반드시 부녀자, 어린것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땅에서는 까마귀와 솔개의 밥이 될 뿐더러, 물에서는 고기와 자라의 배를 채울 것이 의심 없는 일이다. 그러니 어찌 깊이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여기에서는 화가 오고 복이 되는 길이 뚜렷이 나타나 있는 것으로, 아득하여 추측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버지인 태종과 피를 물려받은 세종, 우리나라와 우리의 민족들을 위협하는 자들은 용서치 않는 기개가 매우 넘치는 임금들이였습니다.
세종원년(1419) 6월 대마도 정벌을 감행한 다음달인 7월 병조판서 조말생(趙末生) 명의로 대마도주에 보낸 교유문(敎諭文)에 '권토래항 권토솔중 귀우본국(捲土來降 捲土率衆 歸于本國)'이라하여 명실공히 항복을 하거나 아니면 무리를 이끌고 일본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교유문은 대마도 땅이 조선의 영토임을 확신케 하고 있다.
이 교유문에 따라 대마도주는 이듬해 윤 1월 조선 의 반병(潘屛)파 속주(屬州)가 될 것을 간청해 왔다. 이에 조선정부는 대마도를 경상도에 예속시키고 도주(島主)에게 인신(印信:圖書)를 내렸다.이에 대마도는 경상도의 속주가 되고 도주(島主)는 수도서인(受圖書人)이 되었다.
조선조의 대표적인 문신(文臣)인 이황은 조선과 대마도의 관계를 부자관계(父子關係)에 비유하는가 하면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에 통신사로 다녀온 바 있는 김성일(金誠一)은 <해차록(海差錄)〉에서 말하기를‘대대로 조정의 은혜를 입어 동쪽의 울타리(東樓)을 이루고 있으니 의리로 말하면 군신지간(君臣之間)이요 땅으로 말하면 부용(附庸)이다’ 라고 함으로써 대마도를 속국시(屬國視) 내지 변방국시(邊防國視)하였다.

 

 

 

 

 

 

 

 

 

독도가 일본 영토에서 배제된 연합국 지도(왼쪽)와 이승만의 대마도 등 실지회복 의지 기사.

 

 

 

1952년 1월 18일 독도를 포함한 '이승만 라인' (평화선) 설치

 

일본에 대마도 반환 요구를 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소식에 격분했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은 발효일이 1952년 4월 28일로 되어 있었는데 이 발효일이 지나고 나서 우물쭈물하면 국제적으로 일본영토로 인식될 수도 있었다. 당시 한국은 미국의 전폭적인 원조로 전쟁을 하고 있었고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약소국 중의 하나여서 국제적으로 협상력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통 큰 배짱이며 미국의 속내를 잘 읽고 국제 상황 분석에 천재인 이승만 대통령은 샌프란시스코 조약 발효 직전인 1952년 1월 18일 전격적으로 독도를 경계선 안에 넣는 해양주권 선을 아래 좌측과 같이 긋고 평화선이라 선언했다. 그리고 이 평화선 안에서 어업을 하려면 한국 정부에 허가를 받아야 하고 어기면 처벌을 한다고 강력하게 선언했다.

 

일본은 당황한 것은 물론이고 팔팔 뛰며 항의했다. 한국 전쟁을 함께 수행하던 미국도 이승만 대통령에게 취소를 요구했다. 일본은 이승만 대통령이 인접국들과 협의 없이 단독 일방적으로 만든 선이라 하여 이승만 라인이라 했다. 그러나 미국은 한국 전쟁 휴전에 강력 반대하는 이승만 대통령을 자극하면 휴전 협상이 어려워 질 것으로 판단하고 모른 채하여 결국 한국 편을 들어 준 것이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이승만 라인'을 설정하지 않았으면 지금 독도는 어떻게 되었을까?

 

한국전쟁 중인 1952년 1월에는 평화선을 설정 선언했고 독도를 이 평화선 안에 넣어 한국 영토라고 세계에 선언하였다. 그 때 이승만 대통령이 평화선을 설정하지 않았으면 지금 독도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승만 대통령이 독도를 포함한 영해를 '이승만 라인' 을 선포(1952년 1월18일)하지 않았다면 일본은 대마도를 도둑질했던 수법으로 진작 독도를 먹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독도가 한국 영토라는 사실은 김부식의 삼국사기 등 역사적으로 확실한 증거가 많으나 일본이 1905년 1월 근거도 없이 내각회의 결정으로 시네마 현에 편입시켜 다케시마라 명명하고 일본 영토라고 억지 주장해 왔다. 미국 국립문서기록 관리국에 있는 2차 세계대전 후의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준비과정 중 작성된 아래 좌측 지도에는 독도가 일본 영토에서 배제되어 있다.

 

또한 1946년 연합군 최고사령부도 연합군 최고사령부지령(SCAPIN) 제677호를 통해 독도를 일본 영토에서 제외한다고 명시했다. 그런데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서 일본이 포기해야 할 한국 영토에 제주도 등 4개 섬이 포함되어 있다고 했는데 독도가 빠졌다. 그러나 이것은 한국에 3,000 개 이상의 섬이 있어 다 기록할 수 없어 대표적인 섬들의 이름만 명기한데서 발생한 것이었다.

 

이승만 평화선이 설정되지 않았다면 일본이 지배하였을 수도 있었다.

 

평화선 설정 이후 이승만 정부는 이 평화선 안에서 조업하는 일본어선은 물론 중국 어선들도 모두 나포하여 처벌했다. 이 평화선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인 1965년 한일조약 체결로 철폐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평화선 설정과 선언이 없었다면 일본이 경비대를 독도에 보내 지배하였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현재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독도와 관련된 이승만 대통령의 공적을 잘 모르고 있다.

 

김대중 정부는 일본의 '중간수역'(한-일공동관리수역, 그 안에 독도 위치) 설정안을 수용하여 1999년 1월 23일 제2차 한-일어업협정을 체결 발효시켰다. 1999년 신한-일어업협정은 울릉도를 한국의 EEZ 기점으로 삼아, 독도를 이질적인 '중간수역'에 넣었다. 결과적으로 수역상 독도를 울릉도에서 분리시켜 '부속도서론'을 훼손시킨 결과를 가져왔다. EEZ는 자기영토를 기점(base point)으로 취하기 때문에 영토와 직접 관련되어 있다. 그 영토가 바로 "독도"인 것이다. 

이 합의로 독도는 한일공동관리수역 안에 들어갔다.

 

 

이승만 대통령의 독도 포함한 '이승만 라인' 선언은 물론 대마도 영토권 주장과 반환 요구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노무현 #독도   

타협할 수 없다!

https://www.youtube.com/shorts/_J5il7ClJxw

[노무현 명연설] 독도는 역사의 땅입니다!

존경하는 국민여러분

독도는 우리 땅입니다.

그냥 우리 땅이 아니라 40년 통한의 역사가 뚜렷하게 새겨져 있는 역사의 땅입니다.

독도는 일본의 한반도 침탈과정에서 가장 먼저 병탄되었던 우리 땅입니다.

일본이 러일전쟁 중에 전쟁수행을 목적으로 편입하고 점령했던 땅입니다.

러일전쟁은 제국주의 일본이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게 위해 일으킨 한반도 침략전쟁입니다.

일본은 러일전쟁을 빌미로 우리 땅에 군대를 상륙시켜 한반도를 점령했습니다.

 

군대를 동원하여 왕궁을 포위하고 황실과 정부를 협박하여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고

토지와 한국민을 마음대로 징발하고 군사시설을 마음대로 설치했습니다,

우리 국토 일부에서 일방적으로 군정을 실시하고 나중에는 재정권과 외교권마저 박탈하여

우리의 주권을 유린했습니다.

일본은 이런 와중에 독도를 자국영토로 편입하고 망루와 전선을 가설하여 전쟁에 이용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한반도에 대한 군사적 점령상태를 계속하면서 국권을 박탈하고 식민지 지배권을 확보했습니다.

 

지금 일본이 독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의한 점령지의 권리, 나아가서는

과거식민지 영토권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국의 완전한 해방과 독립을 부정하는 행위입니다.

또한 과거 일본이 저지른 침략전쟁과 학살 사십년간에 걸친 수탈과 고문 투옥 강제징용 심지어

위안부까지 동원했던 그 범죄의 역사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하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결코 이것을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국민에게 독도는 완전한 주권회복의 상징입니다.

야스쿠니 신사참배 역사교과서 문제와 더불어 과거역사에 대한 일본의 인식 그리고 미래의 한일관계와

동아시아의 평화에 대한 일본의 의지를 가늠 하는 시금석입니다. 

일본이 잘못된 역사를 미화하고 그에 근거한 권리를 주장하는 한 한일간의 우호관계는 결코

바로설 수가 없습니다.

일본이 이들 문제에 집착하는 한 우리는 한일간의 미래와 동아시아의 평화에 대한 일본의 어떤

수사도 믿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어떤 경제적 이해관계도 그리고 문화적인 교류도 이 벽을 녹이지는 못할 것입니다.

 

한일간에는 아직 배타적 경제수역의 경계가 획정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일본이 독도를 자기 영토라 주장하고 그 위에서 독도 기점까지 고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해 해저지명 문제는 배타적 경제 수역문제와 연관돼 있습니다.

배타적 수역의 경계가 합의되지 않고 있는 가운데 일본의 우리 해역의 해저 지명을 부당하게

선점하고 있으니 이를 바로잡으려고 하는 것은 우리의 당연한 권리입니다,

 

따라서 일본이 동해 해저 지명문제에 대한 부당한 주장을 포기하지 않는 한 그리고 배타적 경제

수역에 관한 문제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문제가 되었고 결국 독도 문제도 더 이상 조용한

대응으로 관리할 수 없는 문제가 되었습니다.  

독도를 분쟁지역화 하려는 일본의 의도를 우려하는 견해가 없지는 않으나 우리에게 독도는 단순히

조그만 섬에 대한 영유권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과의 관계에서 잘못된 역사의 청산과 완전한 주권확립을
상징하는 문제입니다.

공개적으로 당당하게 대처해나가야 할 일입니다.

 

존경하는 국민여러분

이제 정부는 독도문제에 대한 대응방침을 전면 재검토하겠습니다.

독도문제를 일본의 교과서 왜곡 야스쿠니 신사참배문제와 더불어 한일 양국의 과거사 청산과 역사인식
자주독립의 역사와 주권수호의 차원에서 정면으로 다루어 나가겠습니다.

물리적인 도발에 대해서는 강력하고 단호하게 대응해나갈 것입니다

세계여론과 일본국민에게 일본 정부의 부당한 처사를 끊임없이 고발해 나갈 것입니다.

일본정부가 잘못을 바로잡을 때까지 전국가적 역량과 외교적 자원을 모두 동원하여 지속적으로

노력해나갈 것입니다.

그밖에도 필요한 모든 일을 다 할 것입니다.

어떤 비용과 희생이 따르더라도 결코 포기하거나 타협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독도 한국령 표지석 건립

 

1954년 1월18일, 이승만은 독도 한국령 표지석을 건립 하었다.

 

 

 

 

 

준비는 끝났는가. 등대에 불을 켜라.

 

1954년 8월10일, 무인도 독도에 등대불이 켜졌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4년 8월10일 '깜짝 이벤트‘를 벌였다. 미리 독도에 등대를 세워놓고 미국 방문 일정에 맞춰 전세계를 향해 등대 점등식을 열었던 것이다. 일본과 미국이 깜짝 놀란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대한민국 국토의 동쪽 끝 땅임을 알리는 독도 등대불! 일본에 남의 땅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 등불이었다. 현재는 이승만 대통령 시절 지어진 등대를 증축한 것이다.

 

1948년 건국과 동시에 "대마도를 반환하라"고 수십차례 요구했던 이승만. 김일성의 6.25남침으로 물거품 되자 일본이 탐내는 독도에 등대를 건설하고 점등식을 준비해 왔던 이승만의 빅카드 였다. 한일관계 회복을 밀어붙이는 미국에게 보란듯이 미국 방문 중에 '독도는 한국땅' 임을 선포하는 '깜짝 외교 쇼' 를 벌였던 것이다. 국토방위는 전쟁만으로 지켜지는 것은 아니다. 통치자의 의지와 국민의 애국심이 등대불로 불타 오르고 있었다.

 

이승만은 독도의 등대점등식을 왜 하필 방미 기간에 하라고 지시했던가.

 

미국은 냉전시대가 본격화되자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인 한국과 일본을 화해시켜야만 했다. 이승만은 그러나 독립운동과 건국준비 때부터 줄곧 미국의 '좌우합작' 압력 등을 거부해온 불굴의 지도자가 아닌가. 게다가 전쟁중에도 일본을 집중 지원하는 미국이 싫었다. 전쟁물자 공급을 도맡은 일본은 패전 10년도 안되어 일약 떼부자가 되다니. 그것도 한국을 강점했던 범죄자가 한국전쟁을 이용해 경제부흥을 이루었다.

 

“겁쟁이들이 하나님이 다 차려준 밥상을 걷어찼다. 한반도 통일전쟁은 이제부터다.”

 

“수많은 미국인들이 한반도에서 대의를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피는 현명치 못한 사람들의 휴전으로 헛되고 말았습니다. 세계의 자유인들이 살 길은 오지 하나, 그것은 ‘악의 힘’에 유화적이거나 굽히지 않는 것입니다. 중국을 다시 찾지 못하면, 자유세계는 승리할 수 없습니다.

한국의 바보같은 휴전은 이제 끝내야 합니다. 친구들이어, 공산주의를 감기처럼 대수롭지 않게 말하지 마시오. 치명적인 바이러스입니다. 퇴치 투쟁에 나서야만 합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내 주장이 강경합니까?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은 누구든지 유화적이면 노예로 만들어 버리는 끔직한 세력입니다. 자, 용기를 가지고 우리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궐기합시다!”

 

- 한국대통령 최초로 미국을 공식방문한 이승만 공항도착 인삿말과 미국 양원합동 의회 연설문

 

 

 

 

노무현 독도 연설

 

"독도는 우리 땅입니다." 

일본이 독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한국의 완전한 해방과 독립을 부정하는 행위이며, 과거 일본이 저지른 침랙전쟁과 학살, 40년간에 걸친 수탈과 고문, 투옥, 강제징용, 심지어 위안부까지 동원했던 그 범죄의 역사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하는 행위입니다. 독도를 분쟁지역화 하려는 일본의 의도를 우려하는 견해가 없지는 않으나, 우리에게 독도는 단순히 조그만 섬에 대한 영유권 문제가 아니라 일본과의 관계에서 잘못된 역사의 청산과 완전한 주권확립을 상징하는 문제 입니다. 공개적으로당당하게 대처해 나가야 할 일입니다.

 

 

 

독도 가려진 한반도기..IOC와 OCA의 독도 표기 반대

 

2월 평창 동계 올림픽에서 독도가 없는 한반도기가 사용됐다. 당시 평창올림픽 조직위원회는 "IOC가 독도가 표시된 한반도기를 '정치적 행위'로 보고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설명한 바 있다. 당시 평창올림픽을 앞두고 열린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단일팀 평가전에서 독도가 들어간 한반도기가 사용되자 일본이 이에 강력하게 항의하는 일이 있었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에서도 한반도기에 독도가 가리워 졌다. 

아시안게임을 주관하는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의 결정에 따른 것으로, 남북한은 OCA에 독도를 넣은 한반도기 사용을 요구했으나 OCA는 이를 거부했다. OCA는 남북한에 국제올림픽위원회(IOC) 기준을 준용해야 한다고 강조해 독도 표기 한반도기의 사용을 허용하지 않은 것이다.

 

정부는 일본의 독도 국제 문제 공론화에 힘을 실어주는건가. 왜 당연한 우리것에 대해 목소리 내지도 못하고 우리였던 것에 대해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걸까 궁금할뿐이다. 



IOC와 OCA가 독도 표기를 정치적 행위가 아닌 것으로 판단해 독도가 들어간 한반도기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날이 언제가 될지 지켜볼 일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한반도기 독도 사용에 대해 단 한마디도 사용하지 못하는 것일까. 

독도에 한국령 표지석 건립하고 미국 방문 일정에 맞춰 전세계를 향해 등대 점등식을 열었던 이승만과 정말 비교되는 문재인의 독도 관련 행보.

 

 

다른 대통령과 국민들은 독도 움켜붙잡고 내꺼야~~ 내꺼라고.. 바둥바둥 거리고 하다못해 어떤 대통령은 한일 공동수역에, 한반도기에 독도 빼버리고 다니는데.. 이승만은 이승만 라인 설치, 표지석, 등대 점화등으로 독도를 확실히 우리것으로 만들었다. 더 나가 과거 엄연한 우리땅이었다가 빼앗긴 대마도를 찾아오기 위해 노력했는데.. 왜 이승만이 디스저격 당해야 하는건가.

 
 
 

 

 

 

 

 

 

대한제국 시절 이승만 

 

대한제국 시절 협성회 회보와 독립신문 주필, 교육계몽운동으로는 독립협회 활동 등을 하면서, 왕정 폐지와 공화국 수립을 도모하였다는 반역의 죄목으로 옥살이를 하였으며, 독립정신을 저술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한성 임시정부와 각지에서 수립된 임시정부의 수반을 거쳐 1919년 9월 11일부터 1925년 3월 23일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역임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 국무위원회 외교위원 등을 역임했다. 주로 미국에서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을 벌였다.

 

일제 강점기 중반에는 미국 및 스위스 등을 무대로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한편 일본내막기를 저술하는 등 일본의 미국 침략을 경고하였으며 태평양 전쟁 이후 미군 OSS와 임시정부 간의 연결을 주선하였다. 대한민국의 독립을 공약한 1943. 11. 27. 카이로 선언의 배경에는 이승만의 집요한 외교노력이 있었고 그 결실이었다.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미국 체신청에서 발행한 태극기 모양 우표 발행에 크게 기여했으며, 항일 단파 라디오 방송 연설 등에도 참여하였다. 1945년 해방 후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에 추대되었으나, 귀국 후 거절하였다.

 

초등학교 의무교육 도입으로 문맹률을 획기적으로 낮춘 점. 국민 학교 의무 교육제도 실시. 전국 만 7세 아동의 95.3%가 초등학교에 입학. 전문적 인재 육성을 위해 한국외국어대학교, 인하대학교, 배재대학교 등 많은 대학교를 세움. 그 결과 문맹률은 22%로 떨어짐.

 

지주가 독식하고 있었던 서민은 소작농에 불과했던 한국의 토지개혁. 1950년 3월에 농지개혁법을 단행하여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있던 지주제를 혁파하고 농민들의 불만을 해소하는데 성공한다. 이 농민 불만 해소야말로 6.25전쟁 초반의 패전을 극복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원인

 

이승만은 재임기간 12년동안 미국으로부터 일본과 수교를 맺으라는 수 많은 협박과 회유가 있었지만, 일본과의 수교조건으로 대마도 반환,  식민지보상 36억불 청구 등 사실상 일본이 받아 들일 수 없는 요구를 함으로써 그는 끝끝내 일본과의 수교를 거부했다.

 

'UTC+9'를 표준시로 삼은 건 1912년 1월부터인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나라는 해방 뒤인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이 일제 잔재 청산을 명분으로 동경 127도30분으로 바꿨다. 그러나 1961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 쿠데타 뒤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국제관례를 이유로 시간대를 돌이켰다. 실제 6·25 전쟁 직후 이승만 정부에선 30분 차이가 나는 표준시를 썼다. 동경 127도 30분 표준자오선에 따른 결정으로, 현재 북한의 것과 같다. 하지만 문재인은 북한 시계까지 일본 동경기준 시계로 돌려 놓았다. 

 

한국의 서울 및 수도권을 기준으로 볼 때 경도는 동경 `126도 5분~127도 5분` 사이에 위치하는데 중간값 127도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경도 1도당 4분 정도의 시차가 있으므로 토쿄 시간과는 약 32분의 차이가 있다. 그러다 1961년 박정희가 다시 동경 135도를 기준으로 삼는 법안을 만들어 오늘에까지 이르렀다. 왜 일본 식민 사상에 젖어 살아가고 있는건가? 말로는 친일청산 이라고 할뿐. 생활과 표준은 일본 기준에 맞춰 살고 있는것인가.

 

1952년 1월 18일 독도를 포함한 '이승만 라인' 설치하였다. 1954년 1월18일 이승만은 독도 한국령 표지석을 건립 하었다. 1954년 8월10일 무인도 독도에 등대불이 켜졌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4년 8월10일 '깜짝 이벤트‘를 벌였다. 미리 독도에 등대를 세워놓고 미국 방문 일정에 맞춰 전세계를 향해 등대 점등식을 열었던 것이다. 일본과 미국이 깜짝 놀란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대한민국 국토의 동쪽 끝 땅임을 알리는 독도 등대불! 일본에 남의 땅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 등불이었다. 

 

...초등학교 의무교육 도입. 문맹률 획기적 개혁
...지주가 독식하고 있었던 서민은 소작농에 불과했던 한국의 토지개혁.
...‘한국의 MIT’를 목표로 '인하공과대학' 설립. 국제관계 전문가를 양성하기 위해 '한국외국어대학' 설립
...한국 표준시는 이승만 대통령이 일제 잔재 청산을 명분으로 동경 127도30분으로 바꿨다.
...1952년 1월 18일 독도를 포함한 '이승만 라인' 설치, 독도 표지석, 독도 등대

...이승만은 일본과의 수교를 거부했다.

...국익을 위한 복수환율제를 운용. 외화를 최대한 끌어오는데 중요한 기여.

...한국 지방자치 시작 이승만

이승만은 지주 철폐, 교육 진흥, 제도 신설 등 지금 우리가 디디고 서 있는 바탕이 이승만의 손에서 나왔다. 원자력발전조차 그에 의해 첫발을 내디뎠다. 또한 1948년, 노동자의 권리 등에 대한 별다른 법령이 없던 우리나라에 노동관계 법률이 제정되었다. 헌법 제17조는 “모든 국민은 근로의 권리와 의무를 가진다.”, “여자와 소년의 근로는 특별한 보호를 받는다.”는 조항이 규정되었고 제18조에는 “근로자의 단결, 단체교섭과 단체행동의 자유는 법률의 범위 내에서 보장된다.”고 규정되어 노동자의 사측에 대한 단체 행동이 법률 내에서 허가되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이 노동관계법은 곧 발발하는 한국전쟁 때문에 시행되지는 못하였다. 현재 노동법의 근본이 이승만의 손에서 나왔다.

 

1952년 1월 18일 독도를 포함한 '이승만 라인' 설치, 독도 표지석, 독도 등대
1952년 1월 18일 독도를 포함한 '이승만 라인' 설치하였다. 1954년 1월18일 이승만은 독도 한국령 표지석을 건립 하었다. 1954년 8월10일 무인도 독도에 등대불이 켜졌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4년 8월10일 '깜짝 이벤트‘를 벌였다. 미리 독도에 등대를 세워놓고 미국 방문 일정에 맞춰 전세계를 향해 등대 점등식을 열었던 것이다. 일본과 미국이 깜짝 놀란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대한민국 국토의 동쪽 끝 땅임을 알리는 독도 등대불! 일본에 남의 땅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 등불이었다.

 

한국 지방자치 시작 이승만
우리나라 대부분의 일반인들은 1950년 대 그것도 전쟁 중인 1952년에 지방자치가 처음으로 실시 된지 잘 모른다. 1948년 첫 헌법을 제정할 때부터 지방자치를 규정 하였고, 이를 구체화한 『지방자치법』을 1949년 7월 4일 제정하였다. 해방 후 미군정에서도 명목상 지방자치와 비슷핫 제도를 시행하려 했지만 미군정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부를 원했기에 제대로 실시하지 않았다. 이승만 정권 시대에 와서야 지방자치가 실시된다. 이승만은 1949년 12월 한 번도 시행되지 않은 지방자치법을 개정, 국내적 불안정을 이유로 지방자치의 실시보류로 인한 지방행정의 공백에 대응하였다.

이승만은 지방자치제를 도입하여 한국의 풀뿌리 민주주의를 성장시켰다. 이승만이 도입한 지방자치제는 박정희의 쿠데타 이후 폐지되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당시 단식투쟁을 불사하며 "지방자치제는 민주주의를 위해 꼭 필요했다"고 호소했다. 거의 30년이나 지나서야 노태우 정권에서 다시 부활했다. 

 

[팩트체크] 한국 급속한 경제발전의 토대를 마련한 이승만

1. 농민 토지 소유.

양반들이 소유한 토지를 농민들에게 배분. 추후 토지 비용을 지불하겠다고 했으나 6.25 전쟁으로 유명무실해짐. 

2. 초등학교 의무교육 도입.

대한민국이 6.25 전쟁이후 엄청난 경제발전 원인은 이승만의 경제적 자립(토지), 교육(초등학교 의무교육) 때문. 이승만의 초등학교 의무교육과 국민들이 토지를 갖게 해준게 한국의 급격한 경제 발전의 토대이다. 이는 아프리카, 남미, 동남아시아등 과거 식민 지배를 당했던 나라들이 경제발전을 못하는 근본적 이유이기도 하다.

 

초등학교 의무교육 도입으로 문맹률을 획기적으로 낮춘 점. 국민 학교 의무 교육제도 실시. 전국 만 7세 아동의 95.3%가 초등학교에 입학. 전문적 인재 육성을 위해 한국외국어대학교, 인하대학교, 배재대학교 등 많은 대학교를 세움. 그 결과 문맹률은 22%로 떨어짐.

지주가 독식하고 있었던 서민은 소작농에 불과했던 한국의 토지개혁. 1950년 3월에 농지개혁법을 단행하여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있던 지주제를 혁파하고 농민들의 불만을 해소하는데 성공한다. 이 농민 불만 해소야말로 6.25전쟁 초반의 패전을 극복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원인

 

#1. 미국은 이승만에게 친일파를 관리로 등용할 것은 꾸준히 요구 
#2. 미군정은 친일파 관료들과 인사들을 대거 재기용  
#3. 친일파 재기용에 대한 미국 경찰 책임자와 맥아더 장군 인식 수준 
#4. 일본은 한국, 미국은 필리핀 차지하기로 합의한 '가쓰라-테프트 밀약
#5. 이승만은 일본과의 수교조건으로 대마도 반환, 식민지보상 36억불 요구 
해방 후 미군정은 자국의 이익과 행정편의를 위해 친일 경찰과 공무원들을 등용했다.
... [팩트체크] 미국등 서양인들에게 동양은 단지 그들의 이용도구로 인식될뿐이다. 친일청산 못한 이유

 

###3. 친일파 재기용에 대한 미국 경찰 책임자와 맥아더 장군 인식 수준

"그들이 일본인을 위해서 훌륭한 업무를 수행했다면 우리를 위해서도 그럴 수 있으리라고 생각 합니다." 라고 말한 미국 경찰 책임자 마글린 대령 말을 기억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일본인이 훈련시킨 사람들을 계속 쓰는 일이 현명한 처사인지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경찰로서의 자질을 갖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일본인을 위해서 훌륭한 업무를 수행했다면 우리를 위해서도 그럴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일본인이 훈련시킨 사람들을 경찰에서 몰아내는 일은 공정하지 못한 것입니다."이 이유에는 맥아더 사령부의 규정에도 나와 있듯이 "...공산주의에 대한 방벽을 구축하는 것"이라는 목적이 제일 컸다.

 

7:20 맥아더 연합군 최고 사령관.. 대마도 반환은 미국 주도의 리더십에 방해요소가 된다며 제동을 걸었죠. 
맥아더 저 녀석은 해방되고 나서 이승만에게 친일매국노를 관리경험이 있으니 계속 채용하라고 했던 미국놈. 미국은 공산주의 팽창 방어만 생각할뿐. 나라의 아픔이나 고충 같은건 생각하지 않는 미국.
#대마도 #맥아더
'일본은 한국 땅'이라는 한국정부의 팩트폭격. 일본총리까지 나서서 강력하게 반발하고 중국이 지지의사를 표한 이유

http://https://www.youtube.com/watch?v=cAd41a9kGkk

 

 

 

 

이승만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후 행적은 논란이 될만한 건 부정할수 없지만, 대한제국 시절의 행위는 이게 팩트이다. 이승만은 두개의 얼굴을 가진 야누스를 닮은 거인으로 비쳐지고 있다. 한민족의 독립과 번영의 기초를 다진 국부로 추앙 받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 지나친 친미, 종미주의 경향과 한번도의 통일을 저해하고 민주주의를 압살시킨 시대착오적 독재자로 매도당하고 있다.

 

보다시피 강리도(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김사형,이무,이회, 1402년)에서 대마도는 조선반도에 바짝 붙어 있고 이키도는 일본 쪽에 근접해 있습니다. 대마도는 우리 땅이고 이키도는 일본 땅이라는 뜻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0MnvPDtt5c&t=155s외국인들은 욱일기를 알까?/ Do foreigners know the Rising Sun flag? [Loving korea]


https://www.youtube.com/watch?v=zZOSRyKcbg8&t=309s미국인들은 왜 '욱일기'를 좋아할까?

 

 

https://www.youtube.com/watch?v=j3v3EplO-LM

서양애들이 욱일기 문제에 무심한 이유 #욱일기 #역사

 

미국등 서양인들에게 동양은 단지 그들의 이용 도구로 인식될뿐이다.

 

일본에서 독립한 한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에게 재임기간 12년동안 미국으로부터 일본과 수교를 맺으라는 수 많은 협박과 회유가 있었다. 

 

미국은 한국을 해방시키는데 중요한 역활을 했지만 친일파란 '악의 씨'를 보호하고 육섬함으로써 대한민국 근대사에 뼈아픈 역사를 남겼다. 1945년 9월 상륙한 미 점령군은 한국인들은 적으로, 재한 일본인들은 친구로 비쳐졌다. 

조선 총독부 기구는 미군정 기구가 되었다. 일제에 부역한 친일 민족반역자들은 유임되었고 곧 승진했다. 특히 해방지 되자 두려워 피신했었던 경찰을 다시 불러 불러들인 것은 한국인을 분노케 했다. 해방은 해방이 아니었다. 


미국이 한국인 의사와는 반대로 친일파를 관리자로 유임시킨 것은 친일파에 대한 한국인의 감정과 한국의 현실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미 군정이 조직적으 잘 훈련된 친일 경찰을 중시한 이유는 경찰 책임자 마글린 대려의 다음과 같은 발언에 드러나 있다. "그들이 일본인을 위해서 훌륭한 업무를 수행했다면 우리를 위해서도 그럴 수 있으리라고 생각 합니다."


남조선 과도 입법의원에서 미군정과 극우 세력의 반대를 무릅쓰고 1947년 7월 '민족반역자 부일 협력자 간상배에 대한 특별법'이 통과 되자 미군정은 이것을 공포할 것을 거부했다. 미국은 제헌 국회에서 친일파를 처단하려는 것에 대해서도 곱지 않은 시선으로 지켜봤다. 미국은 이승만에게 친일파를 관리로 등용할 것은 꾸준히 요구하였다. 

 

또한 이승만은 일본과의 수교조건으로 대마도 반환,  식민지보상 36억불 청구 등 사실상 일본이 받아 들일 수 없는 요구를 함으로써그는 끝끝내 일본과의 수교를 거부했다

 

2. 일본 전통 - 오하구로, 히키마유, 사카야키
- '오하구로' - 검은 이빨. 치아를 검게 물들이는 과거 일본 화장법. 일본 헤이안 시대부터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약 1000년간 유행한 일본 전통
- '히키마유'  - 눈썹 밀기. 눈썹을 다 밀어 버리고 그 자리나 더 위쪽인 이마에 작은 반점을 그려 넣음.  일본 헤이안 시대부터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약 1000년간 유행한 일본 전통.\
- '사카야키' - 머리 변발. 일본 남성의 전통 머리 모양. 이마에서부터 정수리까지 반달 모양으로 삭발후 남은 머리를 위로 묶는 일본 전통.
#일본 #요바이 #코쇼 #슈도 #전통문화 #일본 성문화
일본의 엽기적인 성(性)문화 '요바이(よばい)'
일본의 옛 풍습으로 밤중에 성교 또는 구혼을 목적으로 모르는 사람의 침실에 침입하는 행위. 임신한 여성이 지목하는 사람이 아이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습니다. 1200년 왕조시대부터 1950년대까지 행해짐. 에도 중기에는 전국 축제로 발전. 미성년자 남자를 성교를 위해 사무라이, 스님의 '코쇼' '슈도'
“왜놈들은 희한한 풍습이 있어 왕공 귀족이 다투어 어여쁜 사내아이를 치장하여 아끼며 기른다. 처첩이 바람이 나는 건 용서해도 남창 때문에 질투하여 사람을 죽인다.” - 조선통신사가 본 일본의 남성 동성애 남창

 

 

 

 

 

 

https://www.youtube.com/watch?v=h0MnvPDtt5c&t=155s

외국인들은 욱일기를 알까?/ Do foreigners know the Rising Sun flag? [Loving korea]

 

https://www.youtube.com/watch?v=zZOSRyKcbg8&t=309s

미국인들은 왜 '욱일기'를 좋아할까?

 

https://www.youtube.com/watch?v=j3v3EplO-LM

서양애들이 욱일기 문제에 무심한 이유 #욱일기 #역사

 

 

미국등 서양인들에게 동양은 단지 그들의 이용 도구로 인식될뿐이다.

이승만은 1차-북한, 2차-일본을 이용해 미국을 효율적 도구로 삼을줄 알았다. 

 

일본에서 독립한 한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에게 재임기간 12년동안 미국으로부터 일본과 수교를 맺으라는 수 많은 협박과 회유가 있었다. 

 

미국은 한국을 해방시키는데 중요한 역활을 했지만 친일파란 '악의 씨'를 보호하고 육섬함으로써 대한민국 근대사에 뼈아픈 역사를 남겼다. 1945년 9월 상륙한 미 점령군은 한국인들은 적으로, 재한 일본인들은 친구로 비쳐졌다. 

조선 총독부 기구는 미군정 기구가 되었다. 일제에 부역한 친일 민족반역자들은 유임되었고 곧 승진했다. 특히 해방지 되자 두려워 피신했었던 경찰을 다시 불러 불러들인 것은 한국인을 분노케 했다. 해방은 해방이 아니었다. 


미국이 한국인 의사와는 반대로 친일파를 관리자로 유임시킨 것은 친일파에 대한 한국인의 감정과 한국의 현실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미 군정이 조직적으로 잘 훈련된 친일 경찰을 중시한 이유는 경찰 책임자 마글린 대령의 다음과 같은 발언에 드러나 있다. "그들이 일본인을 위해서 훌륭한 업무를 수행했다면 우리를 위해서도 그럴 수 있으리라고 생각 합니다."


남조선 과도 입법의원에서 미군정과 극우 세력의 반대를 무릅쓰고 1947년 7월 '민족반역자 부일 협력자 간상배에 대한 특별법'이 통과 되자 미군정은 이것을 공포할 것을 거부했다. 미국은 제헌 국회에서 친일파를 처단하려는 것에 대해서도 곱지 않은 시선으로 지켜봤다. 미국은 이승만에게 친일파를 관리로 등용할 것은 꾸준히 요구하였다. 

 

또한 이승만은 일본과의 수교조건으로 대마도 반환,  식민지보상 36억불 청구 등 사실상 일본이 받아 들일 수 없는 요구를 함으로써그는 끝끝내 일본과의 수교를 거부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집권기는 워싱턴과의 갈등으로 채워졌으며 심지어 6ㆍ25 전쟁 중엔 미국이 이승만 제거계획-‘플랜 에버레디(Plan Everready)’를 검토했다는 것을 지난 기사(‘‘이승만 제거작전’까지 세웠던 美…주한미군 탄생 비화’ 참조)에서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수십 년 전 우리는 미국에게 일본에 대해 경고했지만, 그 경고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미국은 진주만을 공격당했다. 오늘날 우리는 동일한 경고를 반복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은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일본을 이전보다 더 강력한 국가로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

 

... 격앙된 대통령은 일본에 대한 비판과 경고와 동시에 미국에 대한 실망을 쏟아냈습니다. 1957년 6월 26일 한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발언 내용입니다.


갈등을 협상의 지렛대로 삼았던 이승만 대통령은 ‘남한 단독 북진’이라는 카드를 적절히 활용해 1954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얻어내는 데 성공합니다. 6ㆍ25 전쟁을 끝내고 싶었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남한의 북진을 막기 위해 이승만 대통령의 요구를 대부분 들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승만식 ’벼랑 끝 외교‘의 승리로 평가하는 이유입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면서 이승만-아이젠하워의 갈등은 종식될 줄 알았지만, 역사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1954년까지가 미국과의 갈등 국면의 1차전이라면 1955년부터는 2차전이 벌어집니다. 1차전에서 갈등의 매개체가 북한이었다면 2차전은 일본이었습니다.
미국의 ‘뉴룩(New Look)’ 전략이 나왔다. 일본=경제개발, 한국=군사 강화’라는 등식으로 일본과 한국의 수교를 요구했습니다. 뉴룩정책은 한국보다 일본이 더 수혜를 입는 구조였습니다. 한국이 미국에서 받은 돈으로 일본 제품을 사들이면 일본의 공업화와 경제는 발전하겠지만 한국의 경제부흥은 느려지고, 일본 경제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으니까요. 그래서 일본 물자를 구매하는 것이나 일본과의 국교 개선 등에 대해 격렬하게 저항했습니다. 
“나는 (미국 국무장관) 덜레스씨에게 미국이 일본과의 협조를 강요하여 일본의 주도 아래 놓인다고 믿게 되면 대부분의 아시아인들은 미국에게 등을 돌리고 공산주의자와 협력해 미국과 싸우게 될 수도 있다고 이야기했다.” (1957년 12월 20일 이승만이 정치고문 로버트 올리버 박사에게 보낸 편지)

이승만은 사실 그의 일생 대부분은 일본에 대한 저항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이승만은 1941년 7월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 야욕을 경고한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라는 책을 냈는데, 5개월 뒤 일본의 진주만 습격이 벌어지면서 비로소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런 이승만의 반일 기조는 미국의 동아시아 구상에 짐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미국의 한 관료는 한ㆍ일 관계개선 및 뉴룩 전략은 “이승만이 현장에서 사라진 후에야(only after Rhee's departure from the scene) 해결될 수 있는 주요한 정치적 문제”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6ㆍ25 전쟁 중엔 미국이 이승만 제거계획-‘플랜 에버레디(Plan Everready)’를 검토했다는 것을 지난 기사(‘‘이승만 제거작전’까지 세웠던 美…주한미군 탄생 비화’ 참조)에서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미국은 이를 중국 견제를 염두에 둔 한·미·일 안보협력의 틀을 흔드는 위협으로 받아들였다. 지난 8월22일 정부의 지소미아(GSOMIA) 종료 결정 직후 “문재인 정부의 결정은 동북아에서 우리가 직면한 안보적 도전에 대한 심각한 오해를 나타낸다”는 미 국무부의 논평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들이 일본인을 위해서 훌륭한 업무를 수행했다면 우리를 위해서도 그럴 수 있으리라고 생각 합니다." 라고 말한 미국 경찰 책임자 마글린 대령의 말.

.... 보다시피 미국은 한국은 동아시아 진출을 위한 작은 도구로 인식할뿐이다. 일본 식민지때 당한 아픔과 고통에 대해서는 그 어떤 관심과 아픔이 없다. 언제까지 미국의이용도구로 전락할 것인가. 정확한 사실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말했다. 

"역사는 어느 집단의 힘으로 변화되는 게 아니다. 그 집단을 이끄는 창조적 천재의 능력만이 새로운 역사의 발전을 창조해왔다" 역사는 분노를 자극하고 분풀이를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중요한 갈림길에서 과거에 저지른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는 차가운 이성을 찾을 때 의미가 있습니다.

 

김일영 『이승만 정부에서의 외교정책과 국내정치-북진·반일정책과 국내 정치경제와의 연계성』, 홍석률 『이승만 정권의 북진통일론과 냉전외교정책』, 신욱희 『이승만의 역할 인식과 1950년대 후반의 한미관계』, [유성운의 역사정치] 이승만 제거 4번 검토한 美..'반일 한국'에 원조 깎아버렸다 뉴스를 참고했습니다.

 

나라가 바로 설려면 우선 국민의 뜻이 바로 서야한다.

 

 

 

 

이승만의 최대 업적. 

1. 지주가 독식하고 있었던 서민은 소작농에 불과했던 한국의 토지개혁. 2. 초등학교 의무교육

대한민국이 급격하게 경제성장발전할수 있었던 근본적 이유와 동기를 정확히 알고 있는 토도르. 그런데 그걸 실천한 사람이 누군지는 감을 못 잡는거 같음. 

 

 

 

국회 교육위원회 소속 여야 의원 13명은 하루 일정으로 헬기를 타고 독도를 방문해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을 규탄했다. 독도 현장 시찰에 앞서서는 교육부와 동북아역사재단의 현안 설명을 듣기도 했다. 울릉군청에서 김병수 울릉군수에게 울릉도와 독도 현안을 보고받고, 오후에는 독도로 이동해 독도경비대원과 주민들, 울릉군 독도관리사무소 직원들을 격려했다.
 

 

 

 

 

2018 대한민국독도협회 '독도의 날 기념행사

 

일보의 침탈 행위를 배격하며,

그들의 망언이 종식되는 날까지

불굴의 투지와 사명감으로 대한민국의

땅 독도를 수호할 것을 

세계만방에 선업합니다!

 

독도는 대한민국이다!

 

http://ddsr.or.kr/index.html

(사)대한민국독도협회

독도 교육 및 여행, 독도 후원 및 기부, 독도단체, 독도홍보

ddsr.or.kr

 

[출처] 대한민국독도협회 '독도의 날 기념행사'|작성자 배재대학교

 

 
 

녹둔도
위치 동경 130°41′ 북위 42°20′
면적 약 32km²
녹둔도는 조선 시대에 경흥부 소속 두만강 하구에 존재했던 하중도로, 본래 이름은 사차도였다. 퇴적토로 이루어진 섬이었으나, 두만강의 퇴적작용으로 인해 땅덩어리가 연해주 쪽 방향으로 붙어버렸다. 세종대왕 시절부터 400여 년간 조선 영토였지만 제2차 아편전쟁이후 1860년 청나라와 러시아 제국이 체결한 베이징 조약으로 러시아의 영토로 넘어갔다.

 

#러시아 36개국 분할 #극동공화국 #파 이스트 리퍼블릭 #극동공화국 1920~1922년 연해주 캄차카반도 오호츠크해 (ft 치타공화국)
[속보] 극동연해주 분리독립 본격 논의되자 난리난 상황 “한국으로 집중되는 국운”중국이 한국에 고개숙이는 이유

https://www.youtube.com/watch?v=Mc-ZClYsl6c 

 

 

[단독] 러시아, 녹둔도 한국에 반환키로..북한 즉각 반발 

https://www.youtube.com/watch?v=Xa9Tqdqk9E0 

"이대로는 못살겠다" 한국 되겠다는 오키나와 

https://www.youtube.com/watch?v=DXd9D8Hr3qE 

 

 

#대한제국영토 오키섬 #UN 국제사법재판소 #대마도, 오키섬 한국 영토 인정 #1905년 일본이 강탈해간 섬

[긴급] 독도 옆 오키섬 주민들, 한국편입 요구시위 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VhXJ33HhiVQ 

 

 

8분 요약, (반박 불가) 고구려 요동성의 실제 위치 #동북공정 ㅁ

https://www.youtube.com/watch?v=MOvI5sR0Ifk 

 

 

 

 

 

 

 

 

 

대마도가 우리 땅임을 아시나요? 

.대마도는 옛날에 우리 계림에 예속되었는데 언제부터 왜인이 살게되었는지 모르겠다..(동지여지승람)

.대마도주는 동번으로 청하면서 우리나라에 신하로서 섬겼으며...(조선실록) 

.대마도는 섬으로서 경상도의 계림에 예속 되었던바...(세종실록)

 

고지도를 비교하면 조선 1557년에도 1860년에도 대마도가 경상도에 속한 우리땅임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어리석은 정책이었던 국경선 일대의 섬을 비워둔다는 ‘공도(空島) 정책’으로 일본인들이 들어와 살게 되고 파벌정치에 빠져있던 조선이 알지 못하는 사이 우리영토가 정식적으로 일본의 영토로 일본이 선포한 것은 1868년 메이지 유신 때입니다. 1868년이전 대마도는 조청일 모두 조선의 땅으로 표시했습니다. 하지만 우린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국사 교과서에 대마도란 단어는 단 한마디도 없죠. 없는 사실도 꾸며 만드는 일본의 역사와 비교하면 정당한 사실도 일본눈치를 보며 숨기는 우리 국사는 대조적입니다.

 

.

... 실제로 대마도가 오래 전 우리 땅이었다는 기록은 사료에 많이 등장합니다.

고려말 박위 장군이 노략질을 일삼자 대마도를 토벌했습니다. 조선 초기에도 이종무가 다시 한번 대마도를 정벌했습니다. 

선 1557년에도 1860년에도 대마도가 경상도에 속한 우리땅임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어리석은 정책이었던 국경선 일대의 섬을 비워둔다는 ‘공도(空島) 정책’으로 일본인들이 들어와 살게 되고 파벌정치에 빠져있던 조선이 알지 못하는 사이 우리영토가 정식적으로 일본의 영토로 일본이 선포한 것은 1868년 메이지 유신 때입니다. 대마도는 1868년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거쳐 1872년 나가사키 현에 편입되었다.

 

대마도는 맑은 날이면 부산에서 보일 정도로 가까운 곳에 있다. 부산에서 남쪽으로 고작 5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고 본토인 후쿠오카에서는 그 세 배에 가까운 138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다. 거리로 보면 분명 우리나라의 영토가 되었어야 할 대마도가 일본 영토라니? 관리를 파견하고 백성을 이주하여 확실한 영토로 만들지 못한 선조들과 일제강점기에서 광복을 찾은 후 행한 우리 지도자들의 무능이 원망스럽다.

 

 

대마도, 독도는 우리땅. 우리는 대한민국인 

(feat 배재대)

 

투키디데스의 관찰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2500년 전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역사를 둘러싼 논란을 이렇게 적었다. “서로 다른 목격자들은 같은 사건에 대해 다른 진술을 내놓았다. 이들은 어느 한쪽이나 상대편을 편들기도 했고, 그렇지 않으면 불완전한 기억이 문제가 되기도 했다.” 세계 곳곳에서 역사를 공유한 이웃 나라 간의 갈등과 대립이 여전한 것을 보면 투키디데스의 관찰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의심할 나위도 없이 조선에서 가장 교육적, 도덕적, 지적 영향력을 행사해 왔고 지금도 행사하고 있는 학교는 배재대학이다."

-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388쪽. 이사벨라 비숍(Isabella Bird Bish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