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재학당 배재대학교 학술지원센터 (서울 정동)
배재대학부 vs 이화학당 vs 성균관
1885년 08월 03일 배재학당 (Pai Chai Academy, 培材學堂) 창립
배재학당(培材學堂)은 1885년 8월3일, 미국의 감리교 선교사인 헨리 아펜젤러가 서울에 세운 한국 최초의 근대식 중등교육기관이며, 배재중학교, 배재고등학교, 배재대학교의 전신이다. 1886년 6월 8일 고종 황제는 배양영재의 줄임말인 배재학당이라는 교명과 액(額)을 내리었다. 배재는 배양영재(培養英材)의 줄임말로 ‘유용한 인재를 기르고 배우는 집’이란 뜻을 담고 있으며, 배재대는 설립 당시부터 대학(PAI CHAI COLLEGE)으로 출발했다
1895년 09월 01일 배재대학부 (Pai Chai College) (영문학과, 국한문학과, 신학과)
1886년 11월 이화여전 개교
1887년: 고종 황제가 ‘이화학당’ 이란 교명을 하사
1925년 이화여자전문학교가 출범한다. 첫 교장은 배재학당을 세운 아펜젤러가 한국에서 낳은 딸, 앨리스 아펜젤러(Alice Rebecca. Appenzeller, 1885~1950)다. 그는 이 땅에서 태어난 최초의 백인 아기다.
1895년 7월 2일 고종 칙령 제 136호로 성균관에 3년제 경학과가 설치되었고, 역사학, 지리학, 수학의 강좌가 개설.
국립 성균관대는 일제강점기 때 성균관은 경학원, 명륜전문학교 등으로 격하되었고 1943년에는 폐교당했다. 사립 성균관대는 김창숙이 주도하에 1946년 기존 성균관 바로 옆자리에 성균관 주변 땅을 사서 개교. 1946년 9월 25일 문교부에 의해 성균관대학이 정식으로 인가.
무궁화가 국화(國花)로 된 경위
신라 때 최치원이 당에 보내는 문서에서 우리나라를 '근화향(槿花鄕, 무궁화의 나라)' 이라고 불렀던 점이나 중국의 산해경 에서 '동방에 군자국(君子國)이 있는데 무궁화가 많다' 라는 대목 등 무궁화는 전통적으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꽃으로 여겨졌습니다.
무궁화는 우리나라의 국화이다. 그러나 그것은 국가 기관에서 국화로 결의하였거나 법령 등으로 공포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국가의 권능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수 국민에 의하여 자연발생적으로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무궁화가 사실상 국화로 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이웃 나라에서 우리나라를 무궁화의 나라로 불렀고 우리 스스로 우리나라를 근화향(槿花鄕)·근원(槿原)·근역(槿域)이라 함으로써 국민들의 마음에 무궁화가 나라를 상징하는 꽃이라고 생각했던 시기를 국화로 자리잡은 시기로 본다면 그 시기는 아주 옛날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좀더 본격적으로 무궁화가 국화로 등장하여 거론되기 시작한 시기는 구한말 개화기이다.
윤치호 작사 육필본 애국가(미국 뉴욕시립도서관 소장)
갑오경장 이후 신문화가 이땅에 밀려오면서 선각자들은 민족의 자존을 높이고 열강들과 대등한 위치를 유지하고자 국화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남궁억(南宮檍)과 윤치호(尹致昊) 등은 서로 협의하여 무궁화를 국화로 하자고 결의하였다. 물론 이것은 이들 몇 사람만의 독단적인 의견이 아니라 당시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의견을 집약했던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애국가의 후렴에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라는 구절이 들어가게 되고 이 노래가 불려지면서 무궁화는 명실공히 국화로 자리잡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당시는 각종 애국가가 성창되기 시작하여 1896년 무렵에는 각 지방에서 불린 애국가만도 10여 종류에 이르렀는데 위의 후렴구는 1896년 11월 21일 독립문 정초식 때 배재학당 학도들이 부른 애국가에서부터 등장하였다.
《배재 팔십년사(培材八十年史)》에 따르면 이 애국가의 가사는 윤치호가 작사하였고 곡조는 벙커(D.H. Bunker) 교사가 편곡한 것이라고 하였다. 윤치호 작사로 알려진 현행 애국가의 가사는 1904년 가을에 영국 군함 한 척이 동양 각국을 순방하던 중 제물포(인천)항에 들어와 한국을 방문한 예의로 한국 국가를 연주하겠다고 제의해 와 이에 고종황제가 외무협판으로 있던 윤치호에게 즉시 국가를 제정하라는 분부를 내려 이에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1)
그후 1907년에 《찬미가집》에 실리면서 무궁화는 어느덧 온 국민의 마음 속에 국화로 자리잡게 되었다.
무궁화구한말 교과서 《초등대한지리》
(1910년)에서 아마 위 글이 구한말의 교과서에 무궁화가 실린 것으로는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또 이와 전후하여 안창호(安昌浩)를 비롯한 독립협회 등의 애국단체 회원들이 우리나라의 독립을 지키고자 강연회 때마다 "우리 무궁화동산 ······" "무궁화 삼천리 우리 강산 ······" 등으로 절규함에 여기에 자극을 받은 민중은 귀에 젖고 입에 익어서 무궁화를 인식하고 사랑하게 되었다.
또한 김좌진(金佐鎭) 장군은 "삼천리 무궁화 땅에 왜놈이 웬말이냐(三千槿域倭亦發)"라고 부르짖으며 조국광복을 애타게 기원하였다.
무궁화 수본(繡本)1914년 제작, 배화여고 소장
1945년 국권이 회복되고 1948년에 정부가 수립되면서 정식으로 국가(國歌)가 제정되면서 무궁화는 자연스럽게 국화로 정해지게 되었다.
무궁화 (無窮花, Hibiscus syriacus)
무궁화는 십자군이 시리아에서 유럽으로 옮겼다는 식물입니다.
예전에 도로변이나 마을 어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꽃이 바로 무궁화 꽃이었다. 그러던 무궁화 꽃이 언제부터인가 우리 곁에서 멀어졌다. 벚꽃이나 장미, 유채꽃 등은 축제까지 벌이며 관심을 끌고 있지만 정작 나라꽃 무궁화는 제대로 된 축제는 커녕 관심마저 끓지 못하니 슬프기가 그지없다.
우리 문헌인《조대기》, 《단군세기》, 《단기고사》,《규원사화》등에 무궁화에 대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특히 당·송시대(唐宋時代)나 고려(高麗)때에는 시인(詩人)·묵객(墨客)들이 무궁화를 예찬(禮讚)한 시(詩)가 많이 보인다.
무궁화의 꽃말은 "섬세한 아름다움"과 "일편단심","은근", "끈기"이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라는 전통놀이가 있습니다. 술래가 눈을 감고 열 글자를 외치는 동안 나머지 아이들은 술래에게 들키지 않도록 움직여 술래에게 근접해가는 놀이입니다. 이 놀이의 유래는 남궁 억(1863년~1939년)선생이 만든 놀이라는 유래가 가장 강력하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남궁억 고향인 강원도 홍천군 무궁화 마을이 있습니다.
남궁 억은 우리나라 무궁화 보급에 큰 힘을 쓴 사람으로서 2000년 1월의 문화인물로도 선정된 민족 운동가입니다.
#단군왕검 #카자흐스탄 #유목민
중앙아시아 초원 한복판에서 스스로를 한국인 후손이라 부르는 유목민의 정체
https://www.youtube.com/watch?v=_3ZNjbfaNkM
1885. 08. 03 배재학당 (Pai Chai Academy, 培材學堂) 창립 (설립자 아펜젤러 H. G. Appenzeller)
1886. 04 .01 초대학당장 아펜젤러 취임
1886. 06. 08 고종황제로부터 '배재학당' 현판 하사
1895. 09. 01 배재대학부 (Pai Chai College) (영문학과, 국한문학과, 신학과)
1896. 04. 07 배재학당내에서 「독립신문」발간(서재필)
1896. 11. 30 배재협성회(학생회) 조직(지도 서재필)
1898. 아펜젤러 '서울대학교(Seoul University)' 설립 계획
- 법과 400명, 문리과대학 1180명, 사범대학 1320명, 공과대학 1320명, 의과대학 400명.
1925. 09. 17 조선총독부에 의해 배재학당 교명 폐지
1937. 03. 03 배재중학교(5년)로 개칭
1951. 08. 21 배재중학교(3년) 및 배재고등학교(3년)로 개편
1955. 04. 26 대전보육학원 설립 (설립자 허길래, Clara Howard)
1959. 11. 배재대학교 기공식 (의대 포함. 서울 성북구 하월곡동) - 4.19로 잠정중단
1992. 03. 13 배재대학교 (Pai Chai University)
1. 1895. 09. 01 배재대학부 (Pai Chai College) (영문학과, 국한문학과, 신학과)
2. 1951. 08. 21 배재중학교(3년) 및 배재고등학교(3년)로 개편
배재학당 (Pai Chai Academy) → 배재대학부(Pai Chai College) → 배재고등학당 → 배재중학교 → 배재고등학교 → 배재대학교(Pai Chai University)
엘리스 아펜젤러(Alice R. Appenzeller)의 선교활동과 한국여성교육
미국 여성선교사ㆍ교육자 앨리스 아펜젤러(Alice R. Appenzeller.1885~1950.2.20)
엘리스 아펜젤러는 이화여전 교장으로,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대표적인 제2세대 선교사이다. 그는 한국여성의 고등교육을 위한 종합대학 설립을 목표로 이화학당에 대학과를 설치했던 룰루 프라이 당장의 교육 비전을 계승하여 발전시켰다. 이화학당 대학과를 이화여전으로 개편하여, 문과, 음악과, 가사과를 설치하고 전문교육을 실시했다. 이를 위한 준비로 이화학당 출신으로 모교에서 재직하고 있던 교사들을 미국으로 유학 보내, 전문성과 실력을 갖추도록 했다. 그리고 이화여전으로의 개편과 총독부 승인 취득으로, 졸업생들이 공인된 사립학교 교사자격증을 가지고 교사로 활동할 수 있도록 했다. 신촌에 넓은 부지를 확보하고 건물을 신축하여 오늘날 이화여대의 터전을 마련하고, 한국여성고등교육의 기틀을 확립했다.
이화학당(梨花學堂)의 전문부를 맡아 학교를 신촌으로 옮기고, 교사(校舍)를 신축하여 정식으로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후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1945년 전쟁이 끝나자 다시 돌아와 이화여자대학교 명예총장으로 있으면서 학교 발전에 진력, 학교에서 설교를 하다가 쓰러져 순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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